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발각1
“왜 이렇게 늦은 겁니까!”
성벽 아래, 작은 바위틈에 몸을 숨기고 있던 브린이 코퍼에게 급히 달려와 소리쳤다.
“일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와이번들이 성벽을 따라 정찰을 시작해 더는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먼저 하류로 내려가 기다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럼, 우리도 서두르자!”
“그런데… 못 보던 얼굴들이 있습니다?”
“일이 좀 있었다. 일단 이야기는 나중에….”
“아! 알겠습니다.”
브린과 코퍼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사람들이 모두 바위틈 안으로 조심스럽게 몸을 밀어 넣었다.
쏴아-
바위틈을 벗어나자 가장 먼저 거친 물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세상에! 지하에 이런 곳이 있었군요.”
이엘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탄성을 터트렸다. 동굴 안쪽에서 들려온 거친 물소리의 정체는 바로 지상에서 흘러들어온 물이 아래로 급격히 떨어지며 만들어 낸 폭포 소리였다.
“지하는 빛이 들지 않아 상당히 어둡습니다. 일단 횃불을 만들어야 합니다.”
“마법사가 있는데 횃불 무슨….”
툴린이 멀린을 힐끔 쳐다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그 모습에 멀린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렇다고 딱히 대꾸할 말도 없었다.
“칫…! 라이트.”
멀린이 툴린을 노려보며 라이트를 캐스팅했다. 그러자 멀린의 손 위로 작은 빛의 구체가 둥실 떠올라 통로를 환하게 밝혔다.
“갑시다.”
코퍼가 서둘러 앞서 나갔다.
통로는 물길을 따라 아래쪽으로 완만하게 이어지더니 점점 폭이 좁아져 한 사람이 겨우 지날 정도로 좁아졌다.
“정말 밖으로 나갈 수는 있는 거예요? 벌써 허벅지까지 물이 들어찼어요.”
이엘이 공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이엘 뿐만 아니라 뒤를 따라오는 두 여인도 겁에 질려 있긴 마찬가지였다.
“걱정 마십시오. 곧 통로는 다시 넓어질 겁니다. 수위도 이곳이 가장 깊은 곳입니다.”
“휴…. 그나마 통로를 잘 아는 사람이 함께하고 있어 다행이에요.”
이엘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통성명도 하지 않았네요. 전 이엘이에요. 자유민이죠.”
이엘이 당연하다는 듯 자유민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이젠 자유민 이엘로 불려도 전혀 어색함이 없었다.
“아! 전 평민 터그입니다.”
“터그, 좋은 이름이군요.”
“그런가요?”
터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웃음을 지었다. 그때 수위가 높아져 어쩔 수 없이 터그의 어깨에 반쯤 안겨 가던 소년이 고개를 돌려 말했다.
“전 에일이에요.”
“호호! 그러고 보니 얼굴만 몇 번 보고 이름은 물어보지 않았구나!”
“절… 본 적이 있나요? 전 여관에서 마주친 게 처음인 것 같은데요?”
“넌 모르겠지만 몇 번 본 적이 있지.”
이엘의 말에 에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곧 출구가 보일 겁니다.”
터그의 말과 함께 완만하게 이어지던 통로가 다시 위쪽으로 올라가며 점점 넓어졌다.
“빛이다.”
선두에서 걷고 있던 코퍼가 앞을 가리켰다.
코퍼는 출구와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속도를 줄이고 경계심을 잔뜩 끌어올렸다.
“흠…!”
입구 앞에 멈춰선 코퍼가 곧장 밖으로 나가지 않고 신중하게 바닥을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잠시 쉬었다 가도 될 것 같습니다.”
“바로 합류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성을 벗어나긴 했지만, 무리가 커지면 하늘에 떠있는 적들의 눈에 그만큼 쉽게 발각될 겁니다. 일단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따라가는 게 좋습니다. 그리고 모두 많이 지쳤기도 하고요.”
코퍼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용병들이나 기사들은 아직 체력적인 여유가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체력이 약한 마법사와 여인들 그리고 카일이 탄 들것을 들고 따라온 사내들은 상당히 지쳐 보였다. 아무리 경량화 마법을 수시로 걸어 주긴 했지만, 물길을 따라 좁은 통로를 통과하는 것 자체가 상당한 체력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쿵-
그때였다.
