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천공 탑의 비밀2
“이건….”
카일이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하늘로 빠르게 쏘아져 올라가는 거대한 창, 아니, 미사일을 바라보았다.
레이더와 이를 이용한 미사일, 마치 전생에서 보았던 최첨단 대공 무기를 마법으로 다시 재현해 보는 듯했다.
“놀랍죠? 천공 창이라 불리는 마법 무구예요.”
“천공 창?”
카일의 물음에 사하가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 천공탑과 함께 만들어진 대공 마법 무구죠. 어때요. 놀랍지 않나요?”
사하는 마치 자신이 만든 마법 무구인 양 자부심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확실히 놀랍군요. 누가 이런 걸 생각하고 만들었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카일 역시 천공탑과 천공 창을 보며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의미는 사하와는 사뭇 달랐다.
마법 무구는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상상력과 그 상상력을 실현하기 위한 무수히 많은 실험을 통해서만이 겨우 기존 마법과는 다른 마법 무구가 탄생할 수 있다.
그런데 그만큼 어렵고도 힘들게 만들어진 마법 무구가 현대의 대공 무기와 같은 방식과 체계를 가지고 있다?
‘정말 우연히 만들어진 걸까? 이걸 만든 사람은 혹 나와 같은 환생자가 아닐까?’
카일이 고개를 돌려 수정 기둥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수정 안쪽에서부터 퍼져 나온 붉은 파장 사이로 희미한 기운이 뭉치며 하나의 형태를 만들기 시작했다.
“응?”
카일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형상에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무, 물어볼 게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사하는 갑작스러운 카일의 변화에 놀란 듯 물었다.
“혹시… 수정 기둥 안에서 눈동자가 나타난 적이 있습니까?”
“눈동자요?”
사하가 깜짝 놀라 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없는데요?”
“분명, 조금 전까지….”
-에너지 충전 시작.-
절묘하게 카일의 말을 끊으며 에고의 탁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 시작되었군요.”
사하의 얼굴이 한순간 밝아졌다.
“피를 흡수하기 시작한 겁니까?”
“맞아요. 그것도 마나의 기운이 가장 충만한 와이번의 사체에서 말이죠.”
-에너지 충전율 상승, 복구 시작합니다.-
“설마, 자가 복구 기능도 가지고 있는 겁니까?”
“천 년이란 시간 동안 천공탑이 무사했던 가장 큰 이유가 자가 복구 기능 덕분이죠. 그보다, 생각은 해 보았나요?”
“네?”
“소원 말이에요. 뭐든 말해 보세요. 모두 들어드릴 테니.”
“어떤 것도 가능하단 말입니까?”
“당연하죠. 약속은 약속이니까요.”
“흠….”
카일이 고민에 빠진 듯 생각에 잠겼다.
“황금은 어떤가요. 평생 쓰고도 남을 황금을 드리죠.”
“지금껏 골드가 부족하다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검은 어떤가요. 대륙에서 손꼽히는 명검을 가져다줄 수 있어요.”
“지금 가진 검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필요하다면 직접 만들어도 써도 되죠.”
“직접 검을 만든단 말인가요.”
“어릴 적 마을 대장장이로부터 잠시 배운 적이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마법 무구는 어떤가요. 6서클 이상의 마법이 인챈트된 아티팩트를 드리죠.”
사하가 재촉하듯 말했지만 카일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이미 마법 라이플이 있을 뿐 아니라 그의 옆에는 최고의 아티팩트 마법사가 있었다. 굳이 다른 마법 무구가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럼… 와이번은 어떤가요. 골드… 아니, 당신이 원한다면 레드와이번도 구해 드리죠. 어떤가요.”
사하는 마지막, 카일이 절대 거절하지 않을 거라 확신한 와이번을 들고나왔다.
하지만 카일에게는 이미 최고의 와이번이라 할 수 있는 블랙와이번 시카니스가 있었다. 아무리 레드와이번이 대단한 와이번이라 해도 시카니스보다 뛰어난 와이번이라 생각되지는 않았다.
“죄송합니다.”
“…설마, 잘못 들은 건 아니겠죠? 와이번이에요. 그것도 레드와이번!”
사하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정확히 들었습니다만 저에게는 와이번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왜 그리 약속에 집착하시는 겁니까? 굳이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 당신에게 부탁할 일이 있을 겁니다.”
“바로 그게 걱정이란 말이죠.”
사하가 얼굴을 찌푸리며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네?”
“전 변수를 싫어하거든요.”
“변수? 이 약속의 징표가 변수란 말인가요?”
카일이 손에 새겨진 원형의 문양을 보며 물었다.
