206.빼앗긴 천공탑
“이 도둑놈!”
드워프와 만족스러운 대화를 마친 카일이 밝은 표정으로 천공탑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달려온 사하가 카일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소리쳤다.
“당신, 어떻게 한 거죠?”
“무, 무슨 말씀 인지?”
“오늘 아침부터 천공탑의 에고가 제 명을 거역하기 시작했어요.”
사하의 아름다운 눈이 사납게 카일을 노려보며 물었다.
“저 때문이란 말입니까?”
카일이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아르산이 허락한 곳은 어디까지나 크레센트 숲이지 달의 언덕과 천공탑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모른다고 할 생각인가요?”
“사실… 어제 저녁, 이 천공탑의 주인을 만났습니다.”
“천공탑은 랜브란트 가문의 것이에요. 그리고 당대의 가주인 나 사하 랜브란트의 것이구요.”
사하의 외침에 카일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곳 크레센트 숲과 달의 언덕 모두 천 년 전부터 베일런트 가문의 것입니다.”
“…당신이 어떻게 베일런트 가문을 알고 있는 거죠?”
“조금 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 천공탑과 크레센트 숲의 주인이 찾아왔다고.”
“말도 안되요. 베일런트 가문의 가주는 천 년 전 스스로 리치가 되어 이 천공탑에 갇혀… 서, 설마!”
사하는 자신의 생각을 부정하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되물었다.
“설마… 베일런트 백작이 찾아왔다는 말인가요?”
“그분께서 제게 크레센트 숲을 내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달의 언덕과 천공탑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카일의 말에 충격을 받은 듯 사하가 주춤 뒤로 물러났지만, 곧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말도 안 돼! 여긴 랜브란트 가문의 영지이자 나의 땅이다. 누구도 나에게서 이곳을 빼앗아 갈 수 없어!”
“당신도 이곳의 원주인이 베일런트 가문이라는 사실을 알 겁니다.”
“흥! 그건 천 년 전의 일! 그 뒤로 이곳은 줄곧 랜브란트 가문의 것이었다. 누구도 내 것을 빼앗아갈 수는 없어!”
“정확히 말하면, 이곳을 천 년간 지킨 건 랜브란트 가문이 아니라 이곳의 에고 베일런트 백작님이 아닙니까?”
카일의 말에 사하가 입술을 깨물며 카일을 노려보았지만,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랜브란트 가문이 이곳에 성을 쌓고 가문을 일으킨 건 사실이지만, 이미 오래전 일이었다. 그 뒤로 이곳은 방치되어왔다. 지금까지야 천공탑의 에고 베일런트 백작으로부터 인정받아 이곳의 주인을 자처할 수 있지만, 백작이 자신을 거부한 이상 사하로서도 주인임을 주장할 수 없었다.
“당신이 무슨 말을한다고 해도 난 이 천공탑을 포기할 생각이 없어!”
사하가 손에 들린 지팡이를 바닥에 내려찍었다.
쿵-
지팡이에 박힌 붉은 수정이 빛을 발하며 암흑마기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겁니까?”
“천공탑의 에고가 날 거부한다면, 천공탑의 에고를 없애버리면 그뿐이에요.”
사하가 카일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생각 같아선 베일런트 백작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카일을 당장 죽여 소유권을 되찾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저주받은 운명을 벗어나게 해 줄 유일한 탈출구이기 때문이었다.
웅-
붉은 보석에서 흘러나온 암흑 마기가 주변으로 넓게 퍼지며 거대한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베일런트 백작이라고 해도 마왕의 힘은 견딜 수 없을 거예요.”
사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대한 마법진 위로 서서히 암흑마기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큭큭큭, 마왕의 힘을 끌어낼 생각인가?”
사하가 만들어낸 거대한 마법진 위로 음울한 웃음을 터트린 아르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리치!”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낸 아르산의 모습에 놀란 사하가 주춤 뒤로 물러났지만, 곧 앞으로 나서며 아르산을 향해 소리쳤다.
“천공탑의 에고? 설마 당신이 베일런트 백작인가요!”
“그렇다. 내가 바로 천공탑의 에고 베일런트 백작이다.”
아르산이 천천히 사하에게 다가가자, 흑기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아르산의 접근을 막아섰다.
“반쪽짜리 암흑기사인가?”
아르산이 앞을 막아선 흑기사를 살피며 말했다.
“경고하죠. 천공탑을 내놓는 게 좋을 거예요. 그럼 지금처럼 천공탑의 에고로서 남게 해 주죠.”
