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달의 언덕1
“그럼 서둘러 이곳을 빠져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와이번 나이트들이 몰려들면 몸을 피하기도 어려울 거예요.”
시안느의 걱정스러운 말에 이엘이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증원군이 오더라도 와이번 나이트는 없을 거라 생각해요.”
“지금은 시간 싸움입니다. 빠르게 목적을 달성한 뒤 몸을 피하려면 지상전력보단 와이번 나이트가 더 유리할 것 같습니다만?”
“이곳처럼 높은 나무와 넓은 숲이 형성된 곳에서 와이번의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어요. 결국 지상에서밖에는 싸울 수 없다는 말이에요. 이런 곳에 와이번 나이트를 투입했다간… 비효율적이죠.”
“확실히 이런 곳에선 와이번 나이트보단 지상전력을 보내는 게 더 효율적이긴 하지.”
하늘 위로 높게 뻗은 나무들을 보며 워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저들에겐 화염의 스피어가 있잖아요. 오히려 화공으로 우릴 곤란하게 만들 수 있어요.”
“아니! 저들은 이곳에 폭격을 감행할 수 없습니다. 그랬다간 왕국의 추적대에게 자신들의 위치만 노출될 테니까요.”
“맞아요. 더구나 이곳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고립된 지형이죠. 지상 전력만 투입해도 은밀하게 우릴 공격할 수 있어요. 무모하게 자신들을 드러낼 필요가 없겠죠.”
“확실히 증원군이 온다면 지상 전력일 가능성이 높은 건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몰려올 적들의 전력이다.”
워드의 우려는 당연한 것이었다. 상대는 트라발트 공작령을 공격할 정도로 강대한 세력을 가진 조직이었다.
“일단 대책을 세우기 전 이곳을 빠져나갈 다른 길이 있는지부터 알아봐야겠습니다.”
카일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을 빠져나갈 길이 없다면 어쩔 생각이지?”
카일의 옆으로 다가온 워드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은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최후의 순간도 미리 생각해 놓아야 할 것 같다.”
“…어려운 질문이군요.”
“아무리 어려워도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있다. 넌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으니까.”
워드의 말에 카일이 얼굴을 잠시 찌푸렸지만 그렇다고 워드의 말이 틀렸다곤 볼 수 없었다.
“여길 빠져나갈 생각이라면 한 사람 정도는 골드 와이번에 태워 빠져나갈 수 있다.”
“누굴 데려가실지 정하신 겁니까?”
카일의 물음에 워드의 시선이 다른 무리와 어울리지 못하고 떨어져 앉아 있는 루트에게로 향했다. 보기엔 그저 한가로이 앉아 휴식을 취하는 것처럼 보여도, 앉은 위치와 자세를 보아, 눈을 감고 앉아 와이번과 대화에 집중하는 세인을 보호하기 위함임을 알 수 있었다.
“루트를 데려가겠다. 그는 이미 세인 경이나 툴린 마법사를 따르고 있으니 이미 우리 일행이나 다름없다. 다른 사람들은 각자의 무리가 있어, 누구 한 사람만을 데려가긴 힘들다.”
“좋습니다. 그럼… 다른 분들에겐 제가 귀띔을 해 놓겠습니다.”
“루트에겐 내가 미리 말해 놓겠다.”
“알겠습니다.”
워드가 고개를 끄덕이는 카일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화를 내지 않는구나?”
“네?”
“난 지금 함께한 일행을 두고 우리만 살기 위해 비겁하게 도망을 치자고 말하고 있다.”
카일이 워드의 말에 잠시 얼굴이 굳었지만 이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모두를 구하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우선순위를 둘 수밖에는 없겠죠.”
“솔직하군.”
“현실이니까요. 전 귀족도, 기사도 아니죠. 그렇다고 영웅이 되어 사람들을 구하겠단 생각은 더더욱 없어요. 그저 용병이 되어 대륙을 돌아보겠단 마음으로 세상 밖으로 나온 용병 지망생일 뿐입니다.”
“용병 지망생?”
“아킨스 자작령에서 용병등록을 하려 했는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아직 하지 못했거든요. 그러니 아직은 용병 지망생일 뿐이죠.”
카일이 웃음을 지으며 멀리 용병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터그에게로 향했다.
* * *
“…지금 이걸 나에게 주겠단 말인가?”
힐튼 남작이 자신의 앞에 놓인 붉은 보석을 보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전 필요 없는 물건이니 남작님께 드리는 것이 맞겠지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걸 내가 어떻게 받는단 말인가?”
