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자매
“자매라니… 무슨 소리냐!”
갑작스러운 사하의 충격적인 말에 당황한 시안느가 외쳤다.
“말 그대로예요. 언니와 난 같은 아버지를 둔 자매란 말이죠.”
“그, 그럴 리 없다. 그럴 리가!”
시안느가 충격을 받은 듯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항상 아버지께선 어린 절 무릎에 앉혀 놓고 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어요. 검을 좋아한 언니에게 직접 목검을 만들어 주시고 검술도 가르쳐 주셨다고….”
사하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한땐 저도 검술을 가르쳐 달라 아버지를 졸랐어요. 언니처럼 저도 목검을 만들어 달라고. 한데 안된데요. 전 반드시 마법사가 되어 어머니의 뒤를 이어야 한다고.”
“말도 안 돼! 아버지께서… 믿을 수 없어. 왜! 당신 같은 사악한 암흑마법사를….”
시안느가 발작적으로 외치며 사납게 사하를 노려보았다. 언제나 가족을 사랑했던, 정의롭고 당당한 아버지가 사악한 암흑마법사와 함께하기 위해 가족을 버렸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안느의 분노에 찬 외침에 슬픔에 잠겨있던 사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곤 오히려 시안느를 쏘아보기 시작했다.
“왜…?”
사하의 분노한 작은 외침에 따라 평온했던 분지가 부르르 진동하며, 싸늘한 기운이 분지 전체로 내려앉았다.
“큭큭, 정말 알고 싶어?”
사하가 차갑게 웃으며 시안느를 향해 물었다.
“그래! 알고 싶어! 당신이 정말 나와 피를 나눴다면 난 이유를 알 정당한 권리가 있어!”
주변으로 넓게 퍼져가는 차가운 살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안느가 사하에게 한 발 다가서며 외쳤다.
“좋아! 알려주지, 그건 말이야!”
싸늘하게 시안느를 바라보며 사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철컹철컹-
그때였다.
미동도 없이 한쪽에 가만히 서 있던 흑기사가 갑자기 몸을 움직여 사하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비켜!”
앞을 가로막은 흑기사를 매섭게 노려본 사하가 차갑게 외쳤다. 하지만 흑기사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사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당신 정말!”
얼굴을 찡그린 사하가 앞을 막아선 흑기사를 잠시 노려보다 이내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언제 슬퍼했냐는 듯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건 아버지와 나만의 비밀이니 말해줄 수 없어요.”
사하가 웃으며 뒤돌아섰다.
“너!”
마치 비웃는 듯한 사하의 웃음소리에 시안느가 분노한 듯 소리를 지르려던 순간, 더없이 차갑고 싸늘한 사하의 목소리가 시안느의 귓가에 내려 앉았다.
“사안느! 나와 같은 운명을 태어난 나의 자매여. 아무리 발버둥 쳐도 너와 내가 하린의 딸이란 사실 하나만은 변하지 않아! 그리고 널 위해, 아버지와 내가 큰 희생을 치르고 있다는 걸 잊지 마!”
“무슨 말이야! 가지 마, 돌아오지 못해?”
시안느가 당장이라도 달려가 사하를 붙잡으려 했지만, 흑기사는 마치 철벽처럼 여전히 시안느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말도 안 돼! 내가 믿을 것 같아? 넌 절대 나와 자매일 수 없어!”
시안느의 날카로운 외침이 이어질수록 사하의 눈엔 슬픔이 어렸다. 하지만 이내 밝게 웃으며 카일에게 다가갔다.
“당신이 시안느 경과 자매라니… 놀랍군요.”
“그런가요? 별로 놀란 표정은 아닌데?”
사하가 카일의 표정을 살피듯 바라보며 물었다.
“좀 놀라긴 했습니다만, 몰랐던 자매를 새롭게 만났으니 나쁜 일은 아니잖아요.”
“제가… 암흑마법사인데도 말인가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들었습니다. 그럼 당신 잘못이 아니죠. 아마도 세상이 알지 못하는 비밀이 있을 겁니다.”
예상치 못한 카일의 대답에 사하의 눈빛이 밝게 빛났다.
“뭐, 뭐 하는 겁니까?”
갑자기 자신의 얼굴을 불쑥 들이미는 사하의 돌발 행동에 당황한 카일이 주춤 뒤로 물러났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사하가 눈을 크게 뜨고는 카일이 물러난 만큼 바짝 다가서며 되물었다.
“그, 그렇습니다.”
“풋, 당신 정말 재밌는 사람이군요.”