“그렇게 못하겠다면 어쩔 생각이냐? 마왕의 힘을 끌어내 날 소멸이라도 시킬 생각이냐?”
“못 할 것 없죠.”
“큭큭, 마왕의 힘을 믿는다면, 경고해 주겠다. 이곳에서 마왕의 힘을 함부로 끌어낸다면 결코 무사히 이곳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자신만만하군요. 하지만 조금 뒤에도 그런 소릴 할 수 있는지 두고 보겠어요.”
“난 이미 경고를 했다. 잊지 말거라!”
아르산이 천천히 공중으로 떠오르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사하는 아르산의 말을 무시하며 작은 단검을 손에 들었다.
“당신, 내 말을 따르지 않은 것을 후회할 거예요.”
사하가 아르산을 노려보며 손바닥을 칼로 그었다.
뚝-
뚝-
사하의 하얀 손가락을 지나 붉은 핏방울이 마법진 위로 떨어져 내렸다.
두웅-
마치 거대란 종이 울리듯, 천공탑이 낮은 진동을 일으킴과 동시에 마법진에서 검은 암흑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암흑마기는 곧 허공 위에 거대한 블랙홀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천공탑 정중앙에서 빛을 뿜어내던 거대한 수정 기둥들이 점점 푸른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큭큭 시작되었군.”
아르산의 음침한 웃음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르산과 비슷하지만 조금 더 맑고 깨끗한 목소리였다.
-차원 에너지 감지, 흡수를 시작합니다.-
우웅-
그와 동시에 마법진에서 뿜어져 나오던 암흑마기가 강력한 흡입력에 밀려 바닥으로 흡수되더니 수정 기둥이 검은빛으로 천천히 물들기 시작했다.
“성공이군.”
“설마 암흑마기를 흡수하는 것입니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정확히 말하자면 차원 에너지를 흡수하는 것이지.”
“차원 에너지?”
“내가 리치가 된 이유는 드래곤에 대한 복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차원이동에 대한 연구를 하기 위해서였다.”
“차원이동!”
아르산은 카일과 달리 드래곤에 의해 강재로 이곳으로 끌려왔으니 당연하게도 돌아갈 방법을 찾으려 했을 것이다.
“천 년 동안 수없이 연구해보았다. 다시 시간을 거슬러 내가 있던 세계로 돌아갈 수는 없을까?”
“그래서 방법을 찾았습니까?”
카일이 공중에 반쯤 떠 있는 아르산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차원의 문을 열 수 있는 존재는 특별하다. 마왕과 천신, 그리고 이들로부터 중간계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드래곤 뿐이다. 이들모두 특별한 기운을 이용해 차원의 문을 미세하게나마 열 수 있다.”
“그럼 그 특별한 기운이 바로 차원의 에너지란 말입니까?”
“그렇다. 이 천공탑을 만든 이유도 드래곤을 사냥해 드래곤 하트에 담겨 있는 차원 에너지을 얻기 위해서다.”
“아!”
카일이 놀란 눈으로 아르산을 바라보는 동안에도 마법진에서는 끊임없이 마기를 흡수하고 있었다.
“크아악-”
그때 허공에서 형성된 거대한 블랙홀에서 소름 끼치는 고함 소리와 함께 거대한 붉은 눈이 나타나 아르사을 노려보았다.
“…아르산! 당장 멈추지 못할까? 감히 내 권능을 흡수하려 하다니!”
“오랜만이군.”
“당장 멈추지 않으면 네놈을….”
“이런, 그런 말은 이곳이 어딘지 알고 말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르산의 푸른 귀화가 맹렬하게 타오르며 거대한 붉은 눈을 노려보았다.
“천공… 탑!”
“이곳은 나 아르산의 땅, 아무리 그대가 마왕이라도 이 땅에선 날 해칠 수 없다. 잊지 않았겠지?”
“잊지… 않았다.”
“그럼 이만 그대의 종을 데리고 이곳을 떠나는 것이 어떤가? 그대와의 인연을 생각해 그대의 암흑사제는 풀어주겠다.”
아르산이 바닥에 주저앉은 사하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법진으로부터 끊임없이 흡수되는 피와 마기로 인해 사하의 얼굴은 이미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조금 더 시간을 지체했다간 아마도 몸 안에 남아 있는 피가 부족해 죽고 말 것이다.
“…좋다. 그대의 말대로 물러나겠다.”
“현명한 판단이군.”
마왕이 바닥에 쓰러진 사하를 힐끔 바라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카일을 바라보았다.
“카일, 그대가 날 주인으로 섬기는 그 날을 기다리고 있겠다.”
“어림도 없는 소리!”
