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약속의 징표
사하를 따라 성벽을 넘어 안쪽으로 들어서자, 무너진 성터의 잔해들이 쌓여 마치 미로처럼 얽혀 있었다.
처음부터 성 외곽이 아니라 안쪽으로 들어왔다면 미로에 갇혀 한참 동안 헤매고 다녔을 것이다.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다.”
툴린이 무너진 잔해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뜻인가요?”
“무너져 쌓인 잔해들의 위치를 보십시오.”
툴린의 말에 세심하게 주변을 살핀 코퍼가 이엘에게 말했다.
“……아!”
“알아보셨습니까?”
“보기엔 무질서하게 보이이지만, 무너진 잔해들이 모두 좁은 외길을 포위한 형국이에요.”
“잘 보셨습니다. 방어를 위해 철저하게 계산해 배치한 게 분명합니다. 게다가 비슷한 돌무더기를 여러 곳에 배치했습니다. 길을 알지 못한다면 자칫 잘못하다간 미로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겁니다.”
코퍼의 확신에 찬 말에 이엘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역시 코퍼 님은 성에 대해 잘 아시는군요.”
“아가씨야말로 대단하십니다. 작은 힌트 하나에 바로 알아보시다니, 이번에도 책에서 쌓은 지식 덕분이겠죠.”
“그, 그렇죠.”
이엘이 코퍼의 질문에 얼떨결에 대답하며 시선을 피했다.
“아주 놀고들 있네! 그런 게 아니야. 멍청한 녀석들.”
툴린이 어이가 없다는 듯 대화를 나누는 이엘과 코퍼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넌 어떠냐, 저 녀석들과 같은 생각이냐?”
“확실히 잔해의 위치나 배치가 미로처럼 얽혀 있긴 합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이곳의 주인이 마법사란 사실이죠.”
“그렇지. 이곳은 암흑 마법사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곳이다. 그것도 자신의 거처를 보호하기 위해서 말이야.”
“그럼 설마, 이곳이 마법사의 던전이란 말인가요?”
마법사의 던전은 마법사의 거처인 동시에 연구실이자 무덤을 뜻하는 말이었다. 던전에는 마법사가 사용하거나 만든 마법 물품, 그리고 평생을 수집한 마법 서적이나 각종 마법실험 도구, 희귀한 마법 재료들이 모여있었다. 더구나 마법사는 고대나 지금이나 가난한 자가 없었고, 다양하고 희귀한 재료를 구매하기 위해 항상 골드나 보석을 쌓아두고 보관하는 경우가 많아 고대 마법사의 던전을 발굴한 귀족이나 영주는 엄청난 자산을 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엄청난 대가가 보장된 만큼 마법사의 던전은 입구에서부터 수많은 마법진으로 철저하게 보호받고 있어 엄청난 희생과 노력이 있어야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비록 지금 가고 있는 곳이 고대 마법사의 던전은 아니지만, 대를 이어 재산을 물려받은 마법사, 그중에서도 암흑 마법사의 거처였다.
크레센트 숲 전체에 마법을 걸 만큼 대단한 마법사라면, 이곳 역시 그에 못지않은 사악한 마법들이 도배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 마법사의 행동엔 모두 이유가 있는 법, 이곳을 단순히 길을 잃게 하려는 미로 정도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러나 작은 것은 돌조각이라도 함부로 건들지 말아라!”
툴린의 말과 행동은 단순히 이엘이나 코퍼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었다. 뒤를 쫓아오는 일행에게 주의를 주는 것은 물론, 앞서 사하와 나란히 걷고 있는 카일에게 위험을 상기시키는 말이기도 했다. 물론 옆에 걷고 있는 사하에게 경고하는 말이기도 했다.
“툴린이라 했던가요? 말은 거칠어도 생각이 깊군요. 저에게까지 경고를 보내다니.”
“검사인 저와는 달리 마법사인 툴린 님은 이곳의 위험성을 더 확실히 느끼시고는 걱정해주시는 겁니다. 그러니 이해를 해 주십시오.”
“만약 제가 이해를 못 한다면요? 카일 님은 어쩌실 거죠?”
“검사와 마법사는 거리에서 승패가 결정된다고들 합니다. 지금 이 거리라면 제가 유리하지 않을까요.”
“제 뒤를 따라오는 흑기사는 무려 소드마스터예요. 거리가 가깝다고 카일 님이 유리할까요?”
