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203화 (203/404)

203.천공 탑의 비밀3

“환생자…?”

카일을 한참이나 내려다보던 두 개의 푸른 귀화가 드디어 무거운 침묵을 깨고 음울한 물음을 던졌다.

“그, 그렇습니다.”

“기억을 가지고 태어난 환생자란 말이지?”

“아니, 환생자라기보단 영혼이 빙의되었다는 말이 정확할 수 있겠군요. 전생에서 죽은 뒤 눈을 뜬 순간 카일이란 아이를 만났으니까요.”

카일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큭큭, 환생이든 빙의든 무슨 상관이냐! 그냥 너 자신으로 살면 되는 것을.”

아르산이 기괴한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카일의 몸을 억압하고 있던 검은 밧줄들이 흐물흐물 액체로 변하며 바닥으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감사합니다.”

카일이 팔을 주무르며 아르산을 바라보았다. 검은 광택이 흐르는 해골과 불타는 두 개의 푸른 귀화는 기괴하고 공포스러웠지만, 카일에겐 어쩐지 친숙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자신과 같은 지구에서 왔다는 동질감 때문일 것이다.

“안산이다.”

갑작스러운 아르산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카일이 고개를 들었다.

“본래의 내 이름이다.”

“아! 전 최일입니다. 이천 고아원 출신이죠.”

“이천?”

푸른 기화가 갑자기 카일에게 바짝 다가왔다.

어쩐지 상당히 반가워하는 모습이었다.

“내가 있던 곳은 오산이다. 미 공군기지에서 카투사로 있었다.”

“가까운 데 계셨군요. 저도 죽기 전까지 군인으로 외국에 파견 중이었습니다.”

“군인? 직업군인으로 있었단 말이냐.”

“네, 첫 임무에서 적이 발사한 RPG에 목숨을 잃었죠. 그래도 전 전생에 대한 미련은 없습니다. 여기서 아버지를 만났으니까요.”

카일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가족? 난 가족에 대한 좋은 기억은 없다. 내가 기억하는 건 조부가 남긴 막대한 유산을 한 푼이라도 더 차지하려 발악하는 인간들 뿐이었지. 그래도 한 사람의 기억만큼은 아직 남아있다.”

“천 년 동안이나 기억에 남았다면 소중한 분이었나 보군요.”

“큭큭, 리치는 뇌가 없다. 그저 리치가 되기 전 기억을 라이플 베슬에 저장할 뿐이지. 하지만 그녀는 분명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좋아하던 분이 계셨군요.”

“오산에서 우연히 만난 여대생이었다. 큭큭큭.”

아르산이 갑자기 기괴한 웃음을 한참이나 흘리기 시작했다. 음울하고 음침한 웃음소리였지만, 웃음 속에 담긴 감정은 즐거움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녀가 말한 내용 대부분이 거짓이었다.”

“그럼… 그분은?”

“날 만났을 때가 아마도 18살, 그때가 추운 겨울쯤일 거다. 나와는 4살이 차이가 나더군. 처음엔 거짓말을 했단 사실에 화가 났지만, 주변에서 그러더군, 무슨 상관이냐고. 어차피 전역할 때쯤이면 그녀도 어엿한 성인이 되어 있을 텐데 말이야.”

“그렇군요. 그럼 지구에선 언제….”

“죽었냔 말이냐?”

“그, 그렇습니다.”

“난 환생을 하거나 빙의하지 않았다. 그저 타의에 의해 이곳으로 끌려왔을 뿐이지.”

“타의? 설마 차원을 이동했단 말입니까?”

“맞다. 망할 놈의 드래곤이 장난을 친 것이지.”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르산은 그때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듯 두 눈에 맺힌 귀화가 맹렬하게 타올랐다.

“그놈들은 날 데려와 온갖 마법 실험을 자행하더니, 어느 날 몬스터의 먹이로 오크 평원에 버렸다. 그때 날 구해준 분이 바로 스승님이었지.”

고저 없는 음울한 목소리에서도 스승에 대한 아르산의 그리움을 느낄 수 있었다.

“스승님께서는 날 치료해 주셨고, 마법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베일러트란 성과 함께 이곳 크리센트 영지를 물려 주셨지.”

“좋은 분이셨나 보군요.”

“마법에 있어서 만큼은 엄하고 혹독하셨지만, 평소엔 온화하고 따뜻한 분이셨다.”

“그렇군요.”

“그보다. 어떻게 신성력을 얻은 것이냐? 설마 여신을 섬기기로 했느냐?”

“아닙니다.”

