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발각2
“저기… 꼭 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갈 필요가 있을까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터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며 눈치를 살폈다. 주먹 하나로 빈민가를 장악한 터그지만 오러를 다루는 용병들이나 기사들은 그와는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항상 조심스러울 수밖에는 없었다.
“앞서간 일행들이 살아 있다면 하류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아니…. 하류로 가지 말자는 것이 아닙니다. 강을 통해 가는 길이 위험하면 다른 길을 통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강을 벗어나면 평야 지대라 와이번에게 발각될 겁니다.”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내려가면 작은 소하천과 합류하는 곳이 있습니다. 이 하천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낮은 산으로 둘러싸인 넓은 숲이 나옵니다.”
터그가 바닥에 그림까지 그리며 설명을 했는데, 이 주변 지형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혹, 크레센트 숲을 말하는 것이냐?”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툴린이 터크를 보며 물었다.
“크레센트… 숲을 아십니까?”
터그가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야기는 들었다만… 네 녀석이 어떻게 그곳을 아는 것이냐? 보아하니 한두 번 가 본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건….”
툴린의 추궁에 터그는 물론 함께 온 사내들까지 당황한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했다.
“그곳을 알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당연히 안 되지! 출입이 철저하게 통제된 곳이니까!”
툴린의 말을 가장 먼저 이해한 사람은 이엘과 시안느였다.
“영주의 사냥터!”
“그래! 영주의 사냥터. 그곳에 사는 진회색 사슴이 유명해 한때는 그레이 크레센트라고도 불리기도 했다. 물론 다 옛날이야기다. 지금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
“사슴이 사라지기라도 했나요?”
“클클, 그럴 리가 있느냐! 그냥 영주를 위한 사냥터에 수십 년 동안 영주가 오지 않으니 어쩌겠느냐! 사람들 기억 속에서 잊히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전대의 아킨스 자작이 무를 숭상하고 사냥을 즐겼다면, 현 아킨스 자작은 부친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검술을 배웠을 뿐 전형적인 문관 타입의 귀족이었다. 특히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사냥이었다. 어릴 때 억지로 사냥터를 따라다니며 강압적으로 배운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아 수십 년째 사냥터가 방치된 것이다.
“그것도… 그렇군요.”
“그보다 네놈은 어찌 알고 있는 게냐? 나처럼 나이 든 노인이 아니면 그곳에 대해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텐데….”
툴린이 눈을 가늘게 뜨며 터그를 노려보았다.
“그야 영주의 사냥터에서 사냥을 했으니 잘 알겠죠? 그보다… 장궁은 잘 쏩니까?”
“헉…. 그걸 어떻게!”
터그가 깜짝 놀라 뒤로 주춤 물러났다.
“놀랄 것 없습니다. 손에 시위를 당긴 흔적이 있어 물어본 것뿐입니다.”
“그, 그렇습니까?”
카일의 말에 터그가 어색하게 손을 뒤로 감췄다. 평민은 원칙적으로 무기를 소지할 수 없었다. 물론 외곽 마을의 경우 예외적으로 무기를 소지하기도 하지만 외성에 살고 있은 평민들에게는 철저하게 지켜졌다. 특히 관통력이 우수할 뿐 아니라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장궁의 경우 예외 없이 사용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리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이니까요. 그보다 터그 씨의 제안, 어떻게 생각하세요? 전 괜찮은 것 같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일단 숲속이라 몸을 숨길만 한 곳이 많잖아요.”
“이미 드러난 길보단 들킬 염려가 적을 겁니다. 저도 찬성입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럼 지체할 필요가 없겠군!”
코퍼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엔 내가 앞서가며 길을 확인하겠다. 거리를 두고 쫓아와라!”
“첨병은 처음부터 제가 하던 일입니다. 이번에도 제가 가겠습니다.”
코퍼의 앞을 브린이 막아섰다.
“이번엔 상대가 와이번 나이트다. 적과 마주치면 잠시라도 시간을 끌어야 한다. 내가 가는 게 적격이다.”
