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잊혀진 영웅가2
사하가 웃으며 마법진에서 내려왔다.
“이곳이 바로 천공의 탑의 최상층부에요. 제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기도 하죠.”
잠시 어린 시절을 떠올렸는지 작은 미소를 지은 사하가 한쪽에 놓여 있는 작은 탁자와 의자를 가리켰다.
“여기에 앉으시면 돼요. 차를 내올게요.”
사하는 작은 주전자에 물을 넣고 끓이더니 능숙하게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 듯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보아하니 평소 차를 자주 마시는 것 같았다.
“그럼 지금은 이곳엔 살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제가 머무는 곳은 일정치 않아요. 항상 여기저길 떠돌아다니죠. 지금은 제국에 거처를 두고 있죠.”
“그럼 이곳에 온 목적은 상단 때문이었군요”
“맞아요. 정확히는 당신이 예상한 대로 언니를 납치하기 위해서죠.”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카일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물론이에요. 그 말을 하기 위해 당신을 이곳에 초대했으니까요.”
사하가 웃으며 재질을 알 수 없는 검은 찻잔을 카일의 앞에 내밀었다.
“…이건!”
찻잔을 들어 향을 맡던 카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화이트 우드의 수액과 야생차군요.”
카일이 굳은 얼굴로 찾잔을 그대로 내려놓았다.
“당신, 마가목과 마가초를 아는군요.”
“그런 이름은 생소합니다만, 이 차가 내상을 치료하는 데 큰 효과가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동시에 한동안 오러를 사용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도 말이죠.”
“대단하군요. 그런 사실을 어떻게…. 당신, 설마 오크 랜드에 들어가 봤나요?”
“제 고향은 오크 랜드와 인접한 샤론 마을이란 곳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래서 마가목과 마가초에 대해 알고 있었군요”
사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당신이 알지 못하는 것이 있어요.”
사하가 아무렇지 않게 찻잔을 들어 뜨거운 기운을 조심스럽게 날려버리며 찻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마가목엔 화이트와 블랙이라는 두 종류가 있어요. 아마 죽음의 늪지 주변에 자라는 나무는 화이트뿐이라, 블랙에 대해선 전혀 모를 거예요.”
“지금… 죽음의 늪이라 했습니까?”
“맞아요. 오크 랜드에서 화이트를 볼 수 있는 곳은 그곳뿐이죠.”
“당신이… 그걸 어떻게?”
“모를 수가 없죠. 그곳을 만들고 습지 드레이크를 몰아넣은 사람들이 바로 우리 가문의 선조들이니까요.”
사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지만, 충격적인 말은 그뿐이 아니었다.
“그것뿐인 줄 아세요. 절벽의 가고일, 협곡의 붉은 트롤, 오크 랜드를 질주하는 마계의 들소, 모두 우리 선조들의 작품이죠.”
“왜 그런… 아니, 당신 정체가 뭡니까?”
카일이 날카롭게 사하를 노려보며 물었다.
“좋아요. 그럼 저에 대해 다시 소개하죠.”
사하가 미소를 지으며 정중하게 말했다.
“대륙을 구한 흑마법사, 마왕을 모시는 암흑 사제의 가문, 잊혀진 영웅가, 랜브란트 가문의 21대 가주, 사하예요.”
“잊혀진 영웅가?”
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쓸쓸히 밖을 바라보았다. 이곳은 천공의 탑에서도 유일하게 밖을 바라볼 수 있는 넓은 창이 존재해 광활한 크레센트 숲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고대에 있었던 드래곤과 인간의 치열했던 전쟁사에 대해선 들어봤을 거예요.”
“이야기는 조금 전해 들어봤습니다.”
“전쟁의 결말에 대해서도 들어봤나요?”
“갑자기 나타난 마왕과 드래곤 로드의 격돌로, 둘 모두 치명상을 입고 전쟁이 끝났다고 들었습니다.”
“마왕은 다시 마계로 돌아갔고, 드래곤들은 인간에게 사냥을 당하며 멸족했죠. 뒤에서 이 모든 일을 주도한 게 흑마법사의 가문이었고요.”
“그 가문이 바로 랜브란트 가문이란 말인가요. 마왕을 소환한 것도 바로…. ”
“맞아요. 우리 랜브란트 가문이죠. 당시 가주가 자신의 딸을 제물로 마왕과 계약을 맺고 마왕을 소환했죠.”
