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187화 (187/404)

187.크레센트 숲

“죽고 싶다면… 죽여주지!”

얼굴을 찌푸린 베인 자작이 다시 검을 뽑아 들었지만 그렇다고 십호를 죽일 수는 없다. 여기서 십호를 죽인다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처하고 말 것이다.

“큭! 죽일 수 있다면”

십호가 베인 자작을 향해 곧장 달려들며 주먹을 뻗었다.

검과 주먹이 부딪히는 순간, 베인 자작의 검집에 맞아 기절한 듯 미동도 없던 거구의 사내가 갑자기 튕기듯 일어나 베인 자작을 향해 또다시 몸통 박치기를 시도했다.

“이 괴물 같은 녀석!”

이번엔 정말 당황했는지 베인 자작이 멈칫 멈춰 서며 몸을 틀어 피했다.생사를 건 대결에서 한순간의 판단이 승패를 가를 수도 있었다. 순간적이지만 집중력이 흐트러진다면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몸을 틀었지만 갑작스러운 공격이라 완전히 피하지 못한 베인 자작에게 십호의 주먹이 짓쳐들어왔다.

꽈아앙-

쿵웅-

우당탕-

사나운 충격파가 사방으로 번지며 십호와 거구의 사내가 뒤로 퉁겨져 나갔다.

몸 안의 오러를 모두 검에 집중해 오러 임펄스를 시전한 것이다.

“콜록콜록, 우웩”

베인 자작이 고개를 숙여 거친 기침과 함께 연거푸 피를 토했다.

“젠장……!”

고개를 든 베인 자작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얼굴을 찡그렸다.

“이건… 버려야겠군.”

여기저기 금이 가버린 정든 검을 아쉬운 듯 바라보던 베인 자작이 바닥에 쓰러진 십호와 거구의 사내에게 다가갔다.

오러의 충격파가 뿜어져 나오는 순간, 거구의 사내가 십호의 앞을 막아선 덕분에 십호에겐 큰 상처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앞을 막아선 사내는 충격파로 처참하게 쓰러져 있었다.

“정말 괴물이군! 아직 죽지 않았다니…!”

베인 자작의 말처럼 거구의 사내는 아직 살아 몸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도저히 보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쿨록- 커헉!”

베인 자작이 또다시 격한 기침을 내뱉으며 피를 토했다.

오러 임펄스는 대단히 강력한 검공이지만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바로 오러의 충격파가 적뿐만 아니라 자신에게까지 피해를 준다는 것이다. 때문에 오러 임펄스를 시전할 때는 반드시 내부로 들어온 충격파를 해소할 정도의 오러는 남겨놓아야 했다.

그러나 이번엔 워낙 급작스럽게 기습을 받아 전력을 끌어 올렸기에, 베인 자작도 서 있기 힘들 정도로 큰 내상을 입었다.

“꼴이 말이 아니군.”

베인 자작이 힘겹게 몸을 돌렸다. 아마도 한동안 조용한 곳에서 내상을 치료하며 안정을 취해야 할 것 같았다.

꽝-

베인 자작이 성을 벗어난 순간, 지하로 내려가는 문이 터져나가며 경매장 안으로 거구의 사내가 들어섰다.

철컹철컹-

검은 광택을 뿜어내는 갑주를 입은 사내의 뒤를 따라, 요사스러운 붉은 보석이 박힌 지팡이를 든 검은 로브의 여인이 들어와 바닥에 쓰러진 거구의 사내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완전히 망가졌네…! 이건, 다시 만들려면 좀 힘든데….”

검은 음영 속에서 흘러나온 짜증 섞인 말과는 달리, 그녀의 목소리만큼은 맑고 아름다웠다.

“십호… 는 아직… 살아있다.”

“다행이네요. 저 녀석까지 죽었으면 좀 슬펐을 뻔했는데… 일단 둘 다 데려가죠.”

“도망간… 놈, 죽인다.”

“아직… 우리가 드러날 때는 아니에요.”

“그… 냥 놓아준다?”

“그럴 리가…. 우릴 건드린 대가는 반드시 받아낼 거예요.”

검은 로브가 밝게 웃었다.

“그보다… 그… 사람을 찾는 게 먼저예요. 그 사람만 찾으면….”

* * *

“지형이 상당히 특이하군요.”

이엘이 서 있는 곳은 숲 중앙에 위치한 높은 산으로, 숲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었다.

