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저격
멀린이 정면을 향해 사일런스 마법을 시전하는 동안 호기심이 발동한 툴린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사이 카일은 이번에 멀린에게 부탁해 만든 스코프를 라이플에 장착했다.
수정을 갈아 만든 렌즈를 양쪽으로 붙이고 안쪽에 호크아이 마법을 새겨 만든 고배율 스코프였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고는 있지만, 이미 시카니스를 통해 와이번 나이트들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어 저격이 불가능하진 않았다.
“지금 뭘 하는 거냐?”
툴린이 다가와 물었지만 궁금하기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카일이 라이플로 사격하는 모습을 직접 본 사람은 멀린과 보일 뿐이었다.
“영감님은 귀찮게 하지 마시고 저쪽으로 나와 계십시오.”
“뭐, 뭐야!”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순간인지 아십니까? 방해하지 마시고 얼른 물러나십시오.”
멀린이 툴린을 밀어내며 당당하게 말했다. 툴린이 화난 얼굴로 멀린을 쏘아보았다. 이쯤 되면 카일이 적당히 나서서 툴린의 편을 들어줄 테고, 그러면 못 이기는 척 물러나며 궁금증을 풀어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카일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툴린이 당황한 듯 카일을 돌아보았지만 카일은 이상한 막대기만 부여잡은 채 툴린에겐 시선도 주지 않았다.
“흐흐, 카일 님을 보셔도 소용없습니다. 전 카일 님을 도와야 하니 그만 물러나십시오. 방해하지 마시고!”
멀린의 당당한 외침에 툴린이 뭐라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그래선 안 된다는 것을 툴린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알겠다.”
틀린이 풀이 죽은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곤 비칠거리며 등을 돌려 걸어갔다. 좁아진 어깨와 푹 숙인 고개가 절로 애처로워 보였다.
“아니… 그렇다고 그렇게 풀이 죽을 거야….”
멀린이 괜히 미안해진 얼굴로 툴린을 바라보았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카일의 옆으로 다가갔다.
“시험 사격을 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바로 저격하겠습니다.”
카일이 재빨리 탄환을 장전했다.
“와이번 나이트가 죽으면 와이번이 곧장 여기로 날아올 수 있습니다. 대비를 해 주시겠습니까?”
“대비라면?”
“와이번을 그냥 떠나보내기는 아쉽지 않겠습니까?”
“아! 확실히… 걱정 마십시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말린이 급히 마법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사이 카일은 깊게 심호흡을 하며 스코프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와이번 나이트는 몸을 은폐하거나 숨지 않았다. 둘 모두 바위에 앉아 있거나 나무에 기댄 자세로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설마 와이번의 탐지 거리 밖에서 자신들을 죽일 수 있는 무기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한 채 마음을 완전히 놓아 버린 것이다.
“휴-.”
깊은 숨을 자연스럽게 내쉬며 박동과 함께 숨을 멈췄다.
타앙-
붉은 불꽃이 총열을 타고 뿜어져 나오며 날아간 탄환이, 바위에 편하게 걸터앉아 휴식을 취하던 와이번 나이트의 심장을 관통하며 사방으로 붉은 피를 뿌렸다.
키아악-
거대한 골드 와이번이 고통스러운 괴성을 토해냈다.
괴성을 지르며 허공을 한 바퀴 선회한 와이번이 곧장 북쪽을 향해 날아가 버렸다. 그 모습을 당황한 얼굴로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사내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조금 전 하늘을 선회하다 사라진 와이번은 항상 함께 웃고 떠들던 자신의 동료가 애지중지하던 골드 와이번이었다. 더불어 와이번이 떠났다는 사실은 곧 자신의 동료가 죽었다는 말과 같았다.
“…이게 무슨!”
당황한 사내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총탄이 목을 꿰뚫고 지나갔다.
퍼억-
크르륵-
피거품을 뿜어내며 쓰러진 사내가 고통스러운 몸짓으로 목을 틀어잡았지만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는 핏물을 막을 수가 없었다.
“아… 안 돼!”
사내가 허공을 향해 손을 휘저으며 힘겹게 소리 질렀다.
