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아르산의 제안2
아르산을 따라 도착한 곳은 수정 기둥이 빛을 발하는 거대한 공동 안이었다.
벽면 가득 수백 개의 동굴이 뚫려 있고, 입구마다 아름다운 동식물들이 정교하고 세심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아르산 님!”
카일과 멀린이 주변을 열심히 둘러보며 구경하고 있을 때, 말로만 듣던 드워프가 급히 달려나와 아르산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파르트를 만나러 왔다.”
“조금 전 아이들을 보냈습니다. 곧 돌아오실 겁니다.”
중년의 드워프가 아르산을 보며 공손하게 말을 했지만, 카일과 멀린을 향해선 경계심을 넘어 은근한 적개심마저 보이고 있었다.
“아츠. 저들은 그대들을 탄압했던 적들이 아니다.”
“하지만, 저들은 인간입니다.”
“나 또한 리치이기 이전에 인간이었다. 잊었는가?”
“…송구합니다.”
“오늘 저들을 데려온 것은, 그대들의 당면한 고민을 해결해주기 위해서다.”
“설마…!”
드워프 일족의 최대의 고민은 말라버린 광물자원에 있었다. 그 일로 드워프 마을은 잔류와 이주를 넣고 양쪽으로 갈려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워낙 팽팽해 아직 이렇다 할 결론을 내리지 못했고, 때문에 아르산에겐 아직 이런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츠는 이주를 강력히 주장하는 드워프 중 하나였다.
“아, 아르산 님께서 어떻게….”
“이곳은 나의 땅, 이곳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도 내 눈을 피할 수는 없다.”
아르산의 말에 더없이 창백하게 굳은 아츠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송구합니다. 제가 이주를 원한 것은 결코 아르산 님의 은혜를 잊어서가 아닙니다. 만약 이주가 결정되더라도 전 이곳에 남아 평생 아르산 님을 따를 생각이었습니다.”
“일어나거라. 이미 너희 드워프는 500년 동안 은혜에 대한 보답을 충분히 했다. 너희들이 떠난다 해도 붙잡을 생각이 없다.”
“아, 아르산 님.”
그때였다. 붉은 수염을 휘날리며 달려온 파르트가 아르산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급히 아츠의 옆에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우리 붉은 망치 일족이 지금껏 명맥을 유지하고 번성하며 살아온 것은 모두 아르산 님 덕분입니다. 떠나다니, 당치 않습니다. 비록 지금은 어렵고 힘들지만, 이 크레센트 숲을 다시 살피면 분명 양질의 광맥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이미 광맥이 말랐다. 지금 필요한 건 다른 해결책을 찾는 것이다.”
아르산의 말에 파르트가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해결책이란 한 가지뿐이었다. 이 크레센트 숲을 떠나 양질의 광맥이 있는 곳으로 이주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난 너희 드워프 일족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기 위해 찾아왔다.”
“제안이라니, 당치 않습니다. 그냥 명을 내려주십시오.”
“아니다. 이는 너희 일족이 직접 선택하고 결정해야 할 일이다.”
아르산이 뒤를 돌아보며 카일을 불렀다.
“이 아이의 제안을 들어보거라, 어쩌면 너희들의 고민을 해결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르산이 뒤로 물러났다.
“카일이라 합니다. 드워프 일족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카일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중년의 드워프들은 노골적으로 적개심을 보이기까지 했다. 그나마 젊은 드워프들만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카일을 살필 뿐이었다.
“솔직히 말하겠네, 젊은 인간이여. 우리 드워프 일족은 5백 년 전 인간의 탄압으로 수많은 일족이 목숨을 잃었다. 그 때문에 지금도 드워프들은 인간에 대한 증오심이 뿌리 깊게 박혀있다.”
파르트가 살며시 아르산의 눈치를 살핀 후 말을 이었다.
“아르산 님의 말씀 때문에 그대와 대화를 나누고는 있지만, 우리가 그대의 제안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극히 적다는 걸 알아두게.”
“알겠습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일단 제안을 드리기 전, 이걸 봐주시겠습니까?”
카일이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검집째 뽑아 파르트에게 건넸다
“…흠, 형편없군, 이제 망치를 잡은 어린이도 이것보단 잘 만들겠다.”
파르트가 혹평을 늘어놓으며 천천히 검을 뽑았다.