사하의 얼굴에 자신감에 찬 미소가 어렸다. 그녀는 곧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볼 카일의 모습을 기대했다. 하지만 사하의 바람과는 달리, 카일이 힐끔 뒤를 따르는 흑기사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소드마스터, 대단하죠. 하지만 거리와 속도만 놓고 본다면 제가 더 유리할 것 같군요.”
카일의 말에 사하의 얼굴에 잠시 놀라움이 번졌다.
“대단하군요. 흑기사를 상대로 그런 자신감을 보이다니?”
“이건 강자와 약자를 가리는 문제가 아니니까요.”
“그게 다른가요?”
“검술을 겨루는 일이라면 확실히 전 흑기사의 상대가 될 수 없죠. 하지만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제가 당신을 죽이려 한다면 과연 흑기사가 막을 수 있을까요.”
카일의 말에 사하가 잠시 굳은 얼굴로 흑기사와 카일을 번갈아 돌아보았다.
“흠, 이해할 수 없군요. 흑기사는 당신보다 고작 반 발자국 더 멀 뿐이에요. 이 정도 차이만으로 정말 흑기사보다 빨리 절 죽일 수 있단 말인가요.”
“다른 검사라면 불가능하겠지만, 저라면 가능하죠. 전 속도와 근접전 모두 자신이 있으니까요.”
“그런가요?”
사하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카일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좋아요. 우리 내기 한 번 해요.”
“네?”
“당신이 정말 이 거리에서 절 죽일 수 있는지 보고 싶어요. 어때요, 해볼래요?”
사하의 장난스러운 말에 카일은 얼굴을 찌푸렸다.
“장난은 사절입니다.”
“장난이 아닌걸요.”
사하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하죠. 만약 당신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면 당신의 소원 하나를 들어 드릴게요. 반대로 실패하면 제 소원 하나를 들어주세요. 어때요?”
“정말입니까?”
“마나를 걸고 맹세할 수 있어요. 해볼래요?”
“크게 다칠 수도 있습니다.”
“절 걱정하기보단 자신을 걱정해야죠. 제가 이긴다면 어떤 소원을 들어달라 청할지 모르잖아요.”
“만약… 제가 이 내기에 응한다면 공격은 언제 해야 합니까? 알고 있겠지만, 이건 기습일 때 가능합니다.”
“물론이죠. 기회는 단 한 번, 당신이 승낙한 순간부터 하루의 시간을 드릴게요. 흑기사가 있을 땐 언제든 제 반걸음 안으로 들어올 수 있죠.”
제한된 시간과 기회는 카일에게 불리한 요소이지만, 일단 성공만 한다면 이곳에서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좋습니다. 해보죠.”
“정말인가요?”
“약속은 반드시 지켜주십시오.”
“물론이죠. 약속은 반드시 지켜질 거예요.”
사하의 말이 끝나는 순간, 그녀의 손에 들린 지팡이의 붉은 보석에서 흘러나온 암흑의 기운이 사하와 카일의 몸으로 흘러 들어갔다.
“절대 깰 수 없는 약속의 징표예요. 승자는 언제 어느 때든 약속에 따라 원하는 걸 말할 수 있고, 패자는 승자의 요구를 반드시 이행해야만 해요. 그렇지 않으면 대가를 받게 될 거예요.”
“동의합니다.”
“좋아요. 이제부터 내기를 시작하죠.”
쉬익-
사하가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순간, 카일의 손이 빛살처럼 움직였다. 동시에 흑기사의 검 역시 빠르게 뽑혀져 나와 카일의 머리 위로 번개같이 떨어져 내렸다. 어느새 카일의 단검이 정확히 사하의 목 앞에 멈춰져 있었다.
“꺄악!”
카일의 갑작스러운 공격과 함께 목에서 느껴지는 차갑고 싸늘한 기운에 놀란 사하의 비명이 성안을 맴돌았다.
쿵-
순간 무너진 돌 잔해에서 낮은 진동이 울렸다.
“우, 움직인다.”
브린이 눈앞에 쌓여있던 돌 잔해들이 몸을 일으키자 깜짝 놀라 뒤로 주춤 물러났다. 브린 뿐만 아니었다. 앞은 물론 여기저기 쌓여있던 돌무더기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키며 일행을 점점 압박하기 시작했다.
