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199화 (199/404)

199.잊혀진 영웅가1

재질을 알 수 없는 거대한 문을 향해 걸어간 사하가 손을 들어 가볍게 문에 밀착시켰다.

우웅-

사하의 손에서부터 시작된 작은 진동이 검붉은 빛을 따라 거대한 문 전체로 퍼져 나가며, 복잡하고 기하학적인 육망성의 문양을 만들어 냈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문이 마치 사하의 작고 여린 손에 밀려나듯 안쪽으로 천천히 밀려나며 열리기 시작했다.

그그긍-

기분 나쁜 마찰음을 따라 거대한 문이 좌우로 갈라지며 드러난 광경은 놀랍게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처럼 어둡고 음침한 암흑의 공간이었다.

“들어오세요.”

카일을 보며 미소를 지은 사하가 흑기사와 함께 어둠으로 물든 문 안쪽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 종국에는 사라져 버렸다.

“따라 들어갈 것이냐?”

얼굴을 잔뜩 찌푸린 툴린이 불길하다는 듯 문 안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쩌면 함정일지 몰라요.”

“맞는 말이다. 이미 우릴 공격한 용병들은 모두 사라졌다. 차라리 다시 크레센트 숲으로 돌아가 상황을 살피는 것이 어떠냐?”

툴린에 이어 이엘과 코퍼까지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카일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릴 잡으려 했다면 굳이 여기까지 데려올 필요도 없었을 겁니다.”

“그럼, 저길 따라 들어가겠다고?”

“어차피 사하의 허락 없이는 다시 돌아갈 수도 없지 않습니까?”

카일의 말대로 조금 전 지나온 미로 같은 길에는 수십, 수백 기의 스톤 골렘이 잠들어 있었다.

“아직 우리에게 일어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미리부터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은 그녀를 믿어 보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믿어요? 어떻게요. 그녀는 암흑 마법사예요.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사악한 존재란 말이에요.”

카일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시안느가 비명을 지르듯 차갑게 말했다.

“그렇군요. 그래서요?”

“그야 당연히!”

“기사로서 악을 처단하고 정의를 실현하고 싶습니까? 아니면 가족을 버린 아버지를 대신해 그녀에게 복수를 하고 싶은 겁니까?”

갑작스러운 카일의 싸늘한 말투에 사안느가 깜짝 놀라 주춤 뒤로 물러났다.

“저, 전…!”

“암흑 마법사, 그런 건 전 잘 모릅니다. 솔직히 알고 싶지도, 관심도 없습니다. 그냥 지금 제 바람은 모두 무사히 이곳을 빠져나가는 겁니다. 그러니 정의든 복수든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오.”

카일은 차갑게 내려앉은 눈으로 주먹을 꽉 말아 쥔 시안느를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그러곤 성큼성큼 걸어 열려 있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너무 심했다. 그냥 적당히 받아넘겨도 될 일 아니었느냐? 그녀에게도 갑자기 나타난 배다른 동생은 나름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녀는 암흑 마법사가 아니냐?”

툴린이 옆으로 바짝 따라붙으며 굳어 있는 카일의 눈치를 살폈다. 단 며칠에 불과하지만 언제나 부드럽게 상대를 대하던 카일이 이렇게 화를 내는 건 처음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충격이 크고 화도 날 거란 걸, 하지만 그녀에겐 잘못이 없습니다. 그저 세상에 태어났을 뿐이죠.”

“그야… 그렇지만….”

“그녀도 원해서 세상에 태어난 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세상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다른 누구도 아닌 가족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미움을 받아야 합니까?”

카일은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 둔 전생의 기억이 떠올라 얼굴을 찌푸렸다.

그도 그랬다. 그저 세상에 태어나고 버려졌을 뿐이었다. 그가 원해서 태어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고아란 이유로 세상으로부터 멸시와 괴롭힘을 당했다.

그의 잘못도 아닌데 말이다.

“시안느 경이 화를 내야 할 대상은 처음부터 동생이 아닙니다.”

카일은 냉정하게 말을 하며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져 버렸다.

“설마, 저… 녀석 마음속에 어미에 대한 미움이 자리 잡은 건 아니겠지?”

툴린이 걱정스러워하는 얼굴로 사라져 가는 카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 녀석아! 같이 가야지! 이 늙은이를 혼자 둘 생각이냐! 고얀 녀석 같으니라고.”