스르릉-
미끄러지듯 소리를 내며 빠져나온 은백색의 검신이 밝은 빛을 받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허억-.”
“시, 신의 금속!”
“운석!”
주변에서 지켜보던 드워프들이 달려들어 검신을 살피며 소리쳤다.
“신의 금속?”
“드워프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을 그리 부른다. 망치의 신 토르가 드워프를 위해 하늘에서 내려준 금속이라고 말이다.”
“아!”
아르산의 말에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드워프의 입장에선 하늘에서 떨어진 금속은 신이 내려준 선물일 수 있었다.
“아니다!”
그때 검을 세세히 살핀 파르트가 큰 소리로 말했다.
“이건 신의 금속이 아니다. 어허, 이럴 수가. 설마 신의 금속을 인위적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파르트의 말에 드워프들이 너도나도 검을 돌려보며 비명을 지르듯 소란스러워졌다.
“이, 이걸 도대체 누가 만든 것인가?”
파르트가 검을 들고 카일에게 다가와 물었다. 그의 얼굴 어디에서도 더 이상 적개심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전에 이것도 봐주십시오.”
카일이 웃으며 어깨에 메고 있던 가죽 주머니를 풀어 라이플을 건넸다.
“라이플이란 물건입니다.”
카일이 라이플을 건네자 파르트가 번개처럼 달려들어 라이플을 빼앗듯 가져갔다.
“이런 망할 놈, 고귀한 금속에 무슨 짓을 한 것이냐!”
파르트가 검게 그을린 강철을 보며 분통을 터트렸다. 그리곤 카일이 설명도 하기 전 능숙하게 라이플을 분해해 버렸다.
“호오, 검을 만든 놈과 같은 녀석이 만들었어, 제법 정교하게 만들었군.”
“통짜로 만든 신의 금속을 정교하게 깎았군, 체결하는 방식도 아주 독특해.”
“보아하니 여기에 뭘 넣어 발사하는 장치 같은데?”
“이걸 보게, 안에 강선까지 파놓았어! 이만한 강도의 금속을 가공하려면 분명 오러를 사용했을 거야.”
“인간 대장장이 중 오러를 사용하는 자가 있었던가?”
“그런 자가 있을 리 있나!”
“아무튼 신기해, 망치질은 서툴지만 아주 독특하고 기발한 무기야.”
“어때. 만들 수 있겠어?”
“금속만 있다면야 얼마든지.”
드워프들이 물러나자 파르트가 순식간에 라이플을 조립해 카일에게 내밀었다.
“아주 인상적인 물건이야! 그래, 우리에게 이런 걸 보여준 이유가 있겠지? 말해보게.”
파르트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이미 어느 정도 카일이 원하는 것을 알아챈 것 같았다.
“제가 원하는 건, 이 물건을 만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대신….”
“라이플 한 정당 신의 금속 한 수레!”
“아니, 그게 아니라….”
“……너무 많나?”
카일의 당황한 표정에 파르트가 머리를 긁적였다.
“자네가 너무 심했어! 세상에, 이걸 만드는 데 신의 금속 한 수레라니!”
“암. 말도 안 되지! 우리가 도둑놈도 아니고 말이야!”
“반 수레 정도면….”
“그것도 좀 많나?”
“그래도 손이 좀 많이 가는 물건인데 그 정도는 받아야….”
드워프들이 서로 소란스럽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렇게 가만히 놓아두었다간 언제 결론이 날지 알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아니! 그게 아닙니다. 강철의 제조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카일의 커다란 고함에 왁자지껄 떠들어대던 드워프들이 한순간 입을 꽉 다물며 카일을 바라보았다.
“…지금, 뭐라고 했나?”
“강철의 제조법을 알려드리겠다는 말입니다.”
“강철? 설마 이 신의 금속을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대신, 강철을 만들어내면 셋 중 하나는 제 몫으로 남겨주십시오. 그리고 제가 원하는 물건을 만들어 주시면 됩니다.”
“허허, 정말인가?”
“물론입니다. 만약 제 몫의 강철이 부족하다면, 필요한 만큼 제가 구매를 하겠습니다.”
“구매? 우리 드워프들은 인간과는 달리 돈이란 물건을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다른 물건으로 드릴 수 있겠지요. 예를 들면 식량이나 생필품 말입니다.”
“시, 식량….”