사하가 카일의 눈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이내 웃으며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카일은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조심스럽게 사하를 바라보았다.
“그보다 한 가지 물어볼 말이 있습니다.”
“좋아요. 당신은 특별한 사람이니 허락하겠어요.”
“얼마 전 상단을 공격한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설마 시안느 경 때문입니까?”
“그게 궁금한가요?”
“희생된 용병들이 많으니까요.”
카일의 말에 잠시 고민에 잠긴 사하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말해주죠. 하지만 이야기가 상당히 길 거예요.”
“그럼 다른 일부터 처리하고 들어도 될까요.”
“얼마든지!”
사하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카일이 고개를 돌려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크루트를 행해 다가갔다. 흑기사와의 대결에서 암흑마기가 내부로 침투하며 극심한 내상을 입은 크루트는 일어설 힘도 없는지 미동도 없이 바닥에 누워 있었다.
“직접 날 죽이려 온 것이라면 단번에 심장을 찔러 죽여주면 고맙겠군.”
“그 전에 물어볼 게 있군요.”
“큭! 내가 대답해줄 것 같으냐!”
“평안한 죽음을 원하지 않습니까?”
카일이 냉정한 얼굴로 크루트를 바라보았다.
“고문이라도 할 생각인가?”
“못할 것 없지요.”
카일의 담담한 말에 크루트가 얼굴을 찌푸렸다.
“어디 해보아라! 아무리… 커억!”
푸욱-
카일이 곧장 단검을 뽑아 크루트의 허벅지에 박아 넣었다.
“혹시 오크 가죽을 어떻게 벗기면 좋은지 아십니까?”
카일이 크루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바로 산 채로 매달아 가죽을 벗기는 겁니다. 그럼 사후 근육 경직을 피할 수 있어 부드럽고 질긴 가죽을 얻을 수 있죠. 참고로 말씀드리면, 지금껏 제 손으로 벗긴 오크 가죽이 수천 장은 넘을 겁니다.”
표정 없는 얼굴로 담담하게 말하는 카일의 모습에 크루트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하! 그래, 인정하지, 확실히 무서운 협박이었다. 하지만 날 고문하기는 힘들 것 같군! 난 이미 너무 많은 피를 흘렸어.”
크루트가 대지 속으로 빨려가듯 사라지는 핏물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그렇군요. 그럼 이런 건 어떨까요.”
“크윽, 무슨 짓이냐!”
카일이 허벅지에 박힌 단검을 틀어잡았다.
“이런 겁니다.”
카일이 틀어쥔 단검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며 단검과 함께 상처를 봉합해버렸다.
“허억…!”
크루트가 당황한 듯 단검이 박힌 허벅지를 내려다 보았다.
“진짜 되는군.”
카일도 자신이 한 일이 신기한 듯 손을 내려다 보았다. 설마 크루트의 상처가 치유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다. 그저 신성력으로 밖으로 빠져나가는 피의 양을 줄이려 했던 것뿐이었다.
“이만하면 충분히 시간을 번 것 같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얼굴을 찌푸린 크루트가 결국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이라면… 말해주마.”
크루트 역시 마지막 자존심은 있는지 단호하게 말했다.
“저도 많은 것을 바라진 않습니다. 그럼 묻겠습니다. 당신 소속은?”
“검은 여우 동부 방면 제3 타격대장이다.”
“역시… 제국이었군요. 그럼 용병단 전체가 검은 여우란 말인가요.”
“아니다. 간부급만 타격대다. 나머진 왕국에서 모집한 하급 용병일 뿐이다.”
“그럼…아킨스 자작가를 멸문시킨 자들도 검은 여우입니까?”
“큭, 그럴 리가. 아무리 강대한 제국이라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정보조직에 와이번 나이트를 배치하진 않는다.”
“그럼 저들은 누구인가요.”
“아이젠 공작가의 사람이라고만 들었다. 정확한 사실은 나도 알 수 없다.”
“그럼 그들이 절 쫓는 이유는 뭡니까?”
카일이 잔뜩 굳은 얼굴로 물었다. 카일이 정말 하고 싶었던 질문이 바로 이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정확힌 모른다. 다만 몇 달 전 모종의 사건으로 아이젠 공작가의 중요 인물이 죽었다고 하더군, 그때 사용된 마법무구가 아마도….”
크루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카일의 어깨로 향했다.
“보이지 않는 마법무구! …이제 보니 네놈이 바로 그놈이었군!”
“그 중요 인물이 누군진 모릅니까?”
“모른다. 이것도 어제 공작가를 지원하라는 지시에 겨우 알게 된 내용일 뿐,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져 있다.”