툴린이 버럭 고함을 지르며 급히 카일의 뒤를 쫓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뒤에서 카일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급히 카일의 뒤를 쫓아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 *

또각또각-

낡았지만 귀족가의 문장이 선명한 마차가 천천히 목책으로 다가섰다.

“멈추십시오.”

목책을 지키고 있던 매튜가 갑자기 나타난 마차에 놀라 급히 목책을 내려왔다.

“이곳이 샤론 마을인가?”

붉은 천 위에 교차하는 검 사이로 선명한 란트란 꽃이 새겨진 망토를 두른 중년의 기사가 목책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흠, 엑스퍼트, 역시 그분답군!”

래쇼트 백작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 자경대장을 만나러 왔다. 안내해 주겠느냐?”

“대, 대장님을 말입니까?”

매튜가 잠시 당황한 표정으로 백작을 살피며 경계하듯 바라보았다. 갑자기 알지도 못하는 귀족이 찾아와 보일 대장을 찾으니 일단 경계심부터 든 것이다.

“그리 볼 것 없다. 그저 옛 친구가 찾아온 것뿐이니.”

백작이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겨우 경계심을 푼 매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것이 아니라, 저… 대장님께선 마을에 안 계십니다.”

“마을에 없다니? 설마 마을을 떠났단 말이냐?

“아! 그것이 아니라 며칠 전 오크 랜드로 정찰을 나가셨습니다. 당분간 돌아오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

“허, 이런 낭패가!”

래쇼트 백작이 난처한 표정으로 마차를 돌아봤다.

“집에서 기다리겠어요. 매튜에게 전해 주세요.”

마차에서 맑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내를 부탁해도 되겠느냐?”

“그건…!”

매튜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귀족이라고는 하나 대장의 허락도 없이 아무도 없는 집으로 안내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매튜! 걱정 말거라! 우린 모두 그분의 옛 친구들이니 말이다.”

“아, 알겠습니다. 그럼….”

매튜가 어쩔 수 없이 목책 문을 열었다.

더 이상 귀족의 마차를 목책 밖에 세워 둘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왠지 모를 친근한 말투에 그들을 믿어 보기로 한 것이다.

마차가 천천히 마을 안으로 들어서자 사람들이 급히 몰려나와 분분히 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숙였다.

“샤론 마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마을 촌장 보메스라 합니다.”

갑작스러운 귀족의 행차에 급히 연락을 받고 앞으로 달려 나온 보메스가 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모두 일어나세요. 우린 그저 옛 친구를 만나러 왔을 뿐 마을에 부담을 주고 싶진 않아요. 그저 조용히 머물다 가겠어요. 신경 쓸 것 없답니다.”

“아, 아닙니다.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저희가 최선을 다해 음식을…!”

“필요 없다. 우린 조용히 머물다 가겠다.”

래쇼트 백작이 얼굴을 찌푸리며 냉정하게 말하자 보메스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아, 알겠습니다.”

“가자!”

래쇼트가 다시 말을 천천히 몰아 매튜의 뒤를 따랐다.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검술은 보일 대장으로부터 배운 것이냐?”

“그렇습니다. 대장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검술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보아하니 이미 초급의 끝자락에 다다른 것 같은데 이곳에 너와 같은 자가 몇 명이나 되느냐?”

갑작스러운 래쇼트 백작의 말에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은 매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마을엔 저와 필론 둘뿐입니다만 마을 외곽 요새에 세 명이 더 있습니다.”

“허허! 이 작은 영지에 무려 5명이 중급에 근접해 있다. 역시 대단하군!”

래쇼트 백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다 왔습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을 겁니다.”

“수고했다.”

래쇼트가 천천히 말에서 내려 마차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남작님!”

“고마워요.”

래쇼트 백작의 팔을 잡고 천천히 마차에서 내린 이사벨라 남작의 모습에 매튜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분명 여인이 타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처럼 아름답고 고귀한 귀족이 타고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어딘지 낯이 익다.’

평생 남작령이 세상의 전부라 생각하며 살아온 매튜였다.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고귀한 여인을 자신이 봤을 리가 없었다. 상념을 털어 버리듯 고개를 저은 매튜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매튜, 수고했어요.”

“아닙니다.”