“생필품이면… 혹시 맥주도 포함되는 것이냐?”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카일이 웃으며 가방에서 작은 도자기 병을 꺼냈다. 음식을 만들 때 넣기 위해 가져온 작은 술병이었다.
“이건 뭐냐?”
파르트가 신기한 듯 도자기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탄성을 터트렸다.
“오오, 이 완벽한 균형과 은은한 색감, 설마 이 물건도 그대, 젊은 인간이 만든 것인가?”
“그렇습니다. 그보다 마개를 열어 보십시오.”
“마개?”
파르트가 조심스럽게 마개를 따자 안에서 은은한 과일 향이 흘러나왔다
“수, 술이다.”
“술!”
모든 드워프들이 일제히 파르트의 손에 들린 작은 도자기 술병으로 향했다.
“어떻습니까? 대금은 식량과 생필품으로 지급하겠습니다. 물론 그 안에는 맥주와 지금 들고 계신 수수술도 포함되어 있겠지요.”
“그, 그렇다면, 꿀꺽…. 거절할 이, 이유가 없겠지!”
파르트가 술병을 보며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내용물을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이런! 막아!”
고함과 함께 아츠가 족장인 파르트에게 달려들어 술병을 빼앗아 달아났다.
그 모습에 다른 드워프들도 아츠의 뒤를 따라 우르르 사라져 버렸다.
“감사합니다.”
“크윽, 나야말로 고맙네! 덕분에 그동안 고심하던 큰 문제가 사라졌으니 말이야. 무엇보다 오랜만에 곡물로 만든 술을 먹으니 기분이 아주 좋구만. 하하!”
파르트가 작은 덩치와는 달리 크게 웃었다.
“그럼 곧바로 강철 제조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물론이네! 따라오게. 가까운 곳에 대장간이 있으니….”
파르트가 앞장서 걸으며 물었다.
“망치는 언제부터 잡은 것인가?”
“제가 만들었다는 걸 알고 계셨군요.”
“손을 보면 망치를 잡은 흔적이 보이니까.”
“처음 망치를 잡은 건 10살 때입니다. 횟수로 따지만 7년 정도 됩니다.”
“흠, 7년이라! 허허 이제 보니 인간치고는 재능이 있었군.”
“그렇습니까?”
“우리 드워프는 본능적으로 금속의 결을 볼 수 있지만, 인간은 달라. 오직 수많은 경험을 통해서만이 결을 느낄 수 있지. 한데 자넨 어린 나이에 이미 금속의 결을 타고 있더군. 그만하면 대단한 재능이라 할 수 있지.”
“감사합니다.”
카일과 파르트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어느새 대장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장간은 커다란 원형의 화로를 중심으로 대략 열 명의 드워프가 작업을 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철괴를 가져다주시겠습니까?”
“신의 금속에 철이 들어가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름도 강철입니다.”
“허! 철이라! 잠깐 기다리게!”
파르트는 직접 한쪽에 쌓아놓은 철괴를 들어 카일의 앞에 내려놓았다.
“다른 금속도 말해보게! 원하는 금속은 뭐든 가져다주지.”
“그럴 필요 없습니다. 철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카일이 웃으며 철괴를 화로 속에 밀어 넣었다.
“설마, 합금하지 않는단 말인가?”
“아닙니다. 합금이 이루어지긴 하지만, 그 물질이 금속은 아닙니다.”
카일이 웃으며 붉게 달아오른 철괴를 집게로 집어 모루 위에 올려놓고 망치로 힘껏 내려쳤다.
꽝-
불꽃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어두운 대장간을 환하게 밝혔다.
“이 불꽃들은 철에 함유된 탄소가 공기와 만나 타올라 생기는 현상입니다. 이렇게 탄소를 빼내야 철이 강하면서도 질겨지지요.”
“그럼 그렇게 망치질만 강하게 하면 강철이란 신의 금속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아닙니다. 탄소를 태운 건 고작 표면뿐입니다. 그러니 펴낸 철을 다시 접고, 펴기를 반복해 철괴 전체의 탄소량을 균일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허허! 설마 이렇게 쉽게 철괴를 신의 금속으로 만들 수 있다니…. 그저 놀랍다고밖에 할 수 없군.”
파르트가 연신 탄성을 터트리며 카일의 설명을 경청했다.
그리고는 직접 철괴를 가져와 카일을 따라 접쇠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