“약속의 징표는 영혼에 새겨진 절대 약속, 단 한 번이지만, 당신이 부탁을 하면 난 반드시 부탁을 들어줘야 해요. 이때만큼은 천신도 마왕도 방해할 수 없어요. 그러니 이 약속의 징표는 좋든 싫든 저에겐 커다란 변수가 될 거예요.”
“저에겐 좋은 일이군요.”
“맞아요. 어쩌면 당신을 어렵게 붙잡고도 놓아줘야 하는 일이 생길지 모르겠군요.”
“그럼 이 약속의 징표는 가장 위험한 순간이 오면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카일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흥, 제가 말하지 않았어도 이미 그럴 생각 아니었나요.”
“하하, 이런 들켰군요. 하지만 약속의 징표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절대 약속이란 사실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렇겠죠. 이 마법은 오래전 가문에서 고대 마법을 연구하던 중 찾아낸 것이니까요. 그보다 제가 이 내기에서 이겼다면 어떤 부탁을 했을지 궁금하지 않나요.”
“마왕을 섬기는 암흑 기사가 되어 달라고 할 생각이 아니었나요?”
“물론 그런 생각도 했었죠. 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생각났어요.”
“그게… 뭡니까?”
“바로 가디언이죠.”
사하가 눈을 반짝 빛내며 말을 이었다.
“절 공격할 수도, 떠날 수도 없는 가디언이 되어 달라고 할 생각이었어요. 그럼 언젠가 당신의 몸에서 신성력을 제거하는 순간, 전 천 년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요.”
“다, 다행이군요. 제가 이겨서, 그럼 만약 제가 당신에게 마왕의 명을 듣지 말라고 부탁한다면….”
“미안하지만, 그 부탁은 이행할 수 없어요.”
“하지만 약속의 징표는 절대적인 약속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물론이죠. 하지만 절대 약속도 선과 후가 존재해요. 천 년 전 선조께서 마왕과 맹약을 맺은 이상, 저에게 가장 먼저 지켜져야 할 약속은 애석하게도 당신이 아니라 마왕과의 맹약이군요.”
“…그렇군요.”
“그렇다고 실망하지는 마요. 적어도 한 번 정도는 약속의 징표에 따라 당신을 놓아줄 수 있으니까요. 그 정도가 제가 할 수 있는 전부랍니다.”
“휴, 전혀 위로가 안 되는군요.”
카일이 가라앉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버리자 한동안 침묵만이 넓은 공간을 맴돌며 더 이상 대화를 이어 나가기 어려워졌다.
결국 카일은 사하에게 쉬고 싶다는 말을 남긴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2층 제일 끝방을 사용하세요. 손님 방으론 가장 좋은 곳이랍니다.”
“감사합니다.”
카일이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곤 곧장 몸을 돌려 2층으로 향했다.
마가목 차를 마신 덕분에 피로 대부분을 날려 버렸지만, 지난 이틀 동안 제대로 수면을 취하지 못한 상태였다. 내일 아침 일찍 이곳을 벗어나려면 잠시 잠을 자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왔느냐?”
카일이 2층으로 막 들어섰을 때 툴린은 부스스한 몰골로 커다란 의자에 반쯤 몸을 묻고 있었다.
“여기 계셨습니까?”
“막 잠이 들었다가 갑작스러운 소란에 달려 나와 봤다. 조금 전까지 모두 나와 있다가 소란이 줄어들자 하나둘 들어가고 나만 남았다.”
“모두 피곤했을 겁니다. 이틀 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으니까요.”
카일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툴린의 맞은편에 앉았다.
“흠, 대화가 그리 좋지는 않았나 보구나.”
카일의 표정을 살핀 툴린이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닙니다. 대화는 잘 끝났습니다. 내일 이곳을 떠날 수 있을 겁니다.”
“아무 조건 없이 말이냐?”
“네, 그러니 아무 걱정 마시고 들어가 쉬시지요.”
“정말 아무 일 없는 것이냐? 표정이 그리 좋지 못하구나.”
“좀 피곤해서 그런 겁니다.”
“…흠, 알겠다.”
카일의 말에 툴린도 더는 묻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래, 내일 보자꾸나!”
툴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카일이 사하의 말대로 복도 가장 끝방으로 행했다.
“그 방은 문이 잠겨 있다.”
“네?”
“좋은 방은 항상 복도 끝에 있다며 용병 녀석들이 가장 먼저 들어가려 했던 방이다. 문이 잠겨 있어 한동안 열어 보겠다며 실랑이를 하더니, 모두 포기하고 다른 방으로 들어갔거든.”
“흠… 그런가요?”
카일이 툴린의 말에 아무 생각 없이 문손잡이를 잡았다.