“제가 보기엔 그냥 다른 숲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데요?”

시안느가 이엘을 따라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크레센트 숲은 뒤로는 높은 산이 초승달 형태로 분지를 감싸고 있고, 강 쪽으로 완만하게 경사져 내려오고 있어요. 더구나 강 앞쪽으로도 낮은 구릉이 강을 따라 이어지고 있는 게 보일 거예요.”

이엘이 강을 따라 손가락으로 구릉지대를 가리켰다.

“어… 그러고 보니… 마치….”

“성벽 같지 않나요.”

“정말 그렇군요. 강을 따라 형성된 구릉이 성벽처럼 분지를 보호하고 있어요. 마치 누군가 일부러 만들어낸 지형처럼요.”

“맞아요. 왜 지금까지 이런 곳을 아무도 몰랐을까요. 이런 곳에 성을 쌓으면 난공불락의 요새를 만들 수 있을 텐데.”

이엘이 아쉬운 듯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젊은 아가씨가 아주 똑똑하군!”

툴린이 지팡이를 짚으며 이엘의 옆으로 다가와 숲을 내려다 보며 말했다.

“과연 지금까지 이곳을 누구도 몰랐을까?”

“무슨 말씀이세요?”

“전대의 아킨스 자작은 사냥을 아주 좋아해 기사들과 함께 이곳을 자주 찾았어. 과연 그들 중 누구도 이곳 지형에 대해 몰랐을까?”

“그럼… 전대 영주는 이곳이 천혜의 요새란 사실을 알았단 말인가요?”

“아마도…. 지금의 영주도 알고 있었을지 모르지. 사냥을 극도로 싫어한단 명분으로 이곳을 방치한 것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길 바라서였는지도 모르지.”

툴린의 말에 이엘이 이해할 수 없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굳이 방치까지 하며 숨길 필요가 있었을까요?”

이엘이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지형을 알고 지세를 안다고 성을 쌓을 수는 없지. 일단 성을 쌓을 골드도 있어야 하고, 주변 영지의 견제도 피해야 하거든!”

“아킨스 자작을 견제할 영지가 있을까요? 남부에서 아킨스 자작령을 상대할 영지는 다핸 남작가가 유일하잖아요.”

시안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야 남부만 두고 볼 때의 이야기지. 만약 중부와 동부를 생각한다면 전혀 이야기가 달라! 여기 크레센트 숲은 중부와 동부를 가르는 경계에 위치해 있어. 이곳에 철옹성이 버티고 있다면 과연 그들이 보기에 어떨 것 같나?”

“아마도… 상당히 불편해하겠군요.”

이엘이 툴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터크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와! 단번에 이곳 지형을 알아보시다니… 정말 대단하세요. 전 이곳을 수십 번 둘러보았지만, 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기 전까진 이곳이 그렇게 대단한 지형인지는 알지 못했거든요.”

터크는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빈민가 출신의 평민일 뿐이었다. 아무런 군사적 지식이 없는 터크에게 이곳은 그저 사냥하기 좋은 넓은 사냥터일 뿐이었다. 이곳 지형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것도 사냥을 배우며 스승에게 들어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을 뿐 크게 신경을 써본 적이 없었다.

“스승님이 계셨나요?”

이엘이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사실 이들이 숲에서 움직이는 모습은 대단히 놀라울 정도로 뛰어났다. 마치 전문적인 레인저 훈련을 받은 정예병처럼 움직임이 날렵하고 거침이 없었다.

“아… 네.”

터크가 다소 침울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몇 해 전 돌아가신 스승님께서는 원래 이곳 크레센트 숲을 지키는 사냥터지기였습니다. 전 그분께 사냥법과 함께 숲에서 걷는 법, 뛰는 법, 숨는 법 등 숲에서 생존하는 여러 방법을 배웠습니다.”

“혹 스승님이 서부 맨피스 왕국 사람이 아닌가요?”

“어… 그걸 어떻게….”

터크가 깜짝 놀란 얼굴로 이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터크의 말에 놀란 사람은 용병들이었다.

“숲의 전사!”

코퍼가 터크를 보며 소리쳤다.

“숲의… 전사가 뭡니까?”

하지만 정작 터크가 의아한 얼굴로 코퍼를 보며 물었다.

“자네 스승님이 말해주지 않았나?”

“사실 서부에 맴피스란 왕국이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스승님께서 왕국의 북부가 고향이라 말씀해 주셔서 겨우 알았을 뿐이죠.”

