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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용병라이더-204화 (204/404)

204.아르산의 제안1

이른 아침 잠에서 깨어난 카일은 떠날 준비를 마친 뒤 가벼운 마음으로 방을 나섰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 천공탑과 크레센트 숲은 언제든 적으로 돌변해 목숨을 노릴 위험천만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단 하루, 아르산과의 대화 이후 이곳은 샤론 마을처럼 카일에겐 편안하고 안정된 공간으로 바뀌어 있었다.

“편히 주무셨습니까? 카일 님.”

가죽 의자에 앉아 찻잔을 들어 올린 멀린이 미소를 지으며 카일을 반겼다.

“혼자 계신 겁니까?”

“다들 잠에서 깨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멀린이 웃으며 찻잔을 내밀었다.

“차향이 좋군요.”

“주방에 가보니 찻잎은 물론 다양한 식재료가 준비되어 있더군요. 아마도 밤사이 누군가 가져다 놓은 것 같습니다.”

“이곳에 주방도 있습니까?”

“주방뿐 아닙니다. 다수가 생활하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식당과 크고 작은 응접실도 여러 곳 있었습니다. 객실의 숫자도 40개는 족히 넘어 보였습니다.”

“설마 직접 확인해 보신 겁니까?”

“하하, 하늘탑과 비교를 하려다 보니…!”

멀린이 무안한 듯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천공탑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으신 모양이군요.”

“전 하늘탑을 연구하며 5서클에 올랐습니다. 그보다 크고 다양한 고대 마법이 적용된 천공탑을 연구해보고 싶은 건 마법사로서 당연한 노릇이지요. 솔직히 시간만 허락한다면 이곳에 남고 싶을 정도입니다.”

멀린이 아쉬운 듯 찻잔을 매만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정도입니까?”

“느끼시진 못하시겠지만, 지금 이 공간에도 수많은 마법들이 연쇄적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말입니까?”

카일이 급히 눈을 감고 마나의 흐름을 살폈다. 비록 가슴 쪽 마나플라워가 동결되어 오러를 뽑아내지는 못하지만, 상급 엑스퍼트로서의 능력과 마나에 대한 친화력만큼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카일은 곧 고개를 저었다.

한참 동안 눈을 감고 대기에 흐르는 마나를 느껴보았지만, 이상한 점을 찾아볼 수 없었다

“글쎄요? 약간 이질감은 있지만, 크레센트 숲 전체에 걸려있은 마법진을 생각한다면 이 정도의 마나 흐름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아니, 오히려 너무 안정적이라 할 수 있군요.”

“바로 그겁니다.”

“네?”

“숲 외곽과는 달리 이 천공탑은 숲 전체에 펼쳐놓은 마법진의 중심입니다. 가장 급격하게 움직여야 할 곳의 마나가 숲 외곽보다 더 안정적입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럼 이곳에 대기의 마나를 안정시키는 마법진이 숨겨져 있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런 것이라면 전혀 놀랄 만한 일이 아니지요.”

멀린이 작은 주전자를 들어 빈 찻잔에 기울이자 찻물이 또로록 흘러 찻잔을 가득 채웠다.

“흐름은 곧 에너지입니다. 흘러가는 마나 역시 미약한 에너지를 포함하고 있죠. 하지만 이런 에너지에는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야 효율이 떨어지기 때문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쉽게 말해 1실버의 에너지를 얻기 위해 1골드를 사용해야 한다는 말인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마법사라면 전혀 사용하지 않을 방식이죠.”

멀린은 잠시 말을 멈추곤 알맞게 식혀진 찻물을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적용된 마법은 마법사들이 비합리적이라 생각한 방식을 가장 합리적인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곳에 적용된 마법진을 연구할 수만 있다면.”

“멀린 님의 경지를 한층 더 끌어올릴 수 있겠군요.”

“회색마법은 서로 상충된 마나를 사용하는 만큼 에너지의 손실이 큽니다. 만약 천공탑에 적용된 원리만 알아낼 수 있다면, 어쩌면 제 마법적인 단점을 극복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멀린이 침울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솔직하게 말했다.

생각 같아선 이곳에 남아 조금 더 천공탑에 대한 연구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은 엄연히 암흑마법사 사하의 것이다.

지금이야 사하의 도움으로 이곳에서 안전하게 머물고 있지만, 언제 적으로 돌변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멀린 님은 이곳에 남으십시오.”