“큭큭, 두고 보면 알겠지.”
마왕이 웃음을 흘린 후, 허공에 떠 있던 블랙홀이 한순간 퍽 꺼지듯 사라져 버렸다.
“괜찮습니까?”
카일이 급히 사하에게 다가가 물었다.
“…저리 비켜요.”
사하가 냉정하게 카일을 밀어내며 아르산을 노려보았다
“전 포기하지 않아요. 언젠가 반드시 이곳을 되찾고 말겠어요.”
“큭, 기다리마.”
사하가 입술을 깨물며 돌아서 걸어가다가 멈춰 섰다. 그리곤 뒤를 돌아 카일을 돌아보았다.
“곧… 제국과 전쟁이 벌어질 거예요.”
“전쟁…?”
“트라발트 공작령을 공격한 자들이 제국이란 사실이 곧 밝혀질 거예요. 그럼 제국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을 거예요.”
“그걸 왜… 제게 알려주는 겁니까?”
“당신은 죽어선 안 되는 존재니까요. 그러니 부디 조심하길 바랄게요.”
말을 마친 사하가 냉정하게 돌아서서 천공탑을 빠져나가 버렸다.
“사실일까요?”
멀린이 카일의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사실이든 아니든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죠. 일단은 서둘러 왕도로 가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정말 전쟁이 벌어진다면 가장 먼저 알 수 있겠죠.”
“그런 언제 돌아오실 생각이십니까?”
“왕도에 갔다가 동부로 가야 하니 조금 시간이 걸릴 겁니다.”
카일의 말에 멀린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입니다. 전쟁이 난다면 가장 먼저 동부가 위험해질 텐데….”
“너무 걱정 마십시오. 전쟁이 결정이 나더라도 지금 당장 전쟁이 벌어지지는 않을 겁니다.”
“네?”
“지금은 겨울입니다. 전쟁을 일으키기 힘든 계절이죠.”
“아! 그렇군요.”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겨울은 피할 겁니다. 아마도 내년 봄쯤은 되어야 할 겁니다. 그때쯤이면 용병단도 어느 정도 체계를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카일이 미소를 지으며 멀린을 안심시켰다.
* * *
“서둘러! 오늘 안엔 일을 끝내야 할 거 아니야!”
뾰족하게 튀어나온 주둥이와 쫙 찢어진 작은 눈, 가는 수염에 작은 키까지 영락없이 쥐를 연상케 하는 사내가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인부들을 독촉했다.
“일은 잘되어 가는가?”
“아니, 가우디 남작님 아니십니까?”
쥐 상의 사내가 깜짝 놀라 다급히 가우디 남작에게 달려가 고개를 숙였다.
“걱정 마십시오. 오늘 안으로 반드시 무너진 성벽 수리는 마칠 겁니다요.”
“빠른 공사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견고함이야! 명심하게!”
“여부가 있습니까요. 남작님께서 설계하신 대로 정확하고 튼튼하게 만들 것입니다요.”
“좋아! 자네만 믿겠네! 그나저나 걱정이군, 이제 곧 겨울이라 공사가 힘들 터인데….”
가우디 남작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가우디 남작은 이번에 불타고 무너진 공작령을 최대한 빠르게 복구하라는 명과 함께 전권을 위임받았다. 그만큼 최대한 빠르게 복구해야 하지만, 겨울이라는 난관이 그의 앞을 막고 있었다.
“응?”
한참 동안 하늘을 올려다보던 가우디 남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보게!”
가우디 남작이 급히 옆에 있는 쥐 상의 사내를 불렀다.
“자네, 저게 보이나?”
가우디 남작이 높은 첨탑 위를 가리켰다.
“어딜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기 첨탑의 중간 부분 말일세! 뭔가 박혀 있는 것 아닌가?”
“어디… 아! 있습니다. 저도 보입니다요. 꼭 붉은 막대기 같습니다만….”
“흠, 저걸 뽑아올 수 있겠나?”
“…워낙 높은 곳이긴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곧 가져오겠습니다.”
쥐 상의 사내가 급히 어디론가 뛰어가더니,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첨탑에 박혀 있는 물건을 뽑아왔다.
“남작님! 이런 것이 첨탑에 박혀 있었습니다.”
쥐 상의 사내가 가죽에 돌돌 말린 물건을 가우디 남작에게 내밀었다.
“이건…!”
텅-
가죽 천을 풀어내던 가우디 남작이 그만 들고 있던 물건을 바닥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물건은 끝이 갈수록 좁아지는 커다란 붉은 스피어로, 포효하는 붉은 드래곤이 정교하게 양각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