하지만 갑작스레 가슴속 깊은 곳에서 끈끈하게 이어 오던 한 줄기 단단한 끈이 툭 끊겨 나가며 사내도 깊은 어둠 속으로 서서히 가라앉았다.
“서둘러요!”
카일이 멍하니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며 소리쳤다.
“빨리 가야 합니다. 어서요!”
카일의 외침에 급히 정신을 차린 터그가 가장 먼저 달려와 카일을 들것에 실었다.
“가자!”
터크의 외침에 사내들이 빠른 속도로 앞으로 달려 나갔고, 그 뒤를 멀린과 툴린에 이어 여인들이 바짝 뒤쫓았다.
“야투, 뭐 해! 버크, 정신 차려! 아직도 멍하니 서있 으면 어쩌자는 거야!”
코퍼가 용병들을 일깨우는 동시에 앞서 달려가는 카일의 뒤를 쫓았다.
쿵-
하지만 한참을 달려 나가던 사람들의 걸음이 한순간 멈춰 섰다. 눈앞에 거대한 골드 와이번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내렸기 때문이었다.
“으헉!”
눈앞에 나타난 골드 와이번에 깜짝 놀란 사람들이 주춤 뒤로 물러났다.
골드 와이번이 황금빛 눈동자를 번뜩이며 사람들을 돌아봤다. 어느 순간 카일과 눈이 마주쳤지만 이내 고개를 돌려 카일의 바로 옆에 서 있는 세인을 바라보았다.
“헙!”
세인이 깜짝 놀라 뒤로 주춤 물러났다.
“물러나지 마십시오.”
카일이 세인을 향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와이번과 맹약을 맺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하… 하지만 제겐 아공간석이 없는걸요.”
세인이 아쉬운 듯 고개를 저었다. 세인의 말에 용병들의 눈이 반짝이며 너나 할 것 없이 아공간석을 꺼내 목에 걸었다. 뒤에 있던 밀런은 아예 사람들을 밀치며 앞으로 나오기까지 했다.
“아공간석은 걱정 마십시오.”
멀린이 웃으며 투명하면서도 둥근 수정구 하나를 꺼냈다.
“목걸이로는 만들지 못했지만, 최상급 수정으로 만든 겁니다. 마법진도 그려놓았습니다. 맹약을 맺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멀린이 수정구를 세인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순간 골드 와이번의 거대한 몸이 공간을 가르며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다. 곧 수정구 중앙에 황금빛 와이번이 날개로 온몸을 가리며 천천히 나타났다.
드디어 와이번과 맹약을 맺는 데 성공을 한 것이다.
“축하는 나중에, 여길 벗어나는 게 먼저입니다.”
코퍼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와이번과 맹약을 맺었지만, 맹약을 맺은 와이번이 당장 전력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지금 당장 와이번을 타고 하늘을 날 수 있다고 해도 상대는 작게는 수 년에서 많게는 십수 년 동안 와이번을 타고 하늘을 누빈 베테랑들이었다.
이제 막 와이번과 맹약을 맺은 세인이 상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터크!”
“네!”
“이제부터 자네가 앞장서게! 이곳의 지형은 자네들이 더 잘 알 테니 말이야!”
“아! 알겠습니다.”
터크는 곧장 자신의 부하들을 이끌고 거침없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생각보다 움직임이 괜찮은데요?”
코퍼의 옆으로 빠르게 따라붙은 야투가 말했다. 야투 역시 뒷골목 주먹패 출신이다 보니 터크에게 더 관심을 가질 수밖에는 없었다.
“저런 움직임은 숲을 자주 뛰어다닌다고 나오는 게 아니다. 분명 누군가에게 전문적으로 배웠을 거다.”
“그럼 잘됐군요. 저 녀석들 제가 키워 보면 안 될까요? 보아하니 저들도 용병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았습니다. 적당히 구슬리면 우리 용병대에 들어올 겁니다.”
“틀렸다. 저들은 우리 제안을 거절할 거다.”
코퍼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여기까지 오면서 여러 번 대화를 나눠 봤습니다. 분명 용병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
“알고 있다. 틈틈이 브린이나 아덱을 찾아 용병에 대해 이런저런 걸 묻고 다니는 것만 봐도 그 정도는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 문제는 저 녀석들, 우리만 관심을 가진 게 아니란 거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만 관심을 가진 게 아니라니요?”
