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피를 먹는 숲1
숲을 가득 메웠던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따스한 햇빛이 스며들며 전날보다 더 아름답고 싱그러운 숲이 드러났다.
“저길 보십시오.”
완만하게 이어지는 산 중턱, 커다란 바위가 앞으로 툭 튀어나온 곳에 십여 명쯤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다니 의외군요.”
“새벽녘에 있었던 기습이 성공한 덕분에 사기가 올랐을 겁니다.”
“그보단 지형을 보게, 바위의 배치가 너무 절묘하지 않나? 마치 누군가 일부러 박아 놓은 듯 아주 절묘해!”
크루트가 가리킨 산 중턱에 형성된 바위 지대는, 매끄럽고 둥근 화강석이 산 중턱 여기저기에 박혀 마치 산 전체가 거대한 성벽을 마주 보는 듯했다.
“좌측 능선을 보십시오. 상대적으로 바위가 낮지 않습니까?”
“흐음…. 확실히 낮긴 하지만 그렇다고 산에 올라가기엔 무리야.”
크루트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이끄는 용병들이 누군지 잊으신 겁니까?”
“젠트, 자네가 이끄는 용병이라면… 아! 투르 공국의 석궁병!”
투르 공국은 척박한 북부 대지에 자리를 잡은 작은 공국이다. 국토 대부분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는 가난한 나라로, 오랫동안 제국의 침입에 맞서 싸우며 단련된 이들은 생계를 위해 용병계에 투신하며 막강한 힘을 발휘했다. 특히 그들이 사용하는 강력한 석궁은 엑스퍼트들도 막기 힘들다 정평이 나기도 했다.
“잠시 석궁병을 잊고 있었군!”
“투르 공국 석궁이라면 강력하기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해볼 만합니다.”
“맞습니다. 거리는 있지만 바위가 돌출되어 있어 충분히 측면을 노릴 수 있을 겁니다.”
“확실히…. 지금 석궁병은 몇 명이나 있지?”
“총 20명입니다.”
“절반을 우측에 배치하고 남은 석궁병은 자네가 이끌고 바위를 오르게!”
“알겠습니다.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쿤토!”
크루트의 부름에 가장 뒤에 있던 커다란 덩치의 쿤토가 거대한 배틀엑스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젠트가 자리를 잡으면 선봉에서 길을 뚫어라!”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쿤토를 선두로 단번에 놈들을 밀어붙이고, 남은 용병들을 일제히 돌격시켜 산 정상까지 단숨에 치고 올라가 점령한다.”
“알겠습니다.”
크루트의 명령에 용병들이 일사불란하게 자리를 잡고 진형을 갖추었다. 젠트 역시 열 명의 석궁벽을 우측 바위 지대에 배치하고, 자신은 남은 용병을 이끌고 숲을 돌아 좌측 능선을 따라 바위로 향했다.
* * *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용병들을 바라보던 카일이 눈썹을 찌푸렸다.
“대장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제법 용병들을 잘 훈련시켰나 봅니다.”
“적들은 숫자도 많고 훈련도 잘된 용병들인데… 저희만으로 막을 수 있겠습니까?”
터그가 잔뜩 긴장된 표정으로 용병들을 바라보았다. 비록 주먹패를 이끌며 싸움터를 전전했지만, 생사가 걸린 대규모 전투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당연히 막을 수 없습니다.”
카일이 터그를 돌아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네…?”
“우리의 목적은 저들을 막는 게 아닙니다. 그저 코퍼 대장이 준비할 수 있게 시간을 조금 더 벌어주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카일은 아래에서 천천히 올라오는 용병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시작된 것 같….”
쉬ㅡ익
카일이 급히 터그의 허리를 잡아당기며 외쳤다.
“모두 피해!”
“으헉!
갑작스러운 카일의 행동에 깜짝 놀란 터그도 당황한 듯 소리를 질렀다.
카일은 터그의 외침에 아랑곳하지 않고 반쯤 안긴 터그와 함께 바닥을 굴렀다.
