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주인의 정체1
한동안 침묵을 유지하며 터그를 바라보던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 보겠습니다.”
“그러다 배신을 하면 어쩌려고!”
험악한 얼굴로 터그를 노려보며 밀런이 외쳤다.
“흥! 어이가 없군, 난 저 녀석들보다 네놈이 더 걱정이다.”
“뭐야!”
루트의 말에 밀런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왜? 내가 틀린 말을 했나!”
“난 지금껏 남의 등을 쳐 먹은 적은 있어도 배신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흥! 등쳐 먹은 건 인정하는 거냐!”
“이놈이!”
밀런이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것처럼 검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제발 뽑아라! 단칼에 목을 베어 주마!”
“그만! 지금이 서로 싸울 때냐?”
툴린이 버럭 고함을 치자 밀런이 마지못해 손을 풀며 고개를 소리가 나도록 획 돌렸다.
마치 툴린의 말에 양보한 듯한 모습이지만 누구도 밀런이 루트를 향해 검을 뽑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일단은 적을 막는 것부터!”
코퍼의 말에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자신의 자리를 찾아 돌아갔다.
“저희는 어디로 가면 됩니까?”
“화살은 얼마나 남았나?”
“남은 화살은 각각 대여섯 발 정도는 됩니다.”
“좋아! 무너진 성벽 위로 올라가게! 앞으로 돌출되어 있으니 화살로 공격하기는 가장 좋은 곳이야!”
“알겠습니다.”
터그는 곧장 부하들과 함께 무너진 성벽을 향해 달려갔다.
“저들을 믿을 수 있겠나?”
“주인이란 자가 정말 있고 우릴 만나고 싶어 한다면 지금 당장은 배신은 하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저들이 거짓을 말했어도 걱정이고 진실을 말했어도 걱정이군! 차라리 단칼에 목을 치는 건 어떤가?”
“만약 정말 이곳에 주인이 정말 나타난다면 우리 역시 이곳에서 살아 나가지 못 할 겁니다.”
“죽이지도 못한단 말이군!”
코퍼가 얼굴을 찌푸리며 성벽 위로 올라선 터그 일행을 노려보았다.
“어쩔 수 없죠, 지금은 급한 불부터 꺼야 하니….”
카일이 성벽을 향해 다가오는 용병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제가 해야 할 일은 뭡니까?”
“나랑 적장을 만나 봐야지.”
“적장을 말입니까?”
“저들은 지금 왕국을 공격한 적을 도와주고 있어. 아무리 골드를 받고 검을 파는 용병이라도 반역을 도울 리는 없지 않나? 의도를 한번 파악해 봐야지! 아무것도 몰랐다면 의외로 쉽게 해결될 수도 있고.”
“흠… 제가 너무 성급하게 공격을 했나 보군요.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잘했네!”
자책하듯 말하는 카일에게 코퍼가 고개를 저었다.
“저 때문에 수십 명이 죽었습니다. 쉽게 대화에 응하지 않을 겁니다.”
“아니! 그래서 더 대화에 응할 거야! 만약 자네가 공격을 하지 않았다면 내가 먼저 기습을 했을 거야! 처음부터 약세를 보였다면 저들도 대화보단 공격을 우선시했겠지.”
“원한을 쌓았는데도 말입니까?”
“원한보단 목숨이 더 중요하니까! 이미 큰 피해를 본 만큼 생각보다 우리의 전력이 약하지 않다는 걸 알았을 테니 분명 대화에 응할 거야.”
“잘됐으면 좋겠군요.”
“저들도 의뢰자가 왕국을 공격한 자란 사실을 알면 분명 흔들릴 거다.”
“만약 그래도 공격을 감행하려 한다면…!”
“단순한 용병이 아니거나… 우리 모두의 입을 막으려 하겠지. 죽은 자는 말이 없을 테니까!”
“그도… 그렇군요.”
카일이 굳은 얼굴로 다가오는 용병들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코퍼는 어디서 찾아냈는지 긴 막대기에 흰색 천을 매달아 높이 들어 올렸다.
“갈까?”
“좋습니다.”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코퍼와 함께 천천히 성 밖으로 향했다.
* * *
“저길 보십시오.”
젠트가 흰 천을 높이 든 카일과 코퍼를 가리켰다.
“대화를 해 보자는 건가?”