“그야 마주쳤을 때의 일이죠. 걱정 마십시오. 적과 마주치기도 전에 빠져나올 테니 말입니다.”
“두 분 다 가실 필요 없습니다. 다른 분이 갈 테니까요.”
브린과 코퍼가 카일을 돌아보았다.
“다른 사람?”
“예. 워드 님께서 앞서가실 겁니다.”
카일의 말에 코퍼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멀린과 대화를 나누는 워드에게로 향했다.
“지난번 카일 님이 가져다주신 소형 통신기를 복제한 겁니다.”
멀린이 마법 주머니 안쪽에서 입은 물론 귀까지 가릴 수 있는 작은 가면 두 개를 꺼냈다
“원래 형태를 조금 변형했지만 사용하는 방법은….”
“걱정 마십시오. 오래전에 사용한 경험이 있습니다.”
“아! 그럼 따로 설명해 드리지 않아도 되겠군요!”
통신 가면을 받아든 워드가 능숙하게 사용하는 모습에 고개를 끄덕인 멀린이 자신을 멀뚱히 쳐다보고 있는 코퍼에게 다가갔다.
“파장을 연동시킨 통신 가면은 시간이 없어 이 두 개밖에는 만들지 못했습니다. 나머지 하나는 코퍼 님께서 사용하시는 게 맞겠죠.”
“제… 가요?”
코퍼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통신 가면을 받아들었다.
“사용 방법은 간단합니다. 가면 안쪽에 마법진과 각인을 새긴 통신석 두 개가 들어 있죠. 발신 장치는 가면 앞쪽에, 수신 장치는 오른쪽 귀에 있습니다. 한번 확인해 보세요.”
코퍼가 멀린의 말에 가면을 쓰고 입과 오른쪽 귀 쪽을 확인했다. 모두 포도알 크기의 둥근 물체가 만져졌다.
“구동어가 필요 없는 압력식 통신구입니다. 발신할 때는 앞쪽 통신석을 살짝 잡고 말을 하면 됩니다.”
“아! 알겠습니다.”
코퍼가 어느 정도 통신 가면에 익숙해지자 워드가 능숙하면서도 빠르게 일행에서 멀어지더니 어느 순간 공기 중으로 사라지듯 모습을 감춰 버렸다.
“저희도 출발 하겠습니다.”
코퍼가 다시 앞장서서 걸었지만, 걸음걸이는 처음보다 훨씬 가벼워 보였다. 아무래도 뛰어난 첨병이 길을 잡아 준다면 뒤를 따르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한결 편해지는 법이었다.
하지만 카일이 워드에게 첨병을 부탁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와이번 때문이었다. 와이번은 아공간석 안에서도 일정한 범위를 탐색할 수 있다.
때문에 와이번 나이트에 접근해 암살하기란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뛰어난 첨병도 와이번 나이트의 탐지를 피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같은 와이번 나이트라면 어떨까? 레드 와이번만 아니라면 골드 와이번의 탐지 거리는 거의 대동소이하다. 즉, 적 와이번 나이트가 워드의 탐지 거리 경계에 진입한다면 재빨리 경계 밖으로 벗어나 대비를 하거나 도주를 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정지!”
코퍼가 갑자기 손을 들어 일행을 멈춰 세운 후 카일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입니까?”
“일단 소하천은 발견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문제라니요.”
“주변에 와이번 나이트 다수가 몸을 숨기고 있어 더는 앞으로 나갈 수가 없다는구나.”
코퍼의 말에 사람들의 얼굴이 심각하기 굳었다.
“…일단 워드 님과 합류해야겠습니다.”
“차라리 밀런의 말대로 돌아가는 것은 어떠냐? 자칫 들키기라도 한다면 모두 죽을 수 있다.”
“앞에 매복이 있다면 뒤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돌아가다가 오히려 뒤에서 쫓아오는 적과 마주칠 수 있습니다.”
밀런이 돌아가자고 했을 때 코퍼가 걱정했던 부분이었다.
“흠… 좋다. 일단 워드 님과 합류한 뒤 다시 이야기하자!”
“네!”
