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천공 탑의 비밀1
“아름답군요.”
어느새 시간이 흘러, 넓은 달의 언덕 너머로 붉게 물든 태양이 서서히 저물며 어둠이 밀려들고 있었다.
“이제 어쩔 생각이죠?”
“일단은 주변을 포위한 와이번 나이트를 피해 이곳을 안전하게 빠져나야겠죠. 날이 저물면 이 천공탑을 직접 공격할 테니까요.”
카일이 걱정스러운 듯 찻잔을 씁쓸하게 문지르며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피를 먹는 숲과 복잡하게 얽혀있는 미로, 그리고 스톤 골렘이라면 수천의 정예 병사들이 일시에 공격해도 막아낼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전력이었다. 하지만 모두 지상전에서나 유용한 전력일 뿐 하늘에서 가해지는 공격은 전혀 막을 방법이 없어 보였다.
“혹시 천공탑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나요.”
“고대엔 하늘탑을 천공탑이라 불렀다고 들었습니다.”
얼마 전 멀린으로부터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말했다.
“일부 그렇게 알려지긴 했지만, 하늘탑은 천공탑의 일부 기능을 모방한 아류에 불과하죠. 아마 몇몇 마탑의 고위 마법사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을 거예요.”
사하가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크레센트 숲을 바라보았다.
“이곳 달의 언덕과 크레센트 숲엔 피를 통해 에너지를 축적하는 블러드릭 마법진이 대규모로 펼쳐져 있죠. 모두 천공탑을 위해 만들어진 마법진이에요. 하지만 단순히 천공탑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었다기엔 과하지 않을까요?”
“설마, 랜브란트 가문이 설치한 마법진이 아니란 말인가요?”
“이곳에 우리 랜브란트 가문이 자리를 잡은 건 전쟁이 끝난 다음이죠. 성을 강화시키기 위해 마법진에서 에너지를 끌어다 쓰긴 해도 우리 가문이 설치한 마법진은 아니랍니다.”
“그럼 그 이전부터 이곳에 천공탑이 존재했단 말이군요.”
“맞아요. 이곳에 대규모의 마법진을 설치한 이유는, 하늘탑에는 없는, 오직 천공탑에만 존재하는 단 하나의 기능 때문이죠.”
“단, 하나의 기능?”
“곧 보게 되겠군요. 더 이상 참지 못한 와이번 나이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사하가 멀리 하늘 위로 하나둘씩 날아올라 천공탑을 향해 편대를 이루며 다가오는 와이번을 보며 말했다.
쿠웅
그때였다.
갑작스러운 충격음과 함께 천공탑이 부르르 진동을 일으켰다.
“시작되었군요.”
“이게… 무슨 일이죠?”
“두고 보면 알게 될 거예요. 곧 재밌는 일이 일어날 테니.”
쿠웅
사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어둠 속에 숨어있던 거대한 육각형의 수정 기둥이 빛을 밝히며 천정에서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가디언 발견-
순간 묵직하고 탁한 음성과 함께 거대한 수정 기둥이 붉은빛과 함께 깜박였다.
“이, 이건….”
“천공탑을 관리하는 에고에요.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4대 마탑에는 아직 남아 있을 거예요.”
사하가 웃으며 수정 기둥으로 다가가 수정 위에 손을 올렸다.
“천공탑 활성화.”
-천공탑 활성화-
사하의 짧은 목소리와 함께 수정 위로 기하학적인 마법진이 번져나가며 투명한 수정 기둥 안쪽 중심에서부터 밖으로 붉은 기운이 흘러 나왔다. 그에 따라 일곱 개의 노란 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레이더!”
카일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수정 기둥은 마치 레이더처럼 중심에서 번져가는 붉은 기운에 따라 다가오는 골드 와이번들의 정확한 위치뿐 아니라 고도까지 입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레이더?”
“아, 아닙니다. 그저 처음 보는 놀라운 광경이라….”
“그렇죠, 저도 이렇게 직접 와이번들을 공격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평소 달의 언덕은 일루젼 마법으로 철저하게 감춰져 있거든요.”
“그럼 이곳이 드러난 것도….”
“당신과 언니를 만나보기 위해서죠. 이곳을 개방한 건 아마 100년 만에 처음일 거예요.”