“그렇군요.”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해 줘서 고맙습니다.”
“설마… 끝인가?”
크루트가 황당한 표정으로 카일을 향해 물었다. 설마 이런 단순한 질문만을 해올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처음 자신의 신분을 밝힌 것만 제외하면 중요한 정보는 하나도 담겨있지 않았다.
“더 물을 것도 없습니다만?”
“고작… 이걸 물어보려 했단 말인가? 적어도 조직의 거점이나 간부들의 위치 정도는 물어봐야 하는 것 아닌가?”
“물으면 대답해 주실 겁니까?”
“그야…!”
“전 기사가 아닙니다. 귀족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저 용병이 되려 세상 밖에 나왔을 뿐입니다. 그런 것들을 알아봐야 복잡한 일에 얽힐 뿐이죠.”
카일의 말에 크루트가 허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넌 정말 붉은 거미가 아니었구나.”
“아닙니다.”
카일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돌아섰다.
“잠깐! 부탁이 있다.”
“네?”
크루트가 품 안에서 황금색 용병패와 함께 보석이 든 주머니를 꺼냈다.
“이걸 용병 길드에 전해다오.”
“이건…?”
“이번 일로 받은 일종의 의뢰비다. 용병패와 함께 길드에 전해다오. 안에 든 보석 절반은 네 몫으로 주겠다.”
“이걸 왜?”
“보석들을 팔아 죽은 하급 용병들의 가족들에게 지급해다오. 그들이 피를 흘리며 번 목숨값이니 정당한 주인에게 돌아가길 바란다.”
“절 어떻게 믿고 보석을 맡깁니까?”
“글쎄? 달리 믿을 사람이 없기 때문이겠지.”
크루트가 허탈하게 하늘을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
“…좋습니다. 이건 길드에 제가 반드시 전하죠.”
카일이 보석 주머니와 함께 크루트의 용병패를 받아 품 안에 밀어 넣었다.
“반드시 왕도 길드에 전해다오.”
“조건이 많군요.”
“보석의 절반이면 의뢰비론 충분하고도 넘친다고 생각한다.”
“큭, 확실히 대가를 받았으니 의뢰라 할 수 있군요. 다른 부탁은 없습니까? 되도록 들어드리죠.”
“딱히 생각나는 건 없지만… 그래! 길드장에게 전해다오. 작년에 묻어둔 밤의 숨결은 더 이상 내가 주인이 아니라고 말이야.”
“길드장과 친하셨습니까?”
“시간이 나면 종종 함께 밤의 숨결을 즐기곤 했지.”
“알겠습니다. 어차피 길드에 가야 하니 말은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럼 부탁하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단검을 좀 뽑아주겠나? 먼저 간 부하들을 따라가려면 좀 서둘러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크루트가 힘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약속은 반드시 지켜드리겠습니다.”
카일이 허벅지에 박힌 단검을 뽑아냈다.
“크윽!”
짧은 신음을 내뱉은 크루트가 고개를 돌려 초라하게 누워있는 젠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곧 다시 만나겠군.”
크루트가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곧 멀리서 들려오는 아련한 대화 소리에 크루트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카일! 정말 오크를 산 채로 매달아 가죽을 벗겨봤나요?”
“그럴 리가요. 그런 짓을 왜 하겠습니까?”
카일이 오히려 의아한 듯 사하를 보며 반문했다.
“하지만 조금 전엔 분명히 좋은 가죽을 얻으려면 산 채로 가죽을 벗겨야 한다고…?”
“당연히 거짓말입니다. 정말 믿으신 겁니까?”
“네에?”
“좋은 가죽은 무두질을 얼마나 잘하는가에 달려있을 뿐입니다. 뭐하러 오크를 산 채로 잡아 가죽을 벗기겠습니까? 그런 말을 믿은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죠.”
카일이 당연하다는 듯 사하를 보며 대답했다. 그러자 사하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바닥에 쓰러져 점점 생기를 잃어가는 크루트를 향했다. 그녀는 한동안 크루트를 바라보다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호호호! 당신 정말 재밌는 사람이군요.”
“그런 말은 처음 듣는 것 같군요. 그보다 이제 상단을 공격한 이유를 들어도 될까요?”
“좋아요. 오랜만에 절 즐겁게 해줬으니 제가 차를 대접하겠어요.”
“좋습니다.”
사하가 웃으며 앞장서자 카일이 천천히 그 뒤를 쫓았다. 힘겹게 눈을 뜬 크루트가 그 모습을 바라보다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목소리를 흘렸다.
“젠…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