“…자신의 딸을 제물로 삼다니, 잔인하군요.”
카일이 사하의 말에 얼굴을 찌푸렸다.
“당시엔 그만큼 절박했으니까요.”
“그럼 아직도 그 계약은 유지되고 있는 겁니까?”
“맞아요, 이 계약은 천 년 동안 반드시 지켜져야 해요. 가문의 피를 이은 여아 중 한 사람은 반드시 마왕을 모시는 암흑 사제가 되어야 해요. 천 년 후 중간계로 강림할 마왕을 위한 제물이 되기 위해서 말이죠.”
“그럼… 설마 당신이 바로 그 제물이란 말인가요.”
카일이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맞아요. 전 마왕의 제물이 되기 위해 태어났고, 길러졌어요. 하지만 일이 잘못되었죠.”
“무슨 뜻입니까?”
“암흑 사제가 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대법을 거쳐야 해요. 이 과정은 아무리 암흑 사제라고 해도 마왕이 직접 나서지 않는 이상 서큐버스라는 마계의 악령에게 도움을 받아야만 해요. 그래야 마정을 가진 여아가 태어나죠. 그런데….”
“누군가 대법을 방해한 겁니까?”
카일은 언젠가 힐튼 남작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물었다.
“맞아요. 누군가 마정의 절반을 흡수해 달아나 버렸어요. 그리고 태어난 사람이 바로 저희 아버지죠.”
“그럼 나머지 절반을 흡수해 태어난 사람이…!”
“저희 어머니예요.”
사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어머님은 마정을 되찾기 위해 온 대륙을 찾아다녔어요. 그리고 어느 기사 가문에서 마정의 일부를 품은 여아를 찾았죠.”
“그게 바로 시안느 경입니까?”
“그래요. 당시 어머님은 언니를 납치해 자신의 모든 마정을 물려주고 암흑 사제로 만드려고 했어요. 하지만 아버지 때문에 실패했죠. 그리고 한 달이 넘는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시작됐죠.”
카일은 이후 벌어질 일에 대해선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왜 그렇게 마왕과의 약속에 집착하는 겁니까?”
“어차피 제물이 되어 죽을 운명이니, 약속을 지키든 안 지키든 상관이 없다는 그런 말인가요? 마왕의 소환으로 더 많은 대륙인들이 죽을 수 있으니, 차라리 저 하나의 희생으로 끝내자는 뜻이겠군요.”
“죄송하지만 그렇습니다.”
“아녜요. 당연한 생각이죠. 하지만 당시 마왕과의 계약에 연관된 사람은 우리 가문만이 아니죠. 우리가 주도하긴 했지만, 당시 살아남은 수많은 지도자 역시 그들의 피를 걸고 마왕과 피의 맹약을 했어요.”
“그럼…?”
“천 년 후 마왕의 소환이 실패하면, 당시 피의 맹약을 맺었던 그들의 후손은 그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 해요. 그리고 그 대가는 죽음이죠.”
무려 천 년의 세월이 흘러, 수많은 사람이 알게 모르게 당시 맹약을 맺은 자들과 피로 얽혀있었다. 그 숫자가 얼마나 될지는 지금에 와서는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할 것이었다.
“대체… 왜 그런 무모한 맹약을…!”
“당시엔 그만큼 절박했으니까요. 하지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우리 랜브라트가의 희생이 점점 사라져 갔나 봐요. 그리고 어느 순간, 우린 배신을 당했죠.”
“배신?”
“저희 가문은 드래곤과의 전쟁 이후 영웅가로서 승승장구해 남부를 지배하던 대영주가 되었어요. 지금의 아킨스 자작령과 다핸 남작령 모두 당시 랜브란트가의 영지였죠. 하지만 어느 날 대규모 오크 침공이 있었어요.”
“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오래전 남부에 강대한 대영주가 있었지만, 대규모의 오크 침입에 무너졌다는.”
“맞아요. 우리 랜브란트 가문이죠.”
“하지만 당시 오크 침공은 왕국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 들었습니다. 간신히 중부에 방어선을 만들어 막아 냈을 정도로 위험했다고….”
“그렇지 않아요. 오크의 침입은 누군가 오크를 자극해 일으킨 음모였어요. 더구나 이 고성을 보면 알겠지만, 오크만으론 절대 무너질 성이 아니에요. 이 성은 내부에서 일어난 대폭발로 무너졌어요. 그리고 철저하게 학살당했죠.”