사하가 생긋 웃으며 다시 고개를 돌려 수정 기둥을 바라보았다.
-가디언 발견, 접근 중-
“대응체계 작동, 공격 모드로 전환.”
-대응체계 작동, 공격 모드 활성화, 마법진 활성화 시작, 무기고 개방.”
쿠웅
“방어 마법진 가동.”
-방어 마법진 활성화, 천공탑 강화 마법 활성화 시작-
“타깃 지정.”
-타깃 지정, 근접 타깃 3기 지정 완료. 사거리 계산 중… 완료. 공격 명령 대기 중.”
사하가 연달아 내린 명령에 따라 에고는 마치 현대의 최첨단 시스템처럼 사하의 명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노, 놀라운 체계군요.”
“모두 흑마법 덕분이죠.”
“흑마법?”
“에고는 죽은 인간의 사념이나 영혼을 가둬 만드니까요. 게다가 이 천공탑은 아주 특별한 에고가 잠들어 있답니다.”
사하가 웃으며 거대한 수정 기둥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수정 기둥의 빛이 마치 감정을 나타내듯 부드럽게 깜박였다.
“이곳엔 이 마탑을 설계하고 만들어낸 고위 마법사의 영혼이 잠들어 있죠. 스스로 리치가 된 마법사가 자신의 라이플 베슬을 심어 완벽한 천공탑을 온전히 완성한 거예요.”
대륙에 널리 알려진 흑마법사의 부정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대륙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시켜 드래곤을 대적할 무기를 만들었다니 놀라운 이야기였다.
“대단한 사람이었군요.”
카일이 놀란 듯 거대한 수정을 바라보았다.
쿵-
낮고 미세한 진동이 전해져 왔다.
“드디어 공격이 시작되었군요.”
사하가 천공탑 위를 선회하는 와이번들을 보며 말했다.
“공격을 시작한다.”
* * *
“음!”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높고 험준한 산이었던 곳이 지금은 넓은 평원과 강이 존재하는 커다란 분지로 변해 있었다.
더구나 절벽 위에 건설된 거대한 고성의 잔해와 하늘을 꿰뚫을 듯 솟아 있는 망루탑의 존재는 놀라움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크루트 용병단이 보이지 않습니다.”
“분명 산 곳곳에 전투 흔적은 보입니다만 시체조차 찾아볼 수는 없습니다.”
작은 통신구에서 연이어 들려오는 부하들의 보고에서는 그가 원하던 대답을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저 망루탑으로 향했단 말인가?”
작게 중얼거린 사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지상으로 내려갈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다. 그냥 이곳을 놈들의 무덤으로 만든다.”
“크루트 용병단이 망루탑 안에 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상관없다. 그들은 이미 충분한 목숨값을 받았다. 아직도 일을 완수하지 못했다면 그들도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겠지.”
“하, 하지만 그들 중엔 검은 여우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대단위 마법이 걸려있는 곳, 그들을 구하기 위해 우리가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다.”
거대한 망루탑을 싸늘하게 바라본 사내가 화염의 스피어를 뽑아 들었다.
“2개 편대로 나누어 하강, 공격 후 곧장 이곳을 이탈해 제국으로 복귀한다. 남은 화력을 아끼지 마라!”
“그럼 왕국에서의 작전은 모두 중단되는 것입니까?”
“아니, 결정은 단장님이 내리실 것이다. 우린 그분의 뜻만 따르면 된다.”
“알겠습니다.”
“헤론 조장!”
기사 헤론이 부단장의 와이번 옆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기사 헤론입니다.”
“자네가 선두다.”
“넵! 알겠습니다.”
“제국에서 보자!”
“술을 따라놓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부단장님!”
부단장을 향해 미소를 지은 헤론이 하늘을 선회하는 와이번의 무리에서 천천히 이탈했다.
“잘 따라오도록!”
“걱정 마십시오. 조장! 그나저나 정말 엄청난 크기입니다. 과연 누가 이 거대한 고성을 지었을까요.”
“그보단 이 망루탑, 과연 무너트릴 수 있겠습니까? 크기만큼이나 단단해 보입니다.”
거대한 망루탑을 향해 나선을 그리며 하강하는 와이번 나이트들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바윗돌을 보며 기가 질린 듯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헤론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모두 집중해 한곳을 노린다. 내가 공격한 곳에 화력을 최대한 집중하도록!”