꽝-
꽝-
엄청난 속도로 날아온 볼트가 카일과 터그는 물론 바위 위에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쏟아져 내렸다.
다행히 카일이 재빨리 소리친 덕분에 피해 없이 몸을 숨겼지만, 당장 올라오는 적들에 대한 공격도 어려워져 버렸다.
카일은 급히 라이플을 풀었다. 그리곤 스코프를 통해 볼트가 날아온 방향을 살폈다.
“거리가 제법 먼데도 정확하게 날아오는군요.”
카일이 얼굴을 찌푸렸다. 여기서 저격을 한다면 어렵지 않게 석궁병들을 처리할 수 있지만, 문제는 탄환이 열 발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래도 여긴 포기해야 할 것 같군요. 바로 두 번째 지점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정도 거리면 활로도 맞출 수 있을 겁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습니다. 우린 최대한 안전하게 시간만 끌면 됩니다.”
터그와 부하들의 실력 정도면 분명 석궁병을 맞출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 활을 쏘려면 몸을 드러내야 한다. 그 사이에 볼트가 날아오면 무방비 상태로 볼트를 맞아야 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굳이 모험할 필요가 카일에게는 없었다.
“아, 알겠습니다.”
터그를 다독인 카일이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크악!”
“아악!”
그때였다.
뒤로 물러나던 카일의 귀에 용병들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들려왔다.
“아무래도 용병들이 함정에 걸려들었나 봅니다.”
화살 한 발 쏴보지 못하고 물러나야 한다는 생각에 침울해 있던 터그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아쉽습니다. 이때 화살을 퍼부었다면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었을 텐데….”
“화살을 쏠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겁니다.”
카일이 터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 * *
카일과 터그가 웃으며 다시 길을 재촉하는 사이, 크루트는 허탈하게 돌아온 쿤트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어떻게 된 것이냐?”
“바닥에 화살촉을 거꾸로 박아 놓았더군요. 선두로 달려가던 녀석들 셋이 걸려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전투는 어려울 겁니다.”
“허! 제대로 전투다운 전투도 하지 못하고 병력만 줄어드는군!”
“죄송합니다.”
“적들은? 어찌 되었나?”
“석궁병 때문인지 모두 도망을 친 것 같습니다.”
“결국 병력만 잃고 허탕을 쳤단 말이군!”
크루트가 주먹을 말아쥐며 얼굴을 일그러트렸지만, 지금으로선 뒤를 쫓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큰일 났습니다!”
“또 무슨 일인가!”
“부… 부상 당한 병사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뭐! 설마 화살촉에 독이 있었나?”
“아닙니다. 화살촉이 아닌 다른 문제 같습니다. 아무래도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설마…!”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불안감에 크루트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가자!”
서둘러 죽은 병사에게로 달려간 크루트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눈앞에 죽어있는 세 명의 용병은 마치 미라처럼 바짝 마른 채 누워있었다.
“…앞서 죽은 녀석들과 같은… 현상인가?”
“그렇습니다. 몸 안에 남아있던 피가 모두 증발한 듯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럼… 결국 그 기분 나쁜 안개 때문이 아니란 말이군!”
“그런 것 같습니다. 제 생각입니다만, 아무래도… 이 숲 전체가 이상한 것 같습니다.”
“…숲이 피를 원한단 말인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크루트가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미라가 되어버린 시체를 바라보았다.
“만약 정말 피를 먹는 숲이라면 한시라도 빨리 숲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그게 가능할 것 같은가? 공작가에서 온 놈들은 이 숲에서 우리 모두가 죽어 나가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놈들이야!”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살아나갈 수 있는 방법은 무조건 놈들을 죽이는 것밖에는 없어!”
“하지만 부상병들이 죽은 사실을 이미 대다수의 용병들이 알았습니다. 자칫 분열이 일어날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하급용병들은 검은 여우가 아닌 평범한 용병일 뿐이었다. 아무리 강한 규율과 엄청난 양의 골드를 들이밀어도, 죽음 앞에서는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 것이다.
