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추궁
“크크크, 그래! 그래야지, 내가 이걸 보기 위해 여기까지 왔단 말이야!”
꽝-
까마귀 사내가 검을 들어 십호의 주먹을 막았다. 하지만 까마귀 사내를 노리는 사람이 십호만은 아니었다. 뒤로 밀려났던 거구의 사내가 까마귀 사내를 단번에 으스러트릴 듯 두 팔을 활짝 벌려 달려들었다.
“힘만 센 멍청이인가?”
펑-
까마귀 사내가 달려드는 거구의 사내를 향해 검집을 뽑아 휘둘렀다. 오러로 물든 검집이 터져나가며 거구의 사내도 뒤로 튕겨 나갔다.
“이놈! 죽어라!”
뒤로 날아가는 거구의 사내를 보며 십호가 분노를 삼키며 소리쳤다.
웅-
십호의 주먹에 맺힌 검은 암류 위로 보랏빛 기운이 섞여들며 까마귀 사내의 검을 밀어붙였다. 상급 엑스퍼트의 오러를 밀어낼 정도로 강맹한 기운이었다.
“어디서 온 개뼈다귀인진 모르지만, 네놈은 오늘 여기서 죽어!”
십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까마귀 사내의 검에서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맹한 기운이 순간적으로 일어나며 폭발했다.
꽝-
“으악-!”
갑작스러운 폭음과 함께 일어난 충격파에 십호가 뒤로 튕겨 나가며 바닥을 뒹굴었다.
“크억-!”
바닥을 뒹굴던 십호가 발작적으로 일어났지만, 다시 비틀거리며 피를 토해냈다.
“오러 임펄스! 베인 자작…!”
까마귀 사내가 굳은 얼굴로 가면을 벗었다.
“네놈이… 어떻게!”
오러 임펄스.
오러를 폭발시켜 그 충격파로 상대를 공격하는 수법이다. 상급 엑스퍼트라면 약간의 충격파 정도는 누구나 만들 수 있지만, 베인 자작은 이를 극대화시켜 자신만 독특한 검술을 만들었다. 다만 아직까지 베인 자작이란 이름으로 이 검술을 사용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 검술은 오직 아이젠 공작가의 비밀기사단 고스트의 수장으로 적을 상대할 때만 사용해온 것이었다.
“역시, 베인 자작이었군.”
십호가 창백해진 얼굴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알았지? 말해라!”
“크크, 그보다 더 재밌는 사실을 알려줄까? 네놈이 고스트의 수장이란 사실은 물론, 네놈들이 지금 크레노스 왕국에서 벌이는 짓까지 모두 알고 있다.”
십호의 싸늘한 음성에 베인 자작의 얼굴에 잠시 당황스러움이 번졌지만, 곧 냉정하게 십호를 바라보았다.
“알지 말아야 할 것을 알고 있군.”
“큭, 넌 건들지 말아야 할 곳을 건드렸다.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은 네놈 때문이다. 알겠나?”
“그전에… 네놈은 이곳에서 죽는다.”
“크크, 쉽지 않을 것이다. 설령 날 죽인다고 해도 넌, 아니, 아이젠 공작가는 반드시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아이젠 공작가는 네놈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월등히 강하다. 고작 블랙마킷이 공작, 아니 제국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으냐!”
“하하하! 제국, 그래. 물론 제국이라면 블랙마킷을 처리할 수 있겠지! 한데 말이야, 왜 지금까지 제국은 우릴 두고만 보고 있을까? 제국뿐만이 아니지. 대륙에 널린 왕국들은 왜 우릴 공격하지 않을까? 네 말대로 고작 상단에 불과한 곳을 말이야!”
십호가 싸늘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베인을 노려보았지만, 애초에 대답 같은 건 들을 생각이 없는지 곧장 답을 내어놓았다.
“블랙마킷을 공격하는 순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게 될 거란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제국? 흥, 우린 곧 아이젠 공작가의 고스트들이 트라발트 공작가를 공격했단 사실을 왕국에 알릴 것이다. 그리되면 왕국과 제국의 전쟁은 기정사실이다.”
왕국과의 전쟁은 아이젠 공작 역시 오랫동안 바라고 준비해온 일이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아이젠 공작가의 주도로 일어나야 할 전쟁이었다.
블랙마킷에 의해 예상치 못한 순간에 일어날 전쟁은 공작 역시 바라지 않았다.
“…우리가 공격했단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야 적당히 만들어내면 되겠지! 애초에 거짓말도 아니니,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 아닌가? 중요한 건 왕국, 트라발트 공작이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것뿐이지!”