터크가 부끄러운지 붉어진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숲의 전사는 맴피스 왕국의 북부에 위치한 험준한 칸델 산맥을 지키는 레인저들을 지칭하는 말이에요.”

맴피스 왕국은 오래전부터 험준한 칸델 산맥에 정예 레인저를 배치해 야만족인 아스턴 왕국을 막아왔다.

“레인저라면…?”

이엘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터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기습, 정찰을 포함해 특수한 훈련을 받은 정예 병사들을 말해요. 그중에서도 칸델 산맥을 지키는 레인저는 숲에서만큼은 당해낼 자가 없다고 알려져 있어요. 서너 명만 모이면 엑스퍼트도 상대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아가씨께서는 모르는 게 없으시군요.”

“저도 오래전 책에서 잠시 읽었던 적이 있을 뿐이에요.”

이엘이 코퍼의 물음에 대충 얼버무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렇습니까?”

코퍼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책은 대단히 귀할 뿐 아니라 비싼 물건이다. 촌구석 작은 영지의 자유민 어린 소녀가 구해 읽는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숲의 전사나 레인저처럼 군사적인 내용이 기록된 책은 귀족이 아니라면 더더욱 구하기 어려웠다.

“스승님께서… 그, 숲의 전사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자네들 움직임은 일반적인 사냥꾼과는 달라. 빠르고 민첩할 뿐 아니라 조직적이지.”

“마치… 레인저들처럼 말입니까? 하지만 저희들이 배운 건 동물을 찾고, 덫을 넣고, 활을 쏘는 것뿐입니다. 아무리 사냥을 잘한다고 해도 엑스퍼트를 상대할 수는 없습니다.”

“자네 스승은 레인저 훈련을 시키면서도 무기술은 가르치지 않았나 보군.”

코퍼 역시 왜 무기술을 가르치지 않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아마 가르치고 싶어도 가르칠 수 없었을 거예요. 숲의 전사들은 특수하게 제작된 무기를 사용한다고 알고 있어요.”

“특수한 무기라…. 들어본 적이 없군요.”

코퍼의 말에 이엘도 고개를 저었다. 이엘도 특수한 무기를 사용한다는 사실만 알았을 뿐 어떤 무기를 사용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특수한 무기라면, 저 녀석이 가지고 있는 무기가 더 특수한 것 같은데?”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밀런이 한쪽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고 있는 카일을 보며 말했다.

카일이 가진 아티팩트는 무려 두 명의 와이번 나이트를 장거리에서 정밀하게 타격해 죽일 정도로 대단한 무기였다.

“저런 아티팩트만 있다면 세상에 무서울 게 없을 거야. 가격도 아마 엄청나겠지?”

밀런이 탐욕스러운 눈으로 카일의 무릎에 놓인 라이플을 바라보았다.

“탐내지 말아야 할 물건을 탐내다간 언제나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게 빠르든… 느리든 말이야.”

“큭큭, 어디 남의 물건을 노리다 된통 당한 경험이라도 있나 보군! 말 속에 감정이 담겨있어.”

장난스럽게 내뱉은 밀런의 말에 코퍼를 비롯한 용병대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왜들 정색하고 난리야? 그냥 장난이야! 장난.”

밀런이 급격하게 차가워진 코퍼와 용병대의 눈빛에 손을 흔들며 도망치듯 사라져 버렸다.

“말을 해도 정곡을 찌르는군…!”

버크가 멀어져가는 밀런을 보며 투덜거렸다.

“사실 욕심이 나는 것도 사실이긴 하지.”

“뭐?”

“아니, 사실이 그렇잖아. 저런 거 하나만 있으면 몬스터 사냥하는 건 일도 아니잖아?”

“얼마 전에 그 난리를 치고 또 그런 소릴 하냐!”

버크가 사납게 브린을 쏘아보며 말했다. 버크뿐 아니라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덱과 야튜의 눈빛도 덩달아 사나워졌다.

“아니…. 욕심이 난다는 거지 훔치겠다는 게 아니잖아? 말도 못 하냐? 말이 그렇다는 거야!”

브린이 주변에서 쏟아지는 사나운 눈초리를 피해 몸을 움츠렸다. 사실 브린을 향해 핀잔을 주긴 했지만 다른 용병들 역시 카일의 무릎에 놓인 라이플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만큼은 피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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