굳은 얼굴의 크루트가 얼굴을 찌푸린 채 말했다. 생각 같아선 당장이라도 달려가 목을 베어 내고 싶지만, 용병들이 보고 있는 이상 무작정 명을 내릴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제가 모시겠습니다.”
쿤토가가 커다란 배틀액스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몸은?”
“포션으로 상처는 모두 아물었습니다.”
쿤토가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려는 듯 커다란 배틀액스를 크게 한 바퀴 휘두르더니 어깨에 척 걸쳤다.
“좋다. 함께 가자!”
크루트가 앞장서서 코퍼와 카일에게로 향했다.
“흠… 낯이 익군. 아무래도 어디서 한번 본 자다. 하지만 남부 용병은 확실히 아니다.”
“흠… 그럼 동부나 중부 용병들 중 하나겠군요. 시간상으론 두 곳이 가장 유력합니다.”
카일의 말에 코퍼도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크루트와 쿤토가 카일과 코퍼의 앞에 도착했다.
“난 크루트다.”
“크루트 용병단!”
코퍼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내 소개는 하지 않아도 되겠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으니! 이쪽은 분대를 이끄는 쿤토다. 아무래도 옆에 있는 녀석은 안면이 있을 거야! 조금 전까지 바로 눈앞에서 봤으니!”
싸늘하게 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크루트와는 달리 쿤토는 당장이라도 카일을 향해 기세를 피워 올리며 어깨에 걸친 배틀액스를 꽉 말아 쥐었다.
“코퍼입니다.”
“큭! 우리의 1개 조원도 안 되는 말단 용병단에게 이 크루트가 농락을 당한 건가? 자네가 코퍼라면 저 어린 녀석은 자네 단원이겠군!”
크루트의 말에는 명백한 조롱과 무시가 깔려 있었다. 이미 작정하고 시비를 걸려는 것 같았다.
“말이…!”
코퍼가 굳은 얼굴로 항의하려 하자 카일이 재빨리 나섰다.
“카일입니다. 보시는 것처럼 코퍼 용병단의 나이 어린 막내입니다. 새벽녘에 대장님의 명으로 잠시 인사차 방문해 선물을 전해 드렸는데… 마음에 드셨는지요.”
카일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물었지만 크루트로서는 결코 웃으며 대답할 수 없었다.
지금 카일은 하급 용병단에서도 막내에 불과한 어린 용병에게 큰 피해를 입은 크루트 용병단을 노골적으로 조롱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린 녀석이 입담이 좋구나!”
“이런, 기분이 나쁘셨다면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카일이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크루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큭큭! 좋아, 잠시 후에도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 두고 보겠다.”
크루트가 카일을 노려보다가 고개를 돌려 코퍼를 바라보았다.
“자!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 볼까? 말하는 걸로 봐서는 항복하려는 것은 아닐 테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지금 의뢰를 맡긴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 아십니까?”
“고작 그런 말을 하려 날 불러낸 것인가?”
“설마 놈들이 트라발트 공작령을 공격한 와이번 나이트란 사실을 알고 있단 말입니까?”
코퍼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설마 크루트가 이 사실을 알고도 의뢰를 맡았을 줄은 그로서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이건 왕국에 대한 반역입니다.”
“그게 무슨 문제가 되지? 어차피 우리가 여기에 있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를 텐데?”
“모두 죽이겠단 말입니까?”
“입이 없으면 새어 나갈 말도 없지! 큭큭.”
크루트의 말에 코퍼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면 이만 돌아갔으면 하는데? 우리가 좀 바빠!”
“훗… 못 봐 주겠군.”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카일이 웃음을 지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며 자연스럽게 코퍼의 앞을 가로막았다.
“뭐?”
갑작스럽게 앞으로 나선 카일의 모습에 크루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우선 저 덩치! 아까부터 기분 나쁘게 쳐다보는데 그러다 모가지 잘린다고 좀 전해 주십시오.”
카일이 쿤토를 비웃듯 내려보며 말에 크루트가 분노한 얼굴로 카일을 향해 소리치려 했지만, 그보다 앞서 쿤토의 배틀액스가 카일을 향해 뻗기 시작했다.
“이놈! 머리를 둘로 쪼개 주마!”
회전하는 몸의 원심력을 최대한 살린 쿤토의 배틀액스가 정확하게 카일의 머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예기치 못한 쿤토의 공격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듯 카일은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배틀액스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카일!”
