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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용병라이더-194화 (194/404)

194.피를 먹는 숲2

“단장님!”

북문에서 빠른 속도로 달려온 기사가 급히 말에서 뛰어내려 래쇼트 백작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분께서 막 북문을 통과하셨습니다.”

“드디어 오셨구나!”

그저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백작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

“곧 마차가 보이실 겁니다.”

기사의 말이 끝나기도 래쇼트 자작의 눈에 4명의 호위 기사에 둘러싸인 작은 마차가 천천히 백작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으음….”

마차가 다가올수록 백작의 얼굴은 점점 굳어 갔다. 너무도 작은 마차에 부서질 것같이 낡은 외관과 불품 없는 말까지, 모든 것이 가난한 시골 남작가의 마차임을 명백하게 알려 왔기 때문이다.

그나마 마차에 새겨진 작은 수선화와 그 위에 앉은 작은 거미 문양만이 이 마차의 주인이 자신이 그토록 기다리던 사람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끼익-

낡은 경첩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여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어! 오랜만입니다. 자작… 아니, 백작님!”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든 중년 여기사의 모습에 래쇼트 백작의 얼굴에 잠시 미소가 어렸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반갑다.”

백작의 짧은 대답에 여기사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여전히 얼음덩이구먼! 칫.”

여기사가 물러나자 뒤이어 낡은 밤색 가죽 코트를 걸친 아름다운 여인이 천천히 마차에서 내렸다.

“공주님을 뵙습니다.”

한쪽 무릎을 꿇은 래쇼트 백작이 검을 검집째 뽑아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나의 검과 명예는 모두 공주님께!”

“백작님! 전 더 이상 공주가 아닙니다. 그저 가난한 작은 남작가의 주인일 뿐이에요. 인사는 오히려 제가 드려야죠.”

“신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공주님께서 제 주인인 것만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남작인 제가 어찌!”

이사벨라 남작이 당황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은 백작을 바라보았다.

“주군! 검을 받지 않으면 백작은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을 거예요. 20년 전 그날처럼요.”

“그건….”

20년 전 왕성을 떠날 때도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함께 가길 청했던 젊은 기사 래쇼트의 얼굴이 이사벨라의 눈에 겹쳐 보였다.

“당신은 정말 변하지 않는군요.”

잠시 망설이던 이사벨라가 결국 검을 받아 들었다.

“그대의 헌신에 경의를. 나의 기사 래쇼트, 일어나세요.”

“감사합니다. 공주님!”

래쇼트 백작이 이사벨라가 내민 검을 다시 받아 들며 일어났다.

“고마워요. 제 부탁을 들어줘서!”

“3왕자 저하께서도 공주님을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그보다… 먼저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요.”

“…그분은 여전히 그곳에 계십니까?”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니까요.”

이사벨라가 아련한 표정으로 남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 * *

“헉헉헉-.”

퍽-

적을 죽여야 할 검이 바닥에 박혀 들었다.

지친 용병들이 거친 숨을 내쉬며 검을 지팡이 삼아 힘겹게 정상에 올랐다.

“허… 분지 안에 또 다른 분지가 있다니!”

“젠장! 여기가 끝이 아니야!”

“나, 난 죽여도 더 이상은 못 가!”

탈진한 듯 용병들이 하나둘 바닥에 주저앉았다.

“저… 저기. 놈들이 도주하고 있다!”

막 언덕을 내려선 카일과 터그 일행을 발견한 용병 하나가 크게 소리쳤지만 지친 용병들은 누구 하나 일어설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무리 고강도 훈련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쏟아지는 화살을 피해 거칠고 험악한 산을 뛰어오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어나라! 놈들이 도주하고 있다. 저 녀석들 머리에 백 골드가 걸려 있단 말이다.”

“이놈들 어서 일어나지 못해!”

보다 못한 각 조의 조장들이 널브러져 있는 용병들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며 재촉했지만 이미 지친 용병들의 움직임은 더디기만 했다.

“그만!”

쓰러진 용병들을 재촉하는 조장들을 크루트가 멈춰 세웠다.