힐튼 남작이 고개를 저으며 탁자 위에 놓인 붉은 보석을 밀어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만큼은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곳엔 이걸 소유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보일은 탁자 위에 놓인 붉은 보석을 다시 힐튼 남작에게 밀어냈다. 이 보석은 얼마 전 습격해온 검은 여우에게서 얻은 물건이었다.
“자네가 있지 않나? 자넨 이미 상급 엑스퍼트야, 얼마든지 이 보석의 주인이 될 수 있어, 왜 이런 기회를 마다하는 것인가?”
“전 고작해야 남부 구석진 마을의 자경 대장일 뿐입니다. 이건 저 같은 사람에겐 과분한 물건입니다.”
“자네의 아들도 이미 마을을 떠났네! 굳이 샤론 마을에 집착할 이유가 있겠나? 이 붉은 보석의 주인만 되면 작위는 물론 영지를 가진 영주가 될 수 있네! 왜 이런 기회를 마다하려 하나?”
힐튼 남작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전 샤론 마을을 떠날 생각이 없으니까요. 더구나 귀족위나 영지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답니다. 그냥 지금처럼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오크랜드를 오가며 살고 싶을 뿐입니다.”
“허허! 자넨 정말 욕심이란 게 없나?”
“그럴 리가요. 저도 사람인데 욕심이 없겠습니까? 다만 이 붉은 보석은 저보단 남작님께서 더 필요하실 것 같아 넘겨 드리는 겁니다. 남작님께서는 다시 세상 밖으로 나가셔야 하니까요.”
보일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남작에게 말했다.
“휴…. 정말! 자네 부자의 생각은 알 수가 없군!”
힐튼 남작은 긴 한숨을 내쉬면서도 떨리는 눈으로 손을 뻗어 붉은 보석을 쥐었다.
“겉을 감싸는 수정을 깨면 봉인이 풀어질 겁니다.”
“내게… 레드 와이번과 맹약을 맺을 수 있는 기회가 오다니….”
보석을 손에 쥔 힐튼 남작을 보며 보일의 얼굴에 잠시 아쉬움이 스쳐 지났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맹약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주변에 사람, 특히 엑스퍼트가 없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제 생각입니다만 잠시 오크랜드에 다녀오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다리가 나을 때쯤이면 고원도 안정을 찾을 겁니다. 그땐 제가 직접 길잡이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고맙네…. 정말 고마워…!”
“그럼 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마침 중요한 일이 있어 서둘러 가봐야 할 것 같거든요.”
보일은 붉은 보석에 시선을 빼앗긴 힐튼 남작을 뒤로하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남작의 방을 벗어났다.
“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보일이 긴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사실 보일도 레드와이번과 맹약을 맺고 싶은 욕심이 없지는 않았다. 처음 붉은 보석을 손에 쥐었을 때는 맹약을 맺을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이 녀석이 있는데 다른 녀석과 맹약을 맺을수는 없지!”
보일이 눈앞에 놓인 상자를 열자 은빛 털가죽이 모습을 드러냈다. 빛에 따라 아름다운 푸른 빛을 발하는 털가죽의 정체는 바로 블루베어의 가죽이었다.
“휴…. 이 녀석! 이런 짐덩이를 나한테 떠넘기다니…. 망할 녀석 같으니라고!”
보일이 장난스럽게 웃는 카일의 얼굴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블루베어의 가죽을 벗겨내자 순백의 커다란 알이 모습을 드러냈다.
카일은 마을을 떠나기 전 보일에게 알을 맡겼다. 어차피 마을을 떠나야 하는 카일이 화이트 와이번의 알을 가지고 다니며 지속적으로 마나를 주입할 수도 없었고, 이미 블랙 와이번과 맹약을 맺은 이상 새롭게 화이트 와이번과 맹약을 맺을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웅-
보일은 맹약석을 손에 쥐었다. 맹약석은 원래 힐튼 남작이 알을 추적하기 위해 가지고 있던 것을 카일이 오크랜드에서 취득한 것이다.
웅웅-
보일이 오러를 끌어 올리자 오러는 순식간에 맹약석으로 흡수되었다가 은은한 푸른 빛과 함께 알을 부드럽게 감싸며 내부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잡아먹는 오러의 양이 상당하군!”
보일이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알을 쓰다듬었다.
알에 밀어 넣는 오러의 양이 점점 많아지더니 지금에 와선 상급 엑스퍼트인 보일이 느끼기에도 당황스러울 만큼 엄청난 오러가 알에게로 흘러들고 있었다. 다행히 아직은 상급 엑스퍼트를 부담스럽게 할 정도의 오러는 아니지만, 만만치 않은 오러가 소모되고 있는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물론 이런 현상이 보일에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오러의 소모량이 지속적으로 많아지고 빨라지는 것에 비례해, 보충되는 오러의 속도도 점점 빨라지고 양도 늘고 있기 때문이었다.