카일의 갑작스러운 말에 멀린이 깜짝 놀라 카일을 바라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천공탑은 그 자체만으로 마법적인 가치가 무궁무진합니다. 언제 적으로 돌변할지 모를 암흑마법사가 과연 허락을 하겠습니까? 저라면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걱정 마십시오. 허락은 사하 양이 아닌 이곳의 진정한 주인에게 받으면 되니까요.”

“진정한… 주인?”

“어차피 이곳에 있으려면 미리 얼굴을 익히고 도움을 받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아르산 님?”

카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닥에서부터 검은 기류가 뿜어져 나오며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리… 치!”

갑작스러운 리치의 등장에 멀린이 급히 카일의 앞을 막아서며 십여 장의 스크롤을 던졌다.

“에너지 볼.”

화르륵-

멀린의 외침과 동시에 십여 개의 스크롤이 회색빛으로 발광하며 아르산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하지만 아르산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날아오는 에너지 볼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디스펠!”

아르산의 음울한 외침과 함께 매섭게 날아오던 에너지 볼이 허무할 정도로 쉽게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이, 이럴수가!”

마법을 무로 돌리는 디스펠은 상대보다 최소 2서클 이상은 높아야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다. 더구나 멀린은 5서클 각인마법사다. 비록 사용한 마법이 3서클 에너지 볼이지만, 5서클 마력을 이용한 만큼 상대에게는 최소 7서클 이상의 마력이 필요했다. 더구나 멀린은 스크롤과 각인을 기습적으로 사용했다. 아무리 상대의 경지가 높다 해도 마법의 발현 속도는 멀린이 월등히 앞섰다. 그런데도 단지 영창만으로 마법을 무로 돌린 것이었다.

“최소 8서클, 어쩌면 9, 9서클 대마법사!”

멀린이 충격을 받은 듯 주춤 뒤로 물러났다. 리치는 라이플 베슬이 부서지지 않는 이상 죽지 않는다. 즉 영혼 불멸의 대마법사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아르산 님 괜찮으십니까?”

갑작스러운 멀린의 공격에 당황한 카일이 급히 달려가 물었다.

“큭큭, 이 정도의 저급 마법은 몸에 직격을 해도 문제가 될 게 없다. 다만 파편이 튀면 실내가 부서질 것 같아 손을 쓴 것뿐이다.”

“휴, 다행이군요.”

카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설명도 제대로 하지 않고 아르산 님을 부르는 바람에 멀린 님이 오해를 한 겁니다. 너그러이 용서해주세요.”

“큭, 괜찮다. 오히려 마법사가 주인을 위해 몸을 던져 앞을 막았으니 칭찬을 해 줘야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카일이 다시 한번 아르산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멀린을 돌아보았다.

“죄송합니다. 미리 말씀드려야 했는데, 이분은 크레센트 숲과 천공탑의 주인이자 에고, 아르산 드 베일러트 백작님이십니다.”

“에고!”

멀린이 깜짝 놀란 눈으로 아르산을 바라보았다.

“멀린 님.”

“아! 죄송합니다. 머, 멀린입니다. 마나를 선도하는 대마법사님께 인사드립니다. 조금 전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오랜만에 들어보는 칭호군! 아르산이라 한다.”

멀린을 내려다보던 아르산이 고개를 돌려 카일을 바라보았다.

“이 녀석을 이곳에 남기고 싶은 것이냐?”

“네, 아르산 님께서 천공탑을 연구할 수 있게 도와 주십시오.”

“카, 카일 님….”

“멀린 님께서는 이곳에 남아 해주실 일이 있습니다.”

카일이 품 안에서 양피지 여러 장을 꺼냈다.

“이곳에 만들 용병들의 훈련소와 그들이 사용할 무기들의 작동 원리가 담긴 도면입니다. 이것들을 만들어 주십시오.”

“이,이걸 제가….”

“부탁드립니다. 멀린님”

“아, 알겠습니다.”

“라이플을 만들려면 강철을 사용해야 할 텐데, 어쩔 생각이냐? 새로운 대장장이를 찾아 강철의 비밀을 알릴 생각이냐?”

아르산의 물음에 카일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언젠가 외부에 알려질 수도 있지만, 지금 당장은 최대한 감출 생각입니다. 그러니 라이플은 제가 돌아와 직접 만들어야죠.”