십호의 말대로 조작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트라발트 공작이 사실로 믿는다면 그것이 곧 진실이었다.
트라발트 공작은 젊은 시절부터 제국과의 전쟁을 강조해 왔을 만큼 대단히 호전적인 인물로 강력한 매파 중 하나였다. 어떤 이유로 20년 동안 영지에서 침잠하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제국이 공격했단 명분만 찾아낸다면 그는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상관없다. 내 목표는 오직 너뿐이다.”
베인 자작의 검이 십호를 향했다.
“나? 블랙마킷이 목표가 아니라 내가 목표란 말인가?”
“블랙 와이번. 설마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지?”
“…블랙 와이번? 아이젠 공작의 사생아가 맹약을 맺었다는 그 와이번 말인가?”
십호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갑자기 쳐들어와서는 생뚱맞게 블랙 와이번을 들먹이는 베인 자작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설마… 발뺌을 할 생각인가?”
“발뺌? 웃기는 놈이군! 내가 왜 발뺌을 한단 말이냐! 설마 내가 네놈을 겁내고 있다고 생각하나?”
십호는 베인 자작이 상급 엑스퍼트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지금까지 시종일관 당당하게 맞섰다. 겁을 먹었다면 굳이 정면 대결을 고집할 필요가 없었다.
“…아킨스 자작령엘 가지 않았단 말이냐?”
“무슨 헛소리냐! 내가 왜 아킨스 자작령에 간단 말이냐!”
“조세츠 자작! 그가 아킨스 자작령에 있기 때문이겠지.”
베인 자작의 말에 십호의 눈이 사납게 변했다.
“내가 조세츠 자작을 추적했단 사실을 어떻게 알았지? 우리 내부에서도 극비에 속하는 사항이다.”
“…정보력이라면 제국이 더 뛰어날것 같지 않나?”
당시 탈취당한 물건은 맹약을 맺지 않은 레드와이번을 봉인한 아공간석이었다. 블랙마킷에서도 간부급 인사 몇 명만 알 정도로 극비리에 운송을 하던 중 탈취당하고 말았다. 때문에 최소한의 인원을 동원해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 조세츠 자작을 은밀하게 추적한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베인 자작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한 가지. 제국, 아니, 아이젠 공작가는 레드 와이번이 운송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정보력이라… 큭큭,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그래. 바로 그놈들이었군, 내 뒤를 쫓아오던 놈들 말이야.”
카일의 충고 덕분에 십호는 은밀히 자신의 뒤를 쫓아온 두 명의 추적자를 잡아냈다. 하지만 둘 다 붙잡히는 순간 입안에 숨겨둔 극독을 먹고 자결해 버리면서 탈취사건은 미궁에 빠져버렸다.
제삼의 세력이 드러난 이상 조세츠 자작을 붙잡고 추궁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십호는 사실상 이번 탈취사건을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제 발로 찾아온 것이다.
“제국의 검은 여우, 아닌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
“날 추적하던 두 놈, 붙잡히자마자 자결하더군. 그래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확실히 한 가지는 알겠더군.”
십호가 똑바로 고개를 들어 베인 자작을 노려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 녀석의 말대로 제3의 세력이 중간에 끼어들어 장난을 쳤다는 것 말이야. 그리고 그놈들이 누군지 이젠 확실히 알게 되었지!”
십호의 말에 베인 자작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이곳에 올 때까지만 해도 십호를 단번에 죽여버린 뒤 빠르게 탈출할 생각이었다. 일단 지상으로 올라가기만 한다면 와이번을 타고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이상하게 꼬여가면서 베인 자작의 정체와 함께 조세츠 자작을 추적하던 검은 여우들이 졸지에 와이번을 탈취한 범인으로 지목당하게 된 것이다.
“헛소리, 너야말로 조세츠 자작을 쫓아 아킨스 영지로 간 것이 아니냐! 그곳에 네놈이 갔다는 정확한 증거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베인 자작이 바닥에 선명하게 찍혀있는 발자국을 가리켰다.
“…증거?”
십호가 바닥에 찍혀있는 발자국을 바라보았다.
이 발자국은 가문의 권공을 펼칠 때 생기는 독특한 특징 중 하나다.
만약 이런 발자국이 어딘가에 새겨져 있었다면, 그곳에 가문의 일원이 있었다는 얘기었다.
“아킨스… 자작령에 이런 자국이 남아 있단 말이냐?”
베인 자작을 향해 되묻는 십호의 얼굴에도 당황스러움이 어렸다.
“설마… 모른다고 할 생각인가?”