딸깍-
끼이익-
카일의 손에 따라 문이 자연스럽게 밀려났다.
“엥…?”
툴린이 열린 문과 카일을 번갈아 보더니 피식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긴 그 녀석들 하는 일이 다 그렇지. 아마도 그 방의 주인은 따로 있었나 보구나.”
툴린이 웃음을 지으며 돌아섰다.
“피곤할 테니 그만 들어가 쉬도록 해라!”
툴린이 손을 흔들며 자신의 방 안으로 사라지자, 카일 역시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은 사하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듯, 넓은 응접실과 침실에 고풍스러운 장식과 가구까지 하나하나 세심하게 배치되어 있을 뿐 아니라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신기하군.”
이곳 천공탑 안에서는 사람의 흔적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사하 역시 어린 시절 이곳에서 잠시 생활했을 뿐 지금은 다른 곳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 천공탑은 마치 누군가 항상 청소하고 관리한 듯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어 신비함을 자아냈다.
카일은 한쪽에 마련된 욕실에서 전투로 인해 생긴 먼지와 땀을 씻어 낸 후 한결 상쾌해진 기분으로 푹신한 침대에 몸을 뉘었고, 곧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 * *
스르륵-
가벼운 천이 바닥에 쓸리듯 낮고 희미한 소리가 울리며 검은 인영이 불이 꺼진 어두운 응접실을 빠르게 스쳐 지나 침상으로 서서히 다가섰다.
하지만 카일은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듯 두 눈 감고 깊은 잠에 빠져 움직임이 없었다.
스르륵
또다시 울리는 미세하고 희미한 소리에 카일이 나쁜 꿈이라도 꾸는 듯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스르륵, 스르륵
카일에게 움직임이 없자 다시 검은 인영이 카일의 주변을 맴돌았다.
쉬익-
갑자기 번개같이 상체를 일으킨 카일이 소리가 난 방향을 향해 단검을 강하고 재빠르게 찔러 넣었다.
깡-
오러를 잔뜩 밀어 넣은 단검이 이렇게 허무하게 튕겨 나갈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카일이 당황한 듯 뒤로 물러났다.
-바인드.-
어둠 속에서 암울하면서도 거친, 그러면서도 낯익은 목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바닥에서부터 거침없이 일어난 검은 기운이 밧줄처럼 카일의 하체를 옭아매며 점점 위로 올라와 상체는 물론 팔과 목까지 억압하기 시작했다.
“우악!”
카일이 발작적으로 소리를 치며 급히 오러에 휩싸인 단검을 휘둘렀지만, 검은 기운 일부가 잘려 나갔을 뿐 여전히 검은 기운은 꾸역꾸역 자라나 카일의 몸을 휘감았다.
“이렇게 포기할 것 같으냐!”
카일이 이번엔 아랫배에 뭉쳐 있던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웅-
단검에서 새하얀 빛이 점점 피어오르며 어둠을 밝히더니, 몸을 휘감고 있는 검은 기운을 가닥가닥 잘라 냈다.
“신성력?”
여전히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인영에게서 다소 놀란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뿐이었다. 신성력에 잘려 나간 검은 기운들을 대신해 더 많은 검은 기운들이 몰려들며 카일을 압박하더니 옴짝달싹할 수 없게 만들었다.
-포기해라, 반항은 허락하지 않는다.-
“크윽, 누구냐! 설마 사하가 약속을 어긴 것이냐?”
“사하는 약속을 어기지 않는다. 그저 이번 일은 내 호기심 때문이지, 크크크.”
스르르
어둠 속에서 카일을 향해 검은 인영이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묻는 말에 대답한다면 널 죽이지 않겠다. 마법사로서 약속한다.”
“마법사?”
힘겹게 고개를 돌려 어둠 속을 바라보는 순간, 카일의 얼굴이 더없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자신의 눈앞에서 두 개의 푸른 불꽃이 카일을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리… 치!”
“크크, 난 이 천공탑과 크레센트 숲의 주인이자 에고, 아르산 드 베일러트 백작이라 한다.”
“천공탑의 주인? 하지만 이곳은….”
카일이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지금까지 이 땅의 주인은 랜브란트 가문이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크크, 랜브란트 가문은 나의 하위 기수 가문이자 나의 제자 중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잠깐! 질문은 내가 한다.”
푸른 귀화가 점점 가까이 다가서며 칠흑같이 검게 변한 해골이 모습을 드러냈다.
“넌, 누구냐? 아니, 레이더에 대해 누구에게서 들었지!”
“레이더!”
카일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당신! 정말 환생자인가요?”
“환생자?”
검은 해골이 카일을 똑바로 직시하며 되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