“모두 잠시 휴식한다. 가져온 물과 육포로 간단히 식사를 마쳐라!”

크루트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겨우 몸을 일으킨 용병들이 아예 바닥에 대자로 뻗었다. 일부는 크루트의 말처럼 물을 마시거나 육초를 씹었다.

“하지만! 지금 쫓지 않으면 자칫 놈들을 놓칠 수 있습니다.”

“아니! 이미 놈들을 잡기엔 늦었다. 지금은 일단, 체력을 회복하고 병력을 재정비하는 게 먼저야. 어차피 놈들이 갈 곳은 뻔하다.”

크루트가 멀리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망루 탑과 옛 고성의 흔적을 보며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크루트의 싸늘한 눈초리에 조장들이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쿤트는?”

“화살을 다섯 대나 맞았지만, 급히 화살을 제거한 후 포션으로 치료했습니다.”

“아직… 괜찮은 건가?”

“지금까지는 그렇습니다. 어쩌면 엑스퍼트의 항마력 덕분에 마법에 걸리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휴… 그렇다면 다행이겠지만….”

크루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피해가 너무 큽니다. 벌써 사십 명이 넘는 용병이 죽거나 화살을 맞고 뒤에 남겨졌습니다.”

뒤에 남겨진 용병들.

모두 카일과 터그 일행이 쏜 화살에 맞은 용병들이었다. 카일이나 터그 모두 직접 용병의 목숨을 노리기보단 다리를 노려 산을 오르지 못하게 만드는 데 주력했다.

“그들 모두 죽었겠지….”

크루트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피를 먹는 숲은 부상자를 남겨 두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작은 상처로 피가 사라져 가는 고통 속에서 죽어 가는 것보단 어쩌면 단번에 목숨을 잃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었다.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단장님은 최선의 선택을 하신 겁니다.”

“그렇습니다. 명을 받은 이상 우린 뒤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죽은 녀석들에게 최소한의 보상을 해 주는 것뿐입니다.”

“그런가?”

크루트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휴식을 취하는 용병들을 보며 싸늘하고 차가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시작을 했으면 끝을 봐야겠지! 어차피 우리에겐 물러설 길이 없으니.”

크루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발한다. 곧장 고성으로 가겠다.”

* * *

“무사하셨군요.”

카일과 터그가 고성 안으로 들어서자 초조하게 카일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서둘러 달려왔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산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어리둥절한 카일에게 오히려 멀린이 다가와 물었다.

“예에?”

“새벽 짙은 안개 속에서 말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이번엔 툴린까지 나서서 카일을 재촉했다.

“작은 전투가 있었습니다.”

“전투? 공격을 받은 것이냐?”

“아닙니다. 공격은 제기 먼저 했습니다. 숲 안으로 백여 명 정도의 용병단이 들어왔기에 숫자를 줄여 볼 요량으로 제가 기습을 가해 부상자를 다수 만들었습니다.”

“용병단? 그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곧 모습을 볼 수 있을 겁니다. 갑자기 산 중턱부터는 부상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강행 돌파를 시도하기에 그냥 뒤로 물러났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카일이 멀린을 향해 물었다. 하지만 입을 연 건 툴린이었다.

“여기 크레센트 숲, 아무래도 살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야 당연히…!”

“아니!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짜 살아 있다는 말입니다. 누가 이 성과 숲을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여기에 대단위 흑마법을 걸어 놓았습니다.”

멀린이 심각한 얼굴로 거대한 하늘탑을 보며 말했다.

“흑마법!”

“보통의 흑마법이 아니다. 고성뿐 아니라 숲 전역에 걸쳐 흑마법으로 도배를 해 놓았다.”

툴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멀린이 말을 이었다.

“오늘 새벽에 카일 님께서 용병들을 기습한 그때 하늘탑에서부터 급격한 마나의 유동이 감지되었습니다.”

“정확히는 마나의 흡수다.”

“제가 용병들에게 부상을 입힌 것과 관련이 있는 겁니까?”

카일이 잠시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마법의 발동 조건은 바로 피입니다.”

“피…?”

“일전에 제가 말씀드린 마법진을 기억하십니까?”