사하는 얼굴을 찌푸리긴 했지만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당시 가주께서는 이미 이러한 일이 벌어질 걸 알고 계셨는지, 미리 암흑 사제가 될 자신의 딸을 대피시켰어요. 대륙인을 위해 반드시 살아남아 맹약을 지키란 말을 남긴 채 말이죠.”
“놀랍군요. 그런 일을 겪고도 맹약을 지키려 했다니….”
“맹약을 지키는 것 역시 대륙을 향한 복수일 수 있으니까요. 어쨌든 살아남은 선조들은 더 이상 오크 랜드에서 오크들이 쏟아져 나오지 않도록 갖은 노력을 기울였어요.”
“그것들이 바로 붉은 오크와 가고일, 그리고 습지 드레이크란 말입니까?”
“맞아요. 모두 일정한 영역을 벗어나진 않지만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들로, 오크들에겐 최고의 천적들이니까요.”
“그럼 시안느 경을 납치하려 했던 이유는….”
“마왕님께서 마정을 품은 언니 역시 제물이 되어야 한다고 했으니까요. 언니를 지키기 위해 절 키워낸 아버지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게 된 거죠.”
“그럼 설마 당신이 태어난 이유가?”
“맞아요. 아버지는 언니를 살리기 위해 더 많은 마정의 기운을 타고난 딸이 필요했던 거예요. 그래야 언니가 제물이 되지 않을 테니까요.”
“그렇군요….”
“놀라지 않는군요.”
“충격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시안느 경이 마정을 품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미 짐작했습니다. 그리고 상황이 바뀌었다는 사실도 말입니다.”
카일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이미 마왕으로부터 자신의 몸속에 마정이 있다는 사실을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맞아요. 마왕님께서 저희 가문과 맺었던, 아니, 천 년 전 대륙인과 맺은 모든 맹약을 철회하시겠다고 하셨어요. 당신이 암흑기사가 된다면 말이죠.”
“제가 승낙할 거라 생각하십니까?”
카일의 말에 사하의 얼굴이 굳었다.
“왜죠? 당신 한 사람의 희생이면 대륙의 수많은 사람들이 살 수 있어요. 그들을 위해 고귀한 희생을 할 수는 없나요.”
“왜 그들을 위한 희생이 고귀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언젠가 그들은, 아니, 그들의 후손은 당신들 가문에게 그랬던 것처럼 희생을 잊을 겁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니까요.”
카일의 말에 사하의 얼굴이 침울하게 바뀌었다. 카일의 말대로 랜브란트 가문은 대대로 수많은 희생을 했지만, 지금은 자신만이 유일하게 남아 마지막 희생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렇군요. 어쩌면 당신의 말이 맞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포기할 수 없어요. 저도 이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으니까요.”
“이제 좀 더 솔직해지셨군요. 하지만 쉽지 않을 겁니다. 저 또한 절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테니까요.”
카일이 검을 잡았다. 하지만 사하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마세요. 아직 그댈 붙잡을 생각이 없으니까요. 지금 당신 몸속에 존재하는 신성력을 없앨 방법을 찾지 못했어요. 그러니 이번만큼은 당신을 온전히 보내드리죠. 당신에게도 저처럼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할 테니.”
사하가 웃으며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마가목은 화이트의 수액과 블랙의 목질이 만나면 서로의 단점을 상쇄시키고 장점을 극대화하죠. 그러니 안심하고 드셔도 됩니다.”
“참 친절하시군요.”
카일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대가 암흑 기사가 되는 순간 우린 평생을 함께하게 될 테니 미리 잘 보여야 하지 않겠어요.”
“암흑 마법사와 기사라…. 그렇군요.”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내부로 들어온 찻물은 상쾌한 청량감과 함께 온몸으로 퍼지며 내부에 남아 있던 피로감까지 단번에 날려버렸다.
“대… 단하군요.”
카일이 놀란 눈으로 손에 들린 찻잔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 잔 더 하셔도 된답니다. 오늘만큼은 그냥 편한 친구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안 될까요.”
“좋습니다. 그러죠. 이런 날은 술을 먹어야 하지만 오늘은 찻물로 대신하겠습니다.
카일이 빈 찻잔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부탁을 들어줘서!”
사하가 기쁘게 웃으며 천천히 찻잔에 뜨거운 찻물을 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