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크루트 용병단2
이른 새벽 부쩍 떨어진 기온 때문인지, 강을 따라 피어오른 뿌연 안개가 숲 안을 가득 채웠다.
“흠…. 생각지도 못한 난관이군!”
산 중턱에서 내려선 카일이 눈앞을 가로막은 두터운 안개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앞을 막아선 안개가 적들의 시선을 가려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카일의 시선 역시 가로막고 있었다.
툭-
그때였다.
누군가 카일의 어깨를 툭 쳤다.
스악-
카일이 몸을 반 바퀴 회전하며 뽑아든 단검이 정확히 상대의 목 앞에서 멈춰 섰다.
“으읍-.”
깜짝 놀란 터그가 뒤늦게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카일의 커다란 손이 그의 입을 재빨리 틀어막으며 손가락을 들어 입을 가리켰다.
“쉿!”
카일의 뜻을 알아챈 터그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 내려왔습니까?”
“안, 안개 때문에… 이동이 어려울 것 같아 길잡이가 되어 드리려 내려왔습니다. 크레센트 숲이라면 눈감고도 길을 찾을 수 있거든요.”
터그가 떨리는 음성으로 목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나타나 저도 모르게 과하게 손을 썼군요.”
“아닙니다. 제가 조금 더 조심했어야 하는데….”
카일의 사과에 터그가 급히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안개가 아주 두터운 것 같은데… 이런 안개가 자주 생깁니까?”
“보셔서 아시겠지만 크레센트 숲은 물이 아주 풍부한 곳이라 그런지 새벽녘이면 자주 두터운 안개가 생기곤 합니다.”
터그의 말에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긴 듯 턱을 쓰다듬었다.
카일은 완전하진 않지만 상급 엑스퍼트에 오른 강자다. 아무리 터그가 레인저 훈련을 받았다고 해도 카일의 감각을 피해 몰래 접근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헌데 터그는 카일의 어깨를 직접 손으로 터치까지 했다. 만약 손이 아니라 검이었다면 카일은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카일뿐만이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넓게 퍼져 접근해 오던 용병들의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던 시카니스까지 터그의 접근은 물론 용병들의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했다.
“이 안개가… 이상하단 말인데….”
무겁게 내려앉은 안개를 보며 카일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딱히 무엇이 문제인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예?”
카일의 중얼거림에 터그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아니…. 혼자 말입니다.”
카일이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 길잡이를 부탁해도 될까요.”
“염려 마십시오.”
터그가 앞장서 안갯속으로 몸을 던지자 카일이 그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카일이 점점 용병들과 거리를 좁혀가고 있을 때, 크루트 역시 앞을 가로막는 안개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전달! 현시점부터 간격을 열 보 이내로 줄인다.”
크루트의 명이 떨어지는 순간 용병들이 빠르게 간격을 좁혀 나가기 시작했다.
“기분 나쁜 안개야.”
“이런 안개는 처음입니다. 마치 물속에 들어온 것처럼 몸이 무겁습니다. 이래선 용병들의 피로감이 급격히 오를 겁니다.”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야!”
“네?”
심각한 얼굴의 크루트가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감각이 둔화된 것 같다.”
“이런…!”
“헉! 그러고 보니…. 부하들의 움직임이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모두 긴장을 늦추지 말도록! 이 숲… 심상치가 않아.”
크루트는 심각하게 굳은 얼굴로 명을 내렸다.
“혹… 마법이 아닐까요? 놈들이 수작을 부린 거라면 함정일 수 있습니다.”
“이 넓은 숲 전체를 안개로 덮을 정도의 마법사가 있었다면 애초에 여기에 갇혀있을 이유가 없다. 아마도 이 숲 전체가 이상한 것 같다.”
크루트가 싸늘한 눈으로 앞을 가로막은 안개를 바라보았다.
“아악!”
그때였다.
갑자기 처절한 비명성이 숲을 가득 메웠다.
“무슨 일이냐!”
크루트가 깜짝 놀라 용병들 사이를 헤치며 급히 소리가 난 방향으로 달려갔다.
“크아악!”
바닥에는 허리에서부터 가슴까지 길게 상처를 입은 용병 하나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 있었다.
“상처는 크지만 서둘러 치료하면 죽지는 않을 겁니다.”
“포션을 먹이고 후방으로 이송시켜라!”
“알겠습니다.”
크루트의 명에 부상 당한 동료를 업은 용병 하나가 급히 뒤로 달려 나갔다.