“설마… 피에서 암흑 마기를 뽑아낼 수 있다고 하셨던 마법진 말입니까? 블러드릭이라고 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바로 그겁니다.”

멀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펼쳐진 마법진이 바로 블러드릭을 변환한 마법진입니다.”

“단순한 마법진이 아니다. 적어도 수천의 인부와 엄청난 골드를 들여 수개월에 걸쳐 만든 거대한 마법진이다.”

“그 말씀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이 정도 규모라면 보통의 영주는 세울 수 없다. 최소한 대영주가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건설했거나 아니면 국가 차원에서 목적을 가지고 건설했다는 말이다.”

“네? 도대체… 왜?”

카일의 말에 툴린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이런 곳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다만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는 어렵지 않게 파악했다.”

“목적을 아셨단 말입니까?”

카일이 깜짝 놀란 듯 물었다.

“혹시 제가 하늘탑에서 한 일을 아십니까?”

“그야 하늘탑을 유지 관리하기 위해 마나를 공급….”

“바로 그겁니다. 하늘탑을 유지하기 위한 마나 공급… 더불어 크레센트 숲과 이곳 달의 언덕과 고성을 보호하고 위한 마법진 입니다.”

“고작 그런 일에 피를 흡수하는 마법진을 만들었단 말입니까?”

너무 단순한 목적의 마법진에 카일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결코 간단하지 않다. 어쩌면 획기적인 발상일 수 있지!”

툴린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네에?”

“크레센트 숲은 에너지의 공급처다. 만약 누군가 대규모로 달의 언덕을 침입했다면 숲이나 산에서 대규모의 접전이 벌어질 거다.”

“그야… 당연히!”

카일 역시 이미 숲과 산 중턱을 막아 적에게 피해를 입혔다.

“비록 피를 통해 마나를 축적하는 사악한 마법진이지만 효율성을 따지면 최고의 선택인 셈이지! 적의 피로 성을 지킬 수 있을 테니까!”

툴린의 말에 카일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피를 흡수해 성을 지킨다는 개념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다.

“그럼… 제가 부상을 입힌 용병들은….”

“모두 죽었을 거다. 블러드릭 마법진은 한번 발동되면 피를 끊임없이 빼앗아 가니까!”

“흠… 그렇군요.”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멀린이 고개를 돌려 터그 일행을 바라보았다. 동시에 코퍼를 비롯한 용병들이 재빨이 터그 일행을 포위했다.

“왜… 그러십니까?”

깜짝 놀란 터그와 부하들이 당황한 듯 주춤 물러났다.

“무슨 짓입니까?”

카일이 갑작스러운 코퍼의 행동에 놀란 듯 소리쳤다.

“이들은 과연 그 사실을 몰랐을까요? 여기서 사냥을 했던 터그와 부하들이라면 모르진 않았을 것 같은데요?”

멀린의 말에 카일이 당황한 듯 주춤 물러났다.

“그건…!”

멀린의 말에 터그의 표정이 곤혹스럽게 변했지만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휴… 맞습니다. 저흰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우릴 속인 겁니까?”

“아닙니다. 말을 하지 않았을 뿐 속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제 주인께서 당신들을 이곳으로 데려오라 명하셨을 뿐입니다.”

“주인?”

“이 고성의 정당한 주인이십니다. 스승님께서 그분께 은혜를 입어 스스로 종이 되길 자청했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역시 스승님의 유지에 따라 그분의 정당한 계승자를 주인으로 받들고 있죠.”

“왜… 우릴 이곳으로 부른 겁니까?”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저희가 알고 있는 건 딱 그 정도뿐입니다.”

터그는 숨기는 것 없이 사실대로 모든 것을 밝혔고 분명 지금까지 거짓말을 한 적도 없었다.

“당신의 주인…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곧 모습을 드러내실 겁니다. 주인께서는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분이십니다.”

터그의 말에 카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치 누군가의 손에 놀아난 듯 기분이 나빴다.

“그 사람이….”

“놈들이다!”

다급한 코퍼의 외침과 함께 멀리서 달려오는 크루트 용병대 모습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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