“아무래도 카일이 저 녀석들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카일은 아직 용병 등록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이미 카일에게 두 마리… 어쩌면 그 이상의 와이번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이지!”
“그… 렇군요.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거기다 카일 본인이 중급 엑스퍼트인 것과 조금 전 본 아티팩트를 생각하면…. 중형 용병대를 만드는 것도 어렵지 않겠군요.”
“아마도… 그렇겠지.”
코퍼의 꿈은 언젠가 중형 용병대를 만드는 것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중형 용병대로 인정을 받으려면 탄탄한 자금력과 함께 다수의 엑스퍼트가 필요했다.
코퍼 용병대처럼 작은 용병대가 혼자 힘으로 중형 용병대로 성장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물론 아예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코퍼가 하루빨리 실력을 높이거나 와이번과 맹약을 맺어 상단이나 귀족가의 후원을 받는 것이다.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지만 코퍼의 검술로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와이번과 맹약을 맺는 일은 허황된 꿈같은 일이었다.
물론 조금 전 눈앞에 거대한 와이번이 직접 나타나긴 했지만 말이다.
* * *
“…녀석이다.”
눈앞에 쓰러져 있는 두 부하들의 상처는 부위만 다를 뿐 똑같은 무기에 공격받아 생긴 상처들이었다.
“강력한 회전이 걸린 마법 공격이 분명합니다. 얼마 전 타스의 어깨에 생긴 상처와 같습니다. 다만… 이상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상한 점?”
“이 녀석… 얼굴을 보십시오. 너무 평온해 보이지 않습니까?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죽는지도 모르고 죽었을 겁니다.”
“그 말은… 지금 와이번의 탐지 거리 밖에서 공격했다는 말이냐?”
“…그렇게밖에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와이번의 탐지 거리 밖에서 공격할 수 있는 마법 무구가 개발되었다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와이번은 오직 와이번만으로 대적할 수 있다고 알려져 왔다. 와이번의 탐지 거리 내에서는 어떠한 암습이나 암살도 와이번이 먼저 탐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와이번의 탐지 거리 밖에서 정확히 심장을 관통했습니다. 놀랍도록 높은 정확도도 문제지만, 가장 큰 걱정은 바로 사거리입니다. 만약 놈이 정말 블랙 와이번의 오너라면….”
“우리가 탐지할 수 없는 거리에서 먼저 보고 먼저 공격할 수 있겠지”
낮게 중얼거린 부대주가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어둠 속에 잠긴 숲을 바라보았다.
저 숲 어딘가에 바로 그 놀라운 마법 아티팩트를 소지한 블랙 와이번의 오너가 숨어 있을 것이다.
“대주님과의 통신은?”
“이미 시간이 너무 흘렀습니다. 단거리 통신구로는 연결이 불가능합니다 래드 와이번이라면 지금쯤 국경을 넘었을 겁니다. 더구나 대주님 성격이라면….”
“와이번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재촉하시겠지, 젠장! 그럼 공작가와 연락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검은 여우 지부는?”
“트라발트 공작이 가장 가까운 영지입니다만 이번 파괴 공작으로 지부 대부분이 사라졌습니다. 남부는 중요도가 떨어져 지부가 존재하지 않으니…. 방법이라면 직접 동부까지 날아가는 것뿐입니다.”
“그럼 너무 늦어!”
“하지만… 지금 당장 대주와 연락할 방법은 없습니다.”
“…어쩔 수 없다면 시간을 버는 수밖에…. 대원들을 모두 불러! 외곽을 포위한다. 넌 서둘러 동부로 날아가 이 사실을 지급으로 공작령에 알려!”
“너무 위험합니다. 아킨스 자작령이 공격당한 사실은 곧 주변 영지로 알려질 겁니다. 자칫 포위당할 수도 있습니다.”
“나도 알아! 어차피 몸을 숨긴 채 외곽을 포위하며 시간만 끌 생각이다. 넌 공작령에 알린 뒤 타격대만 끌고 오면 돼!”
부대주의 단호한 얼굴에 부관도 더는 말릴 수 없음을 알았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돌아올 테니… 충돌은 최대한 피하십시오.”
“노력해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