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격돌
쾅-
아이젠 공작가의 내성 정문이 굉음과 함께 부서질 듯 열렸다.
“베인 자작님 아니십니까?”
거칠게 성을 밀고 들어온 자의 정체는 전대 공작의 치부 중 하나인 베인 자작이었다.
그는 외부에서 낳아온 자식이었다.
외부에서 낳아온 자식을 좋아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실제로 공작부인은 베인 자작을 극히 혐호하고 경멸해, 가장 구석진 낡은 건물을 베인의 거처로 내어주고 하인보다 못한 삶을 살게 했다.
당연하게도 주인의 이런 뜻은 공작성의 하인과 하녀들에게도 그대로 전해져, 그는 공작가의 치부로 괴롭힘을 당했다.
“넌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이다.”
우연히, 정말 우연히 하인들에게 몰매를 맞고 있던 베인은 자신보다 서너 살 많아 보이는 소년과 마주쳤다.
“…그건!”
하인들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베인이 고개를 치켜들며 외쳤다.
“네 이름은 베인! 공작께서 내 아버지시다!”
온몸에 상처를 입었지만, 절대로 지지 않겠다는 듯 베인은 소년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그 모습에 소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사실인가?”
무겁게 닫혀 있던 소년의 입이 열렸다. 하지만 누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베인의 정체를 함구하란 공작부인의 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년이 얼굴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총관을 불러와라!”
“명!”
소년의 뒤에 시립해 있던 기사가 절도있게 고개를 숙이며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이름이 베인이라고 했나?”
“그… 그렇다.”
“나이.”
“응…?”
갑작스러운 물음에, 눈에 어렸던 독기가 당황스러움으로 변했다
“나이!”
소년의 물음에 베인이 자신도 모르게 대답했다.
“10살….”
“나보다 한참 어린데?”
소년이 턱을 쓰다듬으며 베인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총관이 헐레벌떡 다가왔다.
“공자님…. 소영주님, 부르셨습니까?”
“이 녀석이 아버지의 아들인가?”
갑작스러운 물음에 총관이 창백하게 변했다.
“표정을 보니 사실이군.”
소년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곤 손을 높게 들어 올렸다. 베인은 곧 저 손이 자신의 뺨에 떨어질 거란 생각에 두 눈을 꼭 감으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울지 않아!’
마치 다짐을 하듯 마음으로 되새기며 뺨에서 느껴질 고통을 기다렸다. 하지만 소년의 손은 베인의 머리를 따뜻하게 쓰다듬었다.
“고생이 많았구나, 동생아.”
소년의 한마디에 하인들 뿐 아니라 기사와 총관까지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차기 공작가의 주인이 공작가의 치부를 정식으로 인정했다.
만약 이 사실이 알려지면 큰 분란이 생길 것이다. 아니, 가문의 족보에 정식으로 이름이라도 올라가면 당장 분란이 생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일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조금 전까지 베인을 괴롭히던 하인들의 얼굴이 더없이 창백하게 변했다.
“총관!”
“예에…. 소영주님”
“베인은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았다. 즉, 아이젠 가문의 혈통이란 말이다. 헌데… 고작 하인 주제에 감히 고귀한 혈통에 손을 대?”
“그것이… 주모께서….”
“흥! 듣기 싫다. 설마 어머니께서 베인을 때리란 명을 내렸단 말이냐!”
소년의 물음에 총관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그런 명을 공작부인이 내릴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그저 말하지 않아도 윗전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게 바로 측근이 하는 일이었다.
지금 눈앞에 사색이 되어 서 있는 하인들도 대부분 공작부인 처소에서 일하거나 관계된 자들이었다.
“아닙니다. 그런 명은 없었습니다.”
“그럼 결국 이 녀석들이 독단적으로 벌인 일이란 말이군”
“소영주님! 살려주십시오!”
“잘못했습니다.”
“제발!”
하인들이 바닥에 엎드려 용서를 빌었지만, 하인들을 내려다보는 소년의 눈빛은 싸늘하기만 했다.