“알겠습니다.”
헤론은 안장에서 마지막 남은 화염의 스피어 대신 관통력이 우수한 강화 스피어를 뽑았다.
이런 단단한 성벽을 무너트리기 위해서는 무턱대고 강한 폭발로 충격을 주기보단 일단 단단한 바위에 먼저 균열을 일으키는 것이 중요했다.
부단장이 헤론을 가장 먼저 선두에 배치한 이유 역시 그의 스피어가 가장 정확도가 높기 때문이었다.
“간다!”
강화 스피어를 높게 들어 올린 헤론이 망루탑 좌측 하단부를 노렸다. 망루탑을 절벽 아래로 추락시켜 아예 가루로 만들어 버릴 생각이었다.
쉬익-
푸른 빛으로 물든 스피어가 빠른 속도로 망루탑 최하단부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헤론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연이어 3발의 강화 스피어를 망루탑을 향해 던진 뒤 지체 없이 기수를 당겨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쿠웅-
곧 뒤에서 강한 충격음이 연달아 들려왔다.
“…충격?”
헤론이 급히 고개를 돌렸다.
강화 스피어는 관통력을 극대화한 스피어다. 더구나 오러까지 가득 밀어 넣었던 만큼 이런 커다란 충격음이 일어날 리가 없었다.
“마법!”
망루탑과 강화 스피어가 부딪히는 순간, 성벽 위로 거대한 마법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지며 강화 스피어를 튕겨냈다.
“조장!”
“망설이지 말고 공격해!”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헤론이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쾅쾅-
꽈광-
헤론의 외침과 함께 망루탑 하단부에서 연달아 강력한 폭음과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때마다 망루탑 벽면에선 거대한 마법진이 연이어 떠올랐다 사라지길 반복하더니, 갑작스러운 굉음이 울렸다.
쿵-
드르륵-
펑-
순간 거대한 물보라와 함께 강에서 거대한 창이 하늘 위로 치솟았다.
“헉!”
헤론이 깜짝놀라 하늘을 올려다 봤다.
꽝-
순간 하늘위로 치솟아 올랐던 거대창의 뒷부분이 터져나가며, 엄청난 속도로 하강을 시작한 골드 와이번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아, 안 돼!”
헤론이 창백해진 얼굴로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아래로 하강을 시작한 와이번은 엄청난 속도로 쏘아진 거대한 창을 피하기엔 어려워 보였다.
-콰앙-
-끼아아악-
거대한 창에 직격당한 와이번이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빙글빙글 돌며 아래로 빠르게 추락하기 시작했다.
“부, 부단장님!”
헤론이 급히 떨어지는 와이번을 향해 나아가려 했다. 하지만 그때 다급한 부단장의 목소리가 통신구를 울렸다.
“크윽- 모두 이탈…!”
“부단장님!”
“명… 령.”
쿵-
드르륵-
펑-
부단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 다시 강에서 튀어 오른 2개의 거대한 창이 마치 하늘을 꿰뚫어 버리듯 날아올라 부단장을 쫓아 하강하던 두 와이번을 직격했다.
-끼아악-
-캬악-
“아아!”
헤론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떨어져 내리는 와이번을 바라보았다. 지금껏 이런 공격무기가 있다는 사실은 듣도 보도 못해 그를 더욱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지난 트라발트 공작령에서도 일부 대공 무기들이나 마법 공격이 있긴 했지만, 이처럼 높은 정확도와 빠른 스피드로 날아드는 무기는 없었다. 무엇보다 그를 당황하게 만든 건 이번에도 기존 마법의 개념을 깨트리는 새로운 마법이 등장했단 사실이었다.
“조장!”
“정신차려요!”
자신을 찾는 통신구의 다급한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린 헤론이 크레센트 숲으로 추락한 와이번들을 비참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모두… 복귀한… 다.”
“조장!”
“우린 이 사실을 제국에 알릴 의무가 있다.”
“하, 하지만 저기에 부단장이….”
기사들이 당황한 듯 헤론을 불렀지만, 헤론은 더 이상 다른 말은 듣지 않겠다는 듯 기수를 돌려 베링 산맥으로 향했다. 지금으로선 가장 안전하게 돌아갈 방법은 오직 베링 산맥을 넘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