“방법은 하나뿐이다. 다른 생각을 못 하도록 정상까지 강행 돌파한다.”
“그리되면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겁니다.”
“그럼 다른 방법이라도 있나?”
크루트의 말에 누구 하나 입을 열 수 없었다.
“각자 병력들 살펴! 규율을 강화하고 불필요한 대화는 금한다. 선두는 여전히 쿤트다! 할 수 있겠지?”
“맡겨 주십시오!”
“지금부터 부상자에 대한 치료나 후송은 없다.”
어차피 포션으로 치료를 한다 해도 죽음을 막지 못한다면, 차라리 작은 틈도 주지 않고 용병들을 몰아붙이는 것이 지금으로선 유일한 방법이었다.
“알겠습니다.”
“전투가 끝나면 이 저주받은 숲을 모두 불태워 버리겠다.”
크루트가 분노한 얼굴로 숲을 바라보았다. 생각 같아선 당장이라도 불을 질러 숲을 태워버리고 싶었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단 사실은 크루트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가자!”
커다란 배틀 엑스를 세운 쿤트를 선두로 용병들이 일제히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좁은 바위산을 단번에 통과한 용병들이 가파른 산 위에 접어드는 순간, 수십 발의 화살이 용병들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커억-.”
“아악!”
화살에 얻어맞은 용병들이 거친 비탈길을 굴러떨어져 내렸다.
“놈들을 죽여라!”
“뒤를 돌아보는 놈은 가만두지 않겠다. 어서 올라라!”
조장들은 물론 중간중간 끼어든 간부들이 선두에서 용병들을 밀어붙이며 산을 올랐다.
* * *
벌써 십여 명이 부상을 입고 떨어져 내렸지만, 용병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뭔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저 녀석들, 피해를 받고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아요.”
커다란 배틀 액스로 몸을 가린 거구의 사내가 이미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아무래도 피해를 감수하고 강행 돌파를 시도하려는 것 같습니다.”
“그럼….”
“일단 성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카일이 얼굴을 찌푸리며 화살에 맞아 쓰러지는 용병들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놈들이 도망간다. 쫓아라!”
“저 녀석들 한 놈당 백 골드를 주겠다. 뒤를 돌아보지 말고 달려라!”
저 멀리서 크루트가 큰소리로 외치며 용병들을 재촉했다.
* * *
“여기가 아킨스 영지인가?”
커다란 레드 와이번에서 훌쩍 뛰어내린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인이 여기저기 파괴된 흔적만 남은 아킨스 영지를 보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래쇼트 단장님!”
젊은 기사가 절도있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래쇼트 백작은 왕실 근위기사로, 현재 제3 기사단 란타나의 단장이자 최상급 엑스퍼트로 왕실을 떠받드는 2개의 검 중 하나였다.
그는 1, 2왕자의 치열한 왕위 계승전에도 왕실 기사단 중 유일하게 중립을 천명하며 국왕과 왕실에 대한 충성만을 강조해온 진정한 기사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그가 직접 남부로 내려온 것이다.
“살아남은 자들은?”
“귀족들 대부분이 죽었고, 영주 일가는 살아남은 사람이 없습니다. 아마도 영지는 다시 왕실에 귀속될 것 같습니다.”
“이곳은 앞으로 3왕자께서 관리하실 것 같으니 그리 알게!”
“아! 그래서… 단장님께서 직접.”
며칠 전 충격적인 소식이 왕국에 널리 퍼졌다. 그동안 중립을 표방하던 래쇼트 자작이 돌연 아무런 기반도 지지 세력도 없는 3왕자를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처음 이 소식을 접한 귀족들은 갑작스러운 래쇼트 백작의 발표에 큰 충격을 받았지만, 곧 수많은 중립 귀족들이 래쇼트 백작을 따라 3왕자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물론 래쇼트 백작과 란타나 기사단이 강하다 해도 그들만으로 3왕자가 다음 대 국왕이 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팽팽한 균형을 이루는 왕권 경쟁에서 강력한 란타나 기사단장의 지지 선언이 차기 국왕 선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거란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