카일이 고개를 저으며 두 손을 들어 올려 암흑마기와 신성력을 동시에 끌어올렸다.

웅-

그 모습을 본 아르산이 주춤 물러났다.

“암흑마기와 신성력?”

“흑기사를 상대하다 얻은 암흑마기입니다. 마기를 제거하려 신성력을 주입했다가 이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두 개의 상충하는 기운이 한 몸에 있다니 놀랍구나!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아르산이 두 손에 피어오른 기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마도 제가 익힌 태극권 때문인 것 같습니다.”

“태극권?”

“태극권을 익히면 순수하고 방대한 마나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때문인지 마왕과 여신이 절 암흑기사와 성기사로 만들려 하고 있습니다.”

“순수한 오러?”

아르산이 카일에게 바짝 다가섰다.

“나에게 오러를 보여줄 수 있겠느냐?”

“어렵지 않습니다.”

카일이 마기와 신성력을 갈무리한 후 청백색의 오러를 끌어올렸다. 아르산은 카일의 오러를 한동안 지그시 바라보더니 기괴한 웃음을 흘렸다.

“큭큭, 역시 내 생각이 맞았군, 순수한 혼돈의 오러가 섞여 있어.”

아르산이 갑자기 기괴한 웃음을 뚝 그치더니 카일을 향해 무겁게 말했다.

“성기사와 암흑기사? 어느 것이 되더라도 대륙은 재앙을 맞을 거다.”

“재앙… 입니까?”

카일이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성기사는 트롤만큼 강한 치유력을 가지고 있다. 신성력만 충만하다면 가히 불사의 몸이라 할 수 있다. 헌데도 성기사는 기사들보다 약하다. 왜일 것 같으냐?”

“아버지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신성력은 치유의 목적이 강해 오러보다 약하다고 말입니다.”

“그런 경향도 있지만, 그보단 몸 안에 채울 수 있는 그릇의 한계 때문이다.”

“한계?”

“성기사는 신에 귀의함으로써 엑스퍼트에 준하는 신성력을 몸에 담을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스스로의 힘이 아닌 신에 대한 신실한 믿음만으로 얻은 힘이니, 아무리 수련을 해도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경지를 넘어선 기사가 스스로 오러를 버리고 신성력으로 기운을 대체하면 한 단계 높은 경지로 나아갈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큭, 그러기 위해선 대가를 치러야 한다.”

“대가라니요? 그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기운을 강제로 바꾸는 것이다. 경지가 높을수록, 오러의 양이 많을수록, 상상도 하지 못할 엄청난 고통이 따르지.”

“하지만 전 그런 고통을 느낀 적이 없습니다.”

“당연하다. 너의 오러는 태초 혼돈의 마나처럼 어떠한 기운으로든 바뀔 수 있다. 그리고 넌 기도가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신성력을 한계 없이 만들어낼 수 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불사지체…!”

“그렇다. 여신의 가호까지 받는다면 과연 누가 널 죽일 수 있겠느냐? 대륙에 신의 힘과 의지를 각인시켜줄 대상으로 너만 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 마왕은 왜 절 노리는 겁니까?”

“마왕은 이유가 더 명백하다. 중간계로의 강림과 파괴.”

“제가 아니라도 사하와 시안느 경을 통해 대륙으로 넘어오려 한 것이 아닙니까?”

“맞다. 하지만 마왕이라도 중간계에서는 오랫동안 머물 수 없다. 고작해야 하루에서 이틀 정도가 고작이다. 지난번 드래곤 로드와의 혈투에도 단 하루의 강림으로 모든 힘을 소진하고 다시 마계로 돌아갔으니까.”

“절 통한다면 다르단 말입니까?”

“다르다.”

아르산이 단호하게 말했다.

“널 통하면 마왕의 본체가 직접 이곳으로 넘어올 필요가 없다. 사념체를 만들어 몸과 기억만 차지해도 대륙을 혼란에 빠트리기엔 충분할 테니 말이다. 더구나 마왕의 권능과 한계 없는 강력한 암흑마기라면 누가 널 죽일 수 있겠느냐.”

“그렇군요. 그래서 절….”

카일이 침울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어쩌면 사하의 말대로 대륙을 위한 결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표정을 보니, 대륙을 위해 스스로 목숨이라도 끊을 생각이냐?”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결정을 내려야겠죠.”

“멍청한 생각이다.”

“네?”

“어떤 일이 있어도, 설사 죽음이 눈앞에 와도 포기하지 마라.”