“어찌 생각하나?”
“보통 솜씨가 아닙니다. 아무리 기습이라지만 단번에 급소를 피해 딱 죽지 않을 만큼만 상처를 입혔습니다.”
“일부러 죽이지 않았다는 말인데…!”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놈입니다.”
“흠…. 몇 명인 것 같나?”
“발자국을 봐선 한 놈입니다.”
“이동 방향은?”
“알 수 없습니다. 마지막에 강하게 도약한 흔적은 남았지만, 안개로 흔적을 쫓을 수가 없습니다.”
“후방으로 빠져나갔을 수도 있다는 말이군.”
“마지막에 찍힌 발자국만 보면, 후방으로 빠져나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으악!”
그때 또 다른 곳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 * *
사일로는 얼마 전 드디어 크루트 용병단의 조장에 올랐다. 십여 세에 말단 하급 용병으로 크루트 용병단에 들어와 10여 년만에 소드유저에 올랐고, 이번이 조장이 되어 처음으로 받은 임무였다.
“젠… 장! 하필.”
아련하게 들려오는 비명성에 사일로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무거우면서도 차갑게 내려앉은 기분 나쁜 안개 속에서 들려오는 처절한 비명성은 본능적으로 사일로의 불안감을 자극했다.
“조장, 왜 그러십니까?”
“아무래도 안 되겠다. 조원들 불러 모아!”
“그… 러다가 다른 사람이 알기라도 하면 어쩌려구요.”
크루트 용병단은 동부 용병단 중에서도 높은 보수로 유명하지만, 그만큼 힘든 훈련과 강도 높은 규율로도 유명하다.
대장의 허락도 없이 진형을 바꿨다간 나중에 큰 곤욕을 치르고 말 것이다.
“지금 규율이 문제가 아니야! 잘못하다간 여기서 다 죽을 수 있어!”
“조장….”
“두 명씩 움직인다. 간격은 다섯 보 이내! 어서 서둘러.”
“아, 알겠습니다.”
사일로의 말에 십 보 간격으로 흩어져 있던 조원들이 빠르게 간격을 좁히기 시작했다.
“휴….”
옆으로 다가선 조원들의 모습에 사일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감이 좋군요.”
창-
“누구냐!”
사일로가 급히 검을 뽑으며 소리를 높였다.
갑작스러운 외침에 용병들이 급히 사일로에게로 모여들었다.
“걱정 마십시오. 죽이진 않을 테니.”
카일이 단검을 뽑아 들며 곧장 용병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적이다!”
“포위망을 좁혀!”
사일로는 카일이 빠르게 다가서자 급히 앞을 막아서며 힘껏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카일을 공격하겠다기보다는 시간을 벌려는 의도가 다분히 깔려 있었다.
하지만 카일은 오히려 속도를 높여 슬라이딩을 하듯 미끄러지며 검을 피했다. 동시에 단검을 휘둘러 사일로의 허벅지를 길게 가르며 지나갔다.
“아악-.”
사일로가 비명과 함께 쓰러지는 것과 함께 카일이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조원들 사이로 떨어져 내렸다.
“으악-!”
“아악!”
카일의 단검이 빠르게 움직이며 조원들을 스치며 지나가자, 조원들이 비명을 지르며 순식간에 쓰러져나가기 시작했다.
“저기다.”
“포위해!”
“잡아!”
용병들이 빠르게 카일의 주변으로 몰려들자, 카일은 곧장 공중으로 뛰어 안개 속으로 몸을 감춘 뒤 나무를 타고 조심스럽게 터그에게로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카일의 몸 여기저기에 남아 있는 혈흔에 터그가 깜짝 놀라 물었다.
“제 피가 아닙니다.”
카일이 고개를 저으며 아쉬운 듯 안개 속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이런 방법은 통하지 않을 것 같군요. 간격이 너무 좁아져 자칫 포위될 뻔했습니다.”
“그럼… 이제 돌아가는 겁니까?”
“안개도 서서히 옅어지고 감각도 조금씩 돌아오고 있습니다. 더 이상 숲에서 기습을 하긴 어려우니 돌아가야겠죠.”
카일의 말에 터그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게 있습니다.”
“네…. 말씀하시죠.”
“처음 기습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아무도 죽은 사람이 없더군요? 분명 죽일 수 있었던 것 같은데요.”
“때론 죽이는 것보다 부상을 입히는 것이 더 효과적일 때가 있습니다.”
“네?”