“스, 스톤 골렘이다.”
“젠장! 원진이다. 모여!”
“이, 이럴 수가. 정말 골렘이 존재했단 말인가?”
툴린이 놀란 눈으로 다가오는 골렘을 바라보았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혹 저 녀석, 약점이 있습니까?”
다가오는 골렘을 멍하니 바라보는 툴린을 원진 안으로 끌어당긴 코퍼가 물었다.
“…핵! 그래, 마나핵을 부수면 된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정확한 위치는 나도 몰라!”
“그럼 하나하나 부숴봐야 한다는 말이잖아!”
“이런 젠장! 여기서 다 죽게 생겼군, 눈에 보이는 것만 수십 기야 이걸 어떻게 부숴!”
사람들 모두 당황한 듯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였다.
“모두 멈춰!”
사하의 낮은 외침에 막 일행을 공격하려던 골렘의 움직임이 정확히 멈췄다.
“이 땅의 주인 사하가 명한다.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라!”
쿵-
사하의 외침에 사방에서 몰려들던 스톤 골렘들이 일제히 몸을 돌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원래의 돌무더기로 변했다.
“휴! 다행이다. 죽는 줄 알았네.”
“다행은 무슨! 언제 저 돌무더기가 일어날지 모르는데.”
“일단 안 죽었으면 다행이지.”
“그런데 왜 갑자기 저 녀석이 마법사를 공격한 거야?”
버크가 멀리 카일의 손에 반쯤 잡혀있는 사하를 보며 중얼거렸다.
“괜찮으십니까?”
카일의 물음에 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그리고 미안해요. 내기를 먼저 제안하고도 겁을 먹어 비명을 지르다니.”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놀랐을 겁니다. 그보다 먼저 이것 좀 치워달라고 말해주면 안 될까요.”
카일이 자신의 머리 위에 멈춰있는 흑기사의 대검을 보며 말했다.
“물러나요.”
“노, 놈 위험하다.”
“괜찮아요. 물러나요.”
사하의 부드러운 음성에 흑기사의 대검이 천천히 카일의 머리에서 멀어져 갔다.
“휴! 감사합니다. 머리가 쪼개지는 줄 알았습니다.”
카일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이젠 절 놓아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아! 죄송합니다.”
카일이 당황한 얼굴로 급히 뒤로 물러났다. 흑기사의 검이 머리로 떨어지자, 급히 사하를 뒤에서 끌어안아 인질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흑기사의 대검이 그대로 떨어졌다면 카일은 물론 사하의 몸까지 두 쪽으로 갈라졌을 것이다.
“아녜요. 일단 당신이 이겼어요. 원하는 걸 말하면 들어 드리겠어요.”
“지금 당장 말해야 합니까?”
“기간을 정한 건 아니잖아요. 원할 때 언제든 말하세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함부로 몸에 손을 댔습니다. 죄송합니다.”
카일이 고개를 숙였다.
“그럴 필요 없어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잖아요. 그럼 다시 가볼까요. 이제 다 왔어요.”
사하가 고개를 저으며 급히 앞장섰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흑기사가 그 뒤를 따랐다.
“너, 조심, 마음에 안 든다.”
갑자기 멈춰선 흑기사가 카일을 보며 싸늘하게 말하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사하의 말대로 카일과 일행은 얼마 안 있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이에요.”
사하가 가리킨 곳은 이곳에서 유일하게 온전한 형상을 유지하고 있는 거대한 하늘탑이었다.
“이게 바로 하늘탑이란 말이냐?”
툴린이 하늘 높이 우뚝 솟은 거대한 탑을 보며 물었다.
“…아니, 제가 잘못알았습니다. 이건 하늘탑이 아닙니다.”
“응? 무슨 소리냐? 분명 지난번 봤을 땐 하늘탑이라고 하지않았느냐?”
“크기가 틀립니다.”
“무슨 뜻이냐?”
“그때 봤을 때완 규모가 완전히 틀리단 말입니다. 이건 제가 있던 하늘탑의 두 배는 족히 넘을 규모입니다.”
“그럼… 이건 뭐란 말이냐?”
툴린이 의아한 얼굴로 하늘탑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하지만 답은 의외로 쉽게 알 수 있었다.
“어서 오세요. 천공의 탑에 오신 걸 환영해요.”
사하가 생긋 웃으며 천천히 거대한 문으로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