“흥!”
소년이 싸늘해진 얼굴로 베인의 손을 잡고 돌아섰다.
“모두 죽여라! 가문의 혈통을 능멸하면 어찌 되는지 똑똑히 알려주지!”
창!
소년의 호위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샤악-
내려친 검을 따라 붉은 피와 함께 하인들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다시 한번 이런 일이 벌어지면, 그땐 내 직접 총관이 목을 잘라주지. 알겠나?”
“네네! 알겠습니다. 소영주님! 절대,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
“두고 보지!”
소년이 베인의 손을 잡고는 그대로 총관을 스쳐 지나며 멀어져 갔다.
총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을 때, 공포 어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목이 잘린 하인의 눈과 마주쳤다.
“허억-!”
총관이 급히 목을 쓰다듬으며 급히 뒤로 물러났다.
* * *
“이봐! 총관! 안 들려?”
목을 쓰다듬으며 그때의 기억을 끄집어낸 총관이 베인의 부름에 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이쿠! 송구합니다. 요즘 나이가 들어 가끔 정신이 나갑니다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총관이 말짱한 건 나도 알고 공작님도 잘 알아!”
“허허,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면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그나저나 공작님을 만나러 오셨다면 늦으셨습니다. 공작님께선 귀족회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아니, 오늘은 공작님이 아니라 자넬 보러왔지. 혹 여기로 블랙마킷의 초대장이 오지 않나?”
“블랙마킷 말입니까?”
“그래. 바로 그곳.”
“그야 당연히 옵니다. 최근에도 초대장을 받았습니다. 공작님께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으셔서 그냥 보관만 해 두고 있습니다.”
“그 초대장, 내가 가져가도 되겠나?”
“혹 필요한 것이 있다면 말씀하십시오. 곧바로 구해 드리겠습니다.”
아이젠 공작가는 제국 최고의 가문이다. 굳이 암시장을 통하지 않아도 원하는 물건쯤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아니, 필요하다면 직접 만들어서라도 구해줄 수 있었다.
“아니. 내게 필요한 건 바로 그 초대장이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총관이 잠시 후 금박으로 장식된 고급스러운 초대장을 가지고 나왔다.
“여기 있습니다.”
“고맙네!”
초대장을 받아든 베인이 곧장 공작령을 벗어났다.
* * *
암시장은 크게 두 곳으로 나뉜다.
돈 많은 상인이나 용병, 그리고 신분을 감춘 귀족과 기사들이 자유롭게 물건을 사고 팔 수 있는 곳과, 특별한 신분의 사람들이 비밀리에 경매를 진행하는 곳이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 두 곳을 모두 블랙마킷이라 불렀지만, 진정한 암시장은 바로 특별한 비밀 경매장이었다.
“초대장을 보여주십시오.”
무미건조한 표정의 사내가 손을 내밀었다. 검은 까마귀 가면을 쓴 사내는 품 안에서 황금빛 초대장을 내밀었다. 초대장에는 어떠한 신분이나 직위도 나타나 있지 않았다. 그저 초대장 중앙에 마법진 하나만이 그려져 있을 뿐이었다.
웅-
사내가 초대장을 납작한 검은 돌 위에 올려놓자 작은 진동이 일어났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확인되었습니다. 들어가시죠.”
사내가 커다란 문을 열었다. 검은 까마귀 사내가 천천히 문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까마귀 사내를 맞이했다.
“자리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여인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앞장서 걸었다. 여기저기에 마법등이 켜져 있고, 벽면엔 천장까지 이어지는 고급스러운 천들이 즐비하게 걸려있어 언뜻 화려해 보였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천정과 벽면이 낡아 있었다. 이곳이 급조해서 만든 장소임을 알 수 있었다.
“이곳에 앉아 경매에 참여하시면 됩니다. 혹 필요한 게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까마귀 사내는 여인의 말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저기 가면을 쓴 사람들이 각자 자리에 앉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차를 마시고 있었다. 간혹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시는 사람도 있었다.