갑작스런 상황 변화에 당황한 듯 이엘이 큰 소리로 카일을 불렀다. 하지만 정작 시안느나 세인은 그저 담담하게 카일을 바라볼 뿐이었다.
쉬익-
막 카일의 머리 위로 거대한 배틀액스가 떨어지려는 순간 카일의 허리에서 빛살 같은 빠르기로 검이 뽑혀 나오는 동시에 배틀액스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
“크아악!”
쿤토가 고통스런 비명과 함께 팔을 부여잡았다.
“분명 말했잖아! 모가지 잘린다고!”
카일이 싸늘하게 쿤토를 내려다보며 검을 내리그었다.
툭-
고통스러운 듯 비명을 지르던 쿤토의 목이 바닥으로 툭 떨어져 내리는 동시에 커다란 몸이 모로 쓰러졌다.
쿵-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바닥으로 쓰러진 콘토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피가 순식간에 바닥으로 스며들더니 잠시 후 남은 것은 오직 말라비틀어진 쿤토의 시신뿐이었다.
“이런 것이었나?”
카일이 바닥에 덩그러니 남은 콘토의 시신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감히…콘토를!”
순식간에 변해 버린 상황에 잠시 당황한 표정으로 죽은 쿤토와 카일일 멍하니 바라보던 크루트가 분노한 얼굴로 검을 들었다.
“먼저 공격한 건 콘토 입니다만…그리고 지금 그런 눈빛 굉장히 기분이 나쁩니다.”
“뭐라!”
카일의 비아냥거림에 크루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며 당장이라도 카일을 향해 검을 내려칠 듯 높이 들어 올렸다.
“이제 보니 네놈이구나!”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카일을 바라보던 크루트가 소리쳤다.
“절 아십니까?”
“중급 피스트 워리어! 이제 보니 검사였군.”
“흠… 절 찾아온 겁니까?”
“놈들은 보이지 않는 마법 무구를 찾고 있다.”
크루트의 말에 코퍼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카일의 어깨에 메인 라이플로 향했다. 장거리 저격이라면 그들에게는 충분히 보이지 않는 마법 무구로 인식될 수 있었다.
“큭! 역시 너였군!”
크루트는 코퍼의 시선에 어렵지 않게 마법 무구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절 찾는 이유는?”
“나도 모르지!”
크루트가 뒤를 힐끔 쳐다보곤 달려오는 용병들을 확인하더니 곧장 카일을 향해 달려들며 검을 내려쳤다.
쾅-
강한 충격파와 함께 카일과 크루트가 동시에 다섯 걸음 뒤로 물러났지만 두 사람 모두 밀려난 것보다 더 빠르고 강하게 다시 부딪혔다.
꽈앙-
다시 연달아 다섯 걸음을 밀려난 카일이 코퍼를 보며 소리쳤다.
“성으로 피해요!”
카일이 땅을 박차며 달려오는 크루트를 향해 마주 달려들었다.
“이 괴물 같은 놈! 죽어라!”
꽈광-
쾅-
연달아 두 번의 폭음이 일며 카일이 정신없이 뒤로 밀리다 겨우 검을 박아 넣어 멈춰 섰다.
“쿨룩-.”
카일이 거친 기침과 함께 피를 토했다.
“상급… 엑스퍼트!”
카일이 낮게 중얼거렸다.
“피스트… 워리어!”
크루트가 분노한 듯 카일을 노려보며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핏물을 억지로 삼켜 냈다.
검이 부딪히는 순간 카일의 오른손이 빠르게 크루트의 가슴을 때렸다. 급히 어깨를 비틀어 피하긴 했지만 워낙 강맹한 기운이 담겨 온전히 피하지 못하고 그만 내상을 입은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번 대결은 카일이 손해를 보았고 내상도 카일이 더 심했다.
“큭!”
카일이 핏물이 흐르는 입술을 소매로 스윽 닦아 내며 웃음을 흘렸다.
“이러면 안 갈 수가 없는데?”
카일이 점점 회색빛으로 물드는 오러를 보며 입술을 끌어올렸다. 그리고는 크루트를 향해 온 힘을 다해 달려들며 검을 휘둘렀다.
“이놈! 죽여 주마!”
크루트가 달려드는 카일을 향해 분노한 듯 소리쳤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뾰족한 고함이 달의 언덕 위로 넓게 울려 퍼졌다.
“흥! 누구 마음대로! 저 녀석은 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