이사벨라의 말에 다시 한번 고갤 숙인 매튜가 다시 길을 돌아 목책으로 향했다.

“그런데… 내가 이름을 말한 적이 있었나?”

매튜가 의아한 듯 볼을 매만지며 뒤를 돌아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며 서둘러 목책으로 향했다.

* * *

문을 넘어 어둠 속으로 몸을 밀어 넣는 순간 눈앞을 가리던 어둠 대신 놀랍고도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졌다.

거대한 공동의 정중앙에 위치한 엄청난 크기의 수정들이 무질서한 듯 묘한 균형을 이룬 채로 은은한 빛을 뿜어내며 공동을 밝히고 있었다.

“와!”

“세상에 저런 엄청난 크기의 수정이 있다니!”

“너무 아름다워요.”

사람들이 탄성을 터트리며 수정을 바라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같은 아름다움을 보더라도 사람마다 생각하는 것이 다르듯 눈앞에 드러난 거대한 수정에 브린이 입맛을 다시며 작은 목소리로 버크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저걸 팔면 얼마나 받을까?”

“글쎄? 수정이 가장 싸긴 하지만 저만하면 제법 많이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희소성이란 게 있는데?”

버크와 브린이 눈을 빛내며 거대한 수정을 탐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큭, 바보들이군?”

옆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바로 듣고 있던 밀런이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뭐!”

“아님, 멍청한 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큭, 좋아! 하나만 묻지, 혹시 저 수정을 훔치면 누가 짊어지고 산을 내려갈 거냐?”

“당연히….”

“그야….”

버크와 브린이 서로를 돌아보다 고개를 저었다.

저 거대한 수정을 한두 사람이 짊어지고 옮기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밀런에게로 향했다.

“뭐냐!”

갑작스러운 뜨거운 시선에 불안한 듯 밀런이 주춤 뒤로 물러났다.

“정확히 3등분, 똑같이 나눕시다.”

“힘도 똑같이 쓰는 거요.”

브린과 버크가 밀런을 보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보니 완전 미친놈들이군!”

눈살을 찌푸린 밀런이 급히 뒤돌아 둘에게서 멀어졌지만 브린과 버크가 놓치지 않겠다는 듯 황급히 그 뒤를 쫓았다.

“당신 일행 중엔 재밌는 사람이 많군요.”

사하가 멀어져 가는 세 사람을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좀 모자란 부분이… 생각보단 많지만, 심성이 나쁜 건 아닙니다.”

“괜찮아요. 수정 한두 개 없어진다고 문제가 될 건 없으니까요. 그리고 쉴 곳이 필요하면 2층에 있는 방들을 사용하도록 해요. 2층으로 올라가려면 첫 번째 마법진을 이용하면 돼요.”

사하가 가리킨 곳에는 4개의 마법진이 나란히 놓여 있어 이 거대한 천공 탑이 단 5층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2층까진 얼마든지 개방할 수 있으나, 그보다 위층으론 올라가지 마세요. 자칫 위험해질 수 있으니.”

“알겠습니다. 주의하도록 하죠.”

“좋아요. 그럼 약속대로 차를 대접하고 싶군요. 같이 가시겠어요?”

“물론입니다.”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사람들에게는 제가 알리겠습니다.”

“부탁드리죠. 멀린 님!”

카일은 사하의 뒤를 따라 가장 오른쪽 끝에 위치한 마법진에 올라섰다. 순간 마법진이 자동으로 활성화되며 선명한 푸른빛이 흘러나왔다.

“airborne”

사하의 짧은 외침과 함께 마법진이 둥근 원반 형태로 은은한 빛과 함께 천천히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빠른 속도로 솟구쳤다. 마치 유리 벽으로 둘러싸인 고속 엘리베이터를 타는 듯한 느낌이었다.

“전혀 놀라지 않는군요. 이런 걸 이미 타 본 사람처럼 말이죠.”

사하가 흥미로운 듯 카일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럴 리가요. 지금도 굉장히 놀라워하는 중입니다.”

갑작스러운 사하의 질문에 카일이 애써 놀란 표정을 지으려 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카일의 얼굴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더없이 기괴하고 괴상한 표정으로 변해 갔다.

“풋! 그런가요?”

사하가 애써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그, 그럼요.”

“좋아요. 믿어 드리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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