오러가 더 이상 알속으로 스며들지 않자, 보일이 알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다시 털가죽으로 소중하게 감싸려는 순간.
쩌억-
화이트 와이번의 알에서 미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응?”
보일의 시선이 미세하게 금이 간 화이트 와이번의 알에게로 향했다.
* * *
터그 일행은 멀지 않은 곳에서 코퍼 용병대와 함께 있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카일이 다가오자 터그의 옆에 앉아 이야기를 주고받던 브린과 버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야투의 옆에 있던 아덱 역시 카일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비록 지난 일에 대해 용서를 받았지만, 아직도 그들의 기억속엔 단칼에 늪지 트롤을 베어넘기던 카일의 모습이 강렬하게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아! 일어나셨군요. 몸은 괜찮으십니까?”
터그가 급히 일어나 카일에게 다가서다 잠시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누워 있을 때도 크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막상 서 있는 카일의 모습은 앳된 얼굴과는 달리 상당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도와주신 덕분에 괜찮아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이쿠! 감사는요. 당치도 않습니다.”
터그가 두 손을 흔들었다.
“이곳 크레센트 숲에 대해 물어볼 것이 있어 왔습니다.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카일의 말에 한쪽에 앉아 있던 코퍼가 고개를 들어 카일을 바라보았다.
“잘됐군! 마침 우리도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을 의논하고 있었다. 함께 대화를 나눠 보는 것이 어떠냐?”
“전 좋습니다.”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 터그와 대화를 나눠 보니, 크레센트 숲을 드나들 수 있는 곳은 총 3곳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모두 드러난 곳이라 아마 저들도 대비하고 있을 거다.”
코퍼 역시 이곳을 은밀하게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아래를 보면 숲을 가로지르는 제법 큰 강이 있습니다. 강을 통해 빠져나가는 건 어떨까요? 나무를 잘라 뗏목을 만들거나 통나무에 의지해 어둠을 틈타 물살에 의지해 빠져나갈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상류 쪽은 물살이 거칠고 빠를 뿐 아니라 강변이 모두 절벽입니다. 강변으로 내려가기도 힘들 겁니다. 바위도 상당히 많고요. 결국 하류까지 내려가야 하는데….”
“그전에 발각당할 수도 있겠군요.”
“맞습니다.”
“그럼 뒷쪽 산을 넘어가는 건 어떨까요?”
“산 쪽은 강보다 더 위험합니다. 보기엔 완만하고 낮은 산처럼 보이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급경사가 지속 됩니다. 설령 정상에 오른다고 해도 산 뒤쪽은 깎아지는 절벽지대라 내려갈 길이 없습니다.”
터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결국 은밀하게 빠져나갈 길은 없다는 말이군요.”
“지금으로선 정면을 뚫고 나가거나 방어에 전념하며 시간을 끄는 방법뿐이라고 생각한다.”
“이곳에 방어하기에 적당한 곳이 있을까요?”
카일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터그에게로 향했다.
“…방어하기 좋은 지형이 어떤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나는 곳은 한 곳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가끔 말씀하시던 곳인데….”
“그곳이 어딥니까?”
“이 뒤쪽으로 넘어가면 달의 언덕이란 작은 분지가 나옵니다.”
“분지 안에 또 다른 분지가 있단 말입니까?”
이곳이 초승달 형태의 특이한 지형인 건 알았지만, 분지 안쪽에 또 다른 분지가 감춰져 있을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도 못 했다.
“네! 그곳에 오래된 고성이 하나 있습니다. 워낙 오래된 고성이라 여기저기 무너지긴 했지만, 아직 일부 성벽이 남아있습니다.”
“고성?”
“이곳에 성이 있다고?”
사람들이 놀란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고성이 있다는 말은 오래전 이곳을 다스리던 귀족 가문이 있었다는 뜻임과 동시에 가문 전체가 멸문해 버려졌다는 말과도 같았다.
“이 산만 넘으면 분지 안쪽에 세워진 고성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카일이 코퍼를 보며 물었다.
“무너진 성을 봐야겠지만, 성벽이 일부라도 남아 있다면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방어할 생각이라면 고성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좋습니다. 그럼 바로 움직이시죠. 일단 성벽부터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던 순간, 급히 머리를 옆으로 틀었다.
쉬익-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린 지팡이가 다시 횡으로 그어졌다.
탁-
카일은 팔을 들어 가볍게 지팡이를 쳐내며 천천히 일어나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