* * *
워드를 만난 건 소하천과는 거리가 제법 떨어진 곳이었다.
“둘이군요. 강 좌우를 지키고 있습니다.”
카일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워드가 들키지 않고 매복이 있다는 사실만 겨우 알아챘다면 카일은 블랙 와이번의 넓은 탐지 거리로 정확히 적들의 매복 지점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역시… 두 마리였군!”
자신의 예상이 맞았는지 워드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한 마리라면 어떻게 기습을 해 볼 수도 있지만, 두 마리를 모두 처리하기는 어렵다.”
“매복해 있는 자들을 처리하는 건 오히려 쉽습니다.”
“저들 모두를… 처리할 수 있단 말이냐?”
“가능은 합니다. 문제는 그 이후죠.”
“…사방으로 흩어져 있던 와이번들이 이곳으로 몰려들겠지!”
워드와 카일이 심각하게 대화를 이어 가고 있지만, 코퍼를 비롯한 용병들은 두 사람의 대화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지 서로를 멀뚱히 쳐다볼 뿐 좀처럼 대화에 끼어들지 못했다.
“지금… 저기에 와이번 나이트가 두 명이나 숨어 있다는 말이지?”
“나도 분명 그렇게 들었다.”
“워드 님은 그들 중 하나는 처리할 수 있다고 했고….”
“너도 봤잖아! 워드 님의 아티팩트, 몸을 숨긴 채 몰래 가서 쓱싹! 하면 하나 정도는 죽일 수 있지 않을까?”
버크가 목을 자르듯 그어 내리며 말했다.
“그러다 먼저 죽어! 다가가기도 전에 와이번에게 들킬걸? 와이번을 상대할 방법은 오직 와이번뿐이다 몰라?”
“아씨! 그 정도는 나도 알아! 그러니까… 뭐냐! 와이번은 와이번만 상대할 수 있다. 그런데 워드 님은 와이번 나이트를 상대할 수 있다.”
“그러니까 워드 님은 와이번 나이트다? 커억!”
브린과 버크가 깜짝 놀란 얼굴로의 입을 틀어막았다. 코퍼를 비롯한 용병들 모두 놀란 듯 워드를 바라보았지만 카일을 비롯해 세 여인들과 멀린 마법사의 얼굴은 그저 담담하기만 했다. 툴린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모두… 알고 있었군.”
“밝히기 곤란한 비밀 정도는 누구나 가지고 있지요.”
“그럼 너는 어떠냐? 두 명의 와이번 나이트를 상대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너도 와이번 나이트냐?”
코퍼가 눈을 빛내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와이번을 상대할 수 있는 건 와이번이 맞습니다. 하지만 와이번 나이트는 와이번이 없어도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죠.”
카일은 코퍼의 궁금증을 대충 얼버무리며 터그를 불렀다.
“여기 몸을 숨길만 한 곳이 있습니까?”
“사냥터 안쪽에 곰들이 겨울잠을 자는 굴 하나를 알고 있습니다.”
“잘됐군요.”
카일은 천으로 돌돌 말린 긴 물체를 꺼내 들었다. 떠나기 전 멀린이 카일에게 돌려준 물건이었다.
“절 저 위로 올려주십시오.”
카일이 가리킨 곳은 강 사면에 약간 높게 올라온 작은 둔덕 위였다.
“저길 말입니까?”
“시간이 없습니다.”
카일이 재촉하자 터크가 어쩔 수 없이 카일을 둔덕 위로 올려 줬다.
바닥에 엎드린 카일이 말린 천을 풀었다.
“라이플을 사용하실 생각입니까?”
멀린이 다가와 물었다.
“여길 벗어나려면 어쩔 수 없죠. 혹 소음을 줄여 주는 마법이 있다면 걸어 주실 수 있습니까?”
“사일런스 마법이 있긴 합니다만 소리를 완전히 차단하기는 힘듭니다. 그저 한 방향으로 소리가 퍼져 나가는 것을 줄여 줄 뿐이죠.”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합니다.”
“알겠습니다. 일단 정면 쪽으로 마법을 걸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