“너에게 한가지 제안을 해도 되겠느냐?”

“제안이라면…?”

“이곳 지하엔 훌륭한 대장장이의 마을이 있다. 그들에게 강철의 비밀을 알려다오. 그럼 그들이 너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만들어 줄 것이다.”

“설마! 그들이 아직도 살아 있다는 말입니까?”

아르산의 말을 곧장 알아들은 멀린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멀린 님은 아르산 님이 말한 대장장이들을 알고 계십니까?”

“지하에서 마을을 일구며 살아가는 종족은 단 하나뿐입니다.”

“종족? 설마… 드워프!”

“큭큭, 세상엔 드워프도 엘프도 여전히 존재한다. 다만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살아갈 뿐이지, 어떠냐? 그들이라면 인간과 교류가 거의 없으니, 강철에 대한 비밀도 지켜질 것이다.”

“그렇다면 저야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 시간이 없으니 바로 가도록 하지!”

“부탁드립니다.”

카일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카일과 멀린의 발밑으로 검은 기류가 흘러나와 마법진을 형성했다.

“워프.”

아르산의 외침과 함께 세 사람의 모습이 꺼지듯 응접실에서 사라져 버렸다.

* * *

작은 키와 단단한 허리, 굵고 튼튼한 팔과 다리, 그리고 길게 늘어트린 붉은 수염을 목에 휘감은 사내가 거대한 곡괭이를 들고서 천천히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어때?”

“걸렀어!”

“말랐단 말이냐?”

“길어야 3년이다.”

바위 이곳저곳을 살피던 사내가 인상을 찡그리며 뒤로 물러났다.

“다른 곳은?”

“대부분이 똑같다. 이제 이곳에 남은 건 철광석과 보석들 뿐이다.”

“흠…. 큰일이군.”

“족장, 아니, 나의 형제 파르트. 이젠 아르산 님께 말씀드려야 한다.”

“타르파! 지금 아르산 님의 은혜를 저버리란 말이냐?”

붉은 수염의 드워프가 매서운 눈으로 타르파를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 드래곤이 완전히 멸족한 후 수많은 드워프들이 드래곤의 사역자란 미명 아래 죽거나 노예로 팔려 갔다. 그때 우릴 보호해준 유일한 분이 바로 천공탑의 주인 아르산 님이다.”

“안다. 우리 붉은 망치 일족 중 누가 아르산 님의 은혜를 잊겠느냐! 하지만 광물이 없는 드워프는 존재할 수 없다. 너도 알지 않느냐!”

“그래도… 은혜를 저버릴 수는 없다.”

파르트가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원래 크레센트 숲은 상당히 다양하고 많은 광물자원이 묻혀있는 자원의 보고로, 드워프들에게는 천국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자원은 유한한 것, 수백 년이 흐른 지금 크레센트 숲에 남아 있던 대부분의 자원들은 모두 고갈되었고, 이제는 새로운 광맥을 찾아 이주하는 것만이 유일한 대안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크레센트 숲에서 드워프는 중요한 존재였다.

아무리 강대한 마법진으로 보호받고 있는 천공탑이지만, 모든 것을 마법으로만 해결할 수는 없었다. 작은 부분에선 오히려 섬세한 드워프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 많았다. 무엇보다 천공 창은 오직 드워프만이 만들 수 있는 특수 합금과 세밀한 가공 능력이 필요한 만큼 드워프가 크레센트 숲을 떠난다면 천공탑에도 큰 영향이 끼칠 수밖에는 없었다.

“나도 이곳을 떠나긴 싫다. 이곳은 우리 드워프들이 가장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곳이니까,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장인 일족이란 정체성이다.”

타르파의 말에 파르트 역시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수백의 드워프를 이끄는 붉은 망치마을의 족장이다. 타르파보다 더 지금의 위기에 대해 걱정하며 밤잠을 설치며 고민하고 있었다.

“휴! 알겠다. 내일 아르산 님을 만나….”

“헉헉, 족장님! 아르산 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동굴 안쪽에서 달려온 젊은 드워프가 급히 파르트 앞에 멈춰 서며 거친 숨을 토해냈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십니다.”

“혼자가 아니리니?”

“이, 인간 둘을 데려오셨습니다.”

“인… 간?”

타르파가 당황한 둣 파르트를 바라보았다.

“일단 아르산 님께 가보자, 그분께서 인간을 데려왔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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