터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부상을 당한 병사가 있습니다. 치료를 하면 전투에는 참가하지 못해도 반드시 살릴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야 당연히 치료를 할 겁니다.”
“치료를 했으면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지켜줄 사람이 필요하겠군요.”
“그야 당연히… 아!”
카일의 말을 이해한 터그가 탄성을 터트렸다.
부상을 당한 병사를 옮기고 지키려면 최소한 한 명 이상이 전력에서 이탈할 수밖에는 없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병사 하나를 죽이는 것보다 더 많은 전력이 이탈하게 되는 것이다.
“부상 당한 병사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전력이 약화될 수밖에는 없으니, 지휘관으로서는 그만큼 부담스럽겠죠.”
“만약 지휘관이 부상 당한 병사를 치료하지 않으면 어찌 됩니까?”
“그럼 병사들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지고, 전투에 집중할 수 없을 겁니다. 자신도 부상을 당하면 언젠가 버려질 걸 알 텐데 누가 최선을 다해 전투에 임하겠습니까? 게다가, 지금처럼 주변을 확인할 수 없을 때는 부상자를 늘리는 것에 또 다른 이점이 있죠.”
“병력의 수를 줄이는 것 말고 말입니까?”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앞을 볼 수 없게 되면 사람들은 시각보단 청각에 의지하게 되죠. 그런 상황에서 동료의 비명을 들었습니다. 어떨 것 같습니까?”
“그야 당연히… 공포심이 일겠군요.”
“단순히 공포심만이 아니죠. 언제 어느 때 안개 속에서 적이 튀어나올지 모르니 바짝 긴장할 수밖에는 없을 겁니다. 그럼 몸이 굳고, 그만큼 용병들이 받는 부담도 늘어날 겁니다.”
“아! 대단합니다. 단순히 부상을 입힌 것 하나에 그런 여러 이유가 숨어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카일 님은 아직 나이가 많지 않다고 들었는데, 이런 것은 도대체 어떻게 알고 계신 겁니까?”
터그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카일이 나이 많은 용병이었다면 당연히 수많은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겠지만, 카일은 덩치만 컸지 나이는 터그보다 한참 아래였다. 당연히 카일에게 이런 사실을 알려주고 훈련을 시킨 사람이 있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그건….”
“아! 제가 괜한 질문을 드렸나 보군요.”
잠시 망설이는 카일을 보여 터그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카일이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제 부친뿐 아니라 조부께서도 용병으로 오랫동안 활동하셨다 보니 어려서부터 제법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카일은 결국 삼대째 내려오는 용병 가문이란 전가의 보도를 꺼내 들었다. 용병으로 삼대를 이어 왔다면 그만큼 많은 경험과 그들만의 노하우가 전해져 오기 마련이었다.
“아! 용병 가문이셨군요.”
“아직 가문이라고 부르긴 미약합니다. 그보다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으니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잠시만!”
터그가 웃으며 주머니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카일 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건 화살촉이 아닙니까?”
카일도 오크랜드로 향할 때면 화살촉을 가져가 그때그때 화살을 만들어 사용해 왔기 때문에 상당히 익숙한 물건이었다.
“이걸로 작은 함정을 만들면 어떻겠습니까?”
“함정, 아! 정말 좋은 생각입니다.”
“그렇게 말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럴 때가 아니군요. 안개가 사라지기 전에 서둘러야겠습니다.”
카일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터그도 급히 따라 일어났다.
“길은 제가 잡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터그가 다시 앞서 달려가자 그 뒤를 카일이 빠르게 뒤쫓았다.
* * *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냐?”
“부상을 당했던 하급 용병들이 죽었습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죽다니?”
“아무래도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좋다. 내가 직접 가겠다.”
크루트가 급히 부상자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이게 대체…!”
크루트가 창백한 얼굴로 죽어있는 부상자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살아 비명을 지르던 부상자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온몸이 말라붙은 다섯 구의 미라만이 눈앞에 놓여 있었다.
“몸 안에 피 한 방울 남아 있지 않습니다. 마치… 어딘가로 모두 빨려 나간 것처럼 말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최대한 비밀을 감추려 노력하고 있지만, 이미 부상병들이 죽은 모습을 본 병사들이 제법 됩니다.”
“흠…. 일단 최대한 비밀로 하고, 죽은 사체는 이곳에 묻어 흔적을 지우게!”
“비밀로 하실 생각입니까?”
“괜히 알려지면 사기만 떨어질 뿐이야!”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