“오히려 내가 묻고 싶다. 정말 아킨스 자작령에 이런 발자국이 새겨져 있나!”
십호의 얼굴이 흥분으로 물들었다.
“정말… 아킨스 자작령에 가지 않았단… 말이냐?”
“말해라! 아킨스 자작령이 이런 발자국이 찍혀있는 게 사실이냐! 말해라!”
“이런….”
베인 자작은 십호의 눈빛에서 그가 아킨스 자작령에 나타난 피스트 워리어가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십호는 절대 블랙 와이번의 오너가 아니다.
“…네놈이 아니라면 아킨스 자작령에 나타난 피스트 워리어는 누구란 말이냐.”
“피스트 워리어…!”
베인 자작과 십호의 뇌리에 한 사람이 동시에 떠올랐다.
“조세츠 자작을 구해간 그 녀석!”
“조세츠 자작과 함께 있다는 그놈!”
십호와 베인 자작이 동시에 서로를 돌아보았다. 서로가 말한 대상이 같은 인물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더불어 십호의 손에서 조세츠 자작을 구한 녀석이 십호를 능가하는 피스트 워리어라는 사실도 짐작할 수 있었다.
“큭큭, 당신 덕분에 아주 좋은 사실을 하나 알았군! 덕분에 나도 가문의 숙원을 풀 수 있을지 모르겠군.”
십호의 눈이 반달로 휘어졌다.
“…아무래도 이번 일은… 내가 오해를 한 것 같다.”
베인 자작은 자신의 잘못을 순순히 인정했다.
“아! 오해? 큭큭, 그렇지! 누구나 오해는 할 수 있지, 오해로 죽을 수도 있고 말이야.”
십호의 조롱 섞인 말에 베인 자작이 얼굴을 찌푸렸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십호가 처음 베인 자작의 공격을 막을 수 없었다면 이미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을 것이다.
“…손해에 대한 보상은 하지.”
“손해? 집기가 조금 부서고 죽을 뻔하긴 했지만, 그딴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술 먹고 난동부리는 귀족들 제압하는 게 내일이니 말이야. 이번 일은 문제 삼지 않겠다.”
어차피 버려진 고성을 적당히 수리해 임시경매장으로 사용하는 중이었다. 고작 부서진 집기를 아까워할 블랙마킷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난 이만 돌아가겠다. 당장 가야할 곳이 있다.”
베인 자작이 검을 검집에 밀어넣고 돌아섰다. 당장 아킨스 자작령으로 돌아가 탈주한 조세츠 자작과 피스트 워리어를 잡아야 했다.
“잠깐.”
“무슨 일이지? 분명 이번 일은 문제 삼지 않겠다고 한 것 같은데?”
“그렇지. 이번 난동은 없던 일로 할 수 있어, 다친 사람도 없고 경매 물건도 온전하니 말이야! 하지만… 우리에겐 문제가 남아 있지 않나?”
“남은 문제?”
“검은 여우들이 자행한 탈취 사건 말이야! 그 일로 우린 레드 와이번과 상단의 간부를 잃었다.”
십호의 말에 베인 자작이 십호를 노려보았다. 그런 베인 자작의 모습에 십호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큭, 역시 놀라지 않는군! 이미 우리가 레드 와이번을 탈취당했단 사실을 알고 있었나? 아니, 아니지! 탈취당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겠지! 우리 블랙마킷이 레드 와이번을 운송한단 사실을 말이야!”
블랙마킷에서 가끔 와이번이 거래되기는 하지만, 레드 와이번이 거래되는 일은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더구나 레드 와이번을 탈취까지 당했다면, 이야기를 듣는 당사자는 최소한의 놀라움이 얼굴에 드러날 것이었다. 그러나 베인 자작의 얼굴에는 놀람보다는 일이 꼬였다는 짜증스러움이 어려 있었다.
“…난 모르는 일이다.”
“우리의 뒤를 쫓던 게 검은 여우가 아니라는 말이냐?”
“그… 녀석들은 조세츠 자작의 뒤를 쫓았을 뿐이다.”
“큭, 당연히 조세츠 자작에게 누명을 씌웠으니 결과를 확인해야만 했겠지!”
“아니다. 그 녀석들은… 젠장! 내가 왜 이런 쓸데없는 변명을 해야 하는 것이지? 분명히 말하지만, 레드 와이번 탈취사건과 우린 상관이 없다.”
“그런 건 차차 조사를 하다 보면 나오지 않을까?”
“날 막겠단 말이냐?”
“그런 뜻이지!”
십호의 말아진 주먹 위로 암흑의 기운과 함께 보랏빛 기운이 섞여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