“난 포도주가 좋을 것 같군. 혹시 아르칠산 와인이 있는지 모르겠군.”
아르칠산 와인은 이곳에 초대받은 부유한 귀족이나 상인들이 마시기에는 맞지 않는 중저가의 와인으로, 주로 하급 귀족들이나 마시는 술이었다.
“물론입니다. 곧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잠시 까마귀 사내를 흥미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여인이 미소를 지으며 물러났다.
“흠…. 그냥 비싼 와인이나 달라고 할 걸 그랬나?”
까마귀 사내가 멀어져 가는 여인을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여인은 아르칠산 와인과 치즈를 가지고 돌아왔다.
“10년산 아르칠산 와인입니다. 보통 2~3년을 숙성해 마시지만, 10년 이상 넘어가면 타닌은 부드러워지고 향은 매혹적으로 변하죠!”
뿅-
여인은 능숙하게 마개를 열어 코르크를 제거한 뒤 와인을 따랐다.
“확실히… 다르군요.”
까마귀 사내가 놀란 듯 붉은 와인잔을 바라보았다. 분명 이전에 먹어보았던 아르칠산 와인과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와인이었다.
“와인에 대해 상당히 잘 아는군요.”
“여기서는 고위 귀족들을 상대하기 위해 다양한 것을 배워야 하죠. 와인에서부터 각종 차와 술, 때로는 그림이나 조각에 대해서도 배운답니다.”
“대단하군요. 이곳 주인이 누군지 정말 궁금합니다.”
까마귀 사내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맞아요. 정말 궁금해요. 저희도 주인님이 누군지 궁금하지만, 아직까지 한 번도 찾아오신 적은 없답니다.”
“그럼 아무도 주인의 얼굴을 모른단 말입니까?”
“글쎄요…!”
여인이 고개를 흔들며 비워진 와인잔을 채웠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잠시 후부터 본격적으로 경매가 시작되겠습니다. 귀빈 여러분께서는 각자 자리에 착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회자의 음성이 확성 마법에 의해 홀 안으로 퍼져 나갔다.
“곧 경매가 시작될 거라 전 돌아가 보겠습니다. 부디 원하시는 물건을 가져가시길 바랄게요.”
“흠…. 걱정 마시오. 이미 내가 원하는 물건이 무대에 등장했으니 말이요.”
까마귀 사내가 얼굴 전체를 가면으로 가린 거구의 사내를 바라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리고 있었다. 십호!”
낮게 중얼거린 그는 검을 뽑아 들고는 곧장 십호를 향해 달려들었다.
“꺄악-!”
“압습이다.”
“도망쳐!
가면을 쓴 고위 귀족과 여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순식간에 경매장은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웬 놈이냐!”
십호가 달려드는 사내를 보며 땅을 박차고 뛰어오르며 주먹을 뻗었다.
꽈아앙-
까마귀 사내의 검과 십호의 주먹이 허공에서 부딪히는 순간 엄청난 폭음과 함께 십호가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네놈! 엑스퍼트 상급이구나!”
“흥!”
까마귀 사내는 십호의 말에 관심도 없다는 듯 연이어 검을 찔러 넣었다.
“젠장!”
연신 뒤로 물러나며 까마귀 사내의 검을 피한 십호의 몸 여기저기에 수많은 검흔이 생겨났다.
꽈앙-
갑작스러운 폭음과 함께 까마귀 사내가 주르륵 물러났다. 입구를 지키던 무표정한 사내가 갑자기 몸통 박치기로 밀어낸 것이다.
“이놈! 감히 이 몸에게 상처를 입혀!”
십호가 품에서 검은 장갑을 꺼내 손에 끼웠다. 순간 십호의 전신으로 검은 암류가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오더니 두 주먹 위로 모여들었다.
“크크크, 역시 네놈이었어! 검은 암청색 오러!”
“이런 미친놈! 그냥 죽어!”
십호가 크게 발을 내디뎠다.
꽈앙-
폭음과 함께 십호의 발을 중심으로 방사형의 균열이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