“하지만 저로 인해 대륙의 수 많은 사람들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큭, 그런 게 대체 너와 무슨 상관이냐? 그런 건 남은 사람들이 헤쳐나갈 일이다. 넌 스스로를 최선을 다해 지키면 그뿐이다.”

“하지만 아르산 님도 대륙을 위해 천공탑을 만들고 스스로 에고가 되지 않았습니까?”

“크크크, 난 대륙을 위해 천공탑을 만든 것이 아니다.”

“예에?”

생각지도 못한 아르산의 말에 카일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천공탑은 스승님께 물려받은 이 땅이 드래곤에게 짓밟히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 만들었다. 스스로 에고가 된 것도 드래곤에 대한 복수 때문이지 대륙을 위한 게 아니었다. 뭐 또 다른 이유도 있지만….”

“그, 그렇군요.”

“세상은 네놈이 걱정할 정도로 나약하지 않다. 수많은 드래곤도 물리친 대륙의 인간들이 고작 암흑기사나 성기사 하나로 무너질 것 같으냐?”

아르산의 단호한 말에 잠시 절망에 빠졌던 카일의 얼굴에 점점 강한 의지가 깃들었다. 아르산의 말대로 중간계의 절대자인 드래곤을 멸족시킨 건 인간들이었다.

인간의 뭉쳐진 힘이라면 아무리 강력한 성기사와 암흑기사라도 충분히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카일은 가슴에 남아있던 걱정을 털어버린 듯 밝게 웃으며 아르산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르산 님 덕분에 답답했던 가슴이 뚫린 듯 시원해졌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다만, 앞으로 신전과 사하 모두 널 노릴 것이다. 그들 모두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어 혼자로선 감당하기 힘들 텐데 앞으로 어쩔 생각이냐?”

“사하에게도 세력이 있습니까?”

“그녀에겐 물려받은 랜브란트 가문의 유산과 오랜 세월 그들이 일군 강대한 세력이 있다.”

“그, 그렇군요.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저도 나름 준비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준비?”

카일이 웃으며 한쪽에 세워둔 라이플을 들어 올렸다.

“마법 총이구나, 거기에 대륙에는 없는 강철까지 만들어 내다니, 손재주가 상당하구나.”

“어릴 때부터 이것저것 만드는 걸 좋아했습니다. 전생의 기억도 도움이 되었죠.”

“마법 총으로 무장한 병력이면 쉽게 당하진 않겠군.”

“그럴 거라 생각합니다. 이미 라이플의 위력도 충분히 시험해 보았습니다. 성과도 있었고요.”

카일이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병력을 만드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비록 마크와 비터를 왕도로 보내 용병들을 모으게 했지만, 당장 이들을 훈련시키고 거점으로 활용할 장소를 찾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좋다. 내가 널 도와주마.”

아르산이 갑자기 손을 들어 카일의 어깨를 붙잡았다.

치이익-

어깨에서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며 지독한 고통이 느껴졌다.

“크윽-.”

카일이 급히 아르산의 손을 떼려 했지만, 카일의 강인한 힘으로도 아르산의 손을 떼어낼 수 없었다.

“베일러트 백작가의 문장이다.”

아르산이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카일은 어깨에 새겨진 기괴한 문양을 보며 말했다.

“이걸 왜……?”

“크레센트 숲을 너에게 넘겨주겠다는 징표다.”

“제게 말입니까?”

카일이 깜짝 놀라 물었다. 크레센트 숲은 웬만한 대형 영주성이 들어갈 정도로 넓고 비옥한 영토일 뿐 아니라 중부와 남부, 그리고 동부를 이어주는 요충지였다.

“그렇다. 너의 피로 이 문장을 어깨에 새기면, 그자는 블러드 릭 마법진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다. 너와 함께 온 각인 마법사라면 쉽게 새길 수 있을 것이다.”

“어째서 처음 본 제게 이런 호위를 베푸시는 겁니까?”

“글쎄? 천 년만에 만난 동향에 대한 반가움 때문일까?”

“하지만 마왕과 여신이 절 노리고 있습니다. 혹 아르산 님과 천공탑이 피해를 입진 않을까 걱정입니다.”

“걱정할 것 없다. 이곳은 천 년을 살아온 리치의 힘이 깃든 곳, 온전히 나의 힘과 지배력을 받는 나의 땅이다. 여신이든 마왕이든 이곳에서만큼은 감히 나를 이길 수 없다.”

아르산이 스르륵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이제 그만 돌아가겠다.”

“아르산 님을 다시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곳 크레센트 숲에 있다면 언제든 날 불러라. 그럼 우린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말을 마친 아르산이 천천히 떠올라 벽을 통과하듯 사라져 버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