갑자기 낮은 진동이 통로 안을 울리며, 흘러들어오는 물의 양이 급격히 늘어났다.
쿵쿵-
또다시 기분 나쁜 소리가 연이어 올렸다.
“무슨 소리지?”
“너도… 들었냐?”
버크의 물음에 브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굳은 얼굴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통로가 무너지려는 건 아니겠지?”
“설마….”
버크가 애써 부정했지만 불안한 표정만은 피할 수 없었다.
“흠…. 아무래도 여길 서둘러 벗어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 할 것 같군!”
코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안감을 가진 상태에서 편하게 쉴 수는 없었다. 휴식을 취하던 사람들이 분분히 자리에서 일어나 코퍼의 뒤를 따라 밖으로 빠져나왔다.
밖은 이제 막 자신의 흔적을 지우려는 듯 태양이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저, 저길 보세요.”
코퍼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온 시안느가 놀란 얼굴로 성을 바라보며 외쳤다. 영주성 하늘 위로 십여 마리의 와이번들이 지상을 향해 일제히 화염의 스피어를 던지고 있었다.
“성이… 불타고 있다.”
“저….”
“이럴 수가!”
조금 전까지 지하수로 안쪽에서 느껴지던 진동과 소음의 정체가 바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화염의 스피어가 일으킨 폭발이었다.
“이곳에서 더 지체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일단 몸부터 피하죠.”
코퍼가 다시 선두로 나섰다.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길을 재촉하던 중 에일이 작은 목소리로 울먹거리며 말했다. 소년뿐 아니라 터그를 비롯한 주먹패와 두 여인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
비록 위험을 피해 영지를 도망치듯 떠나고는 있지만, 영지에는 그들과 인연을 맺은 수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빈민촌 사람들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들것에 누워 성을 바라보고 있던 카일이 옆에서 걷고 있는 에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말인가요?”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니?”
“…그런 건 아니지만, 어른들은 거짓말을 잘하잖아요. 이번에도 그냥 절 안심시키려는 거짓말일 수도 있잖아요.”
에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곤 카일을 바라보았다.
“좋아. 그럼 내가 설명을 해 줄 테니 잘 들어. 일단 빈민촌이 위치한 곳은 지금 눈앞에 보이는 성벽 바로 아래쪽이야”
“그런 건 저도 알아요.”
“와이번들이 떠 있는 곳을 보렴! 대부분이 귀족들이나 부유한 평민들이 거주하는 강 북쪽에 모여 있는 게 보일 거다.”
“아! 정말… 그러네요.”
에일의 얼굴이 조금은 밝아졌다.
“하지만 저들이 강 남쪽을 공격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터그가 카일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은 부상을 당해 누워 있지만, 이 무리의 실질적인 우두머리가 바로 이 젊은 청년이란 사실 정도는 터그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건 실익이 없어요.”
카일이 대답을 하기도 전 이엘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실익이라면….”
“빈민촌 사람들을 몰살시킨다고 해도 귀족들은 아무런 관심도 없을 거예요. 구태여 값비싼 마법 스피어를 사용하면서까지 빈민들을 죽일 이유가 없다는 거죠. 공격은 강 북쪽 지역만으로 충분해요.”
“빈민들의 죽음에는 가치가… 없단 말이군요.”
“…맞아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터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잖은 목숨이면… 가치가 없으면 어떻습니까? 그렇게라도 살아 있다는 것이 좋은 거죠. 아무리 가치가 있어도 죽으면… 그냥 잊히는 겁니다.”
“그럴지도….”
코퍼는 강변을 따라 하류로 조심스럽게 남하하기 시작했다. 아직은 해가 완전히 저물지 않아 상공을 선회하는 와이번 나이트에게 발각당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멈춰!”
코퍼의 다급한 목소리에 뒤를 따르던 일행들이 급히 몸을 감췄다.
“브린!”
“예! 갑니다.”
브린이 코퍼의 손짓에 따라 강변에 쓰러져 있는 검은 물체를 강변으로 잡아당겼다.
“우리보다 앞서 출발한 상단 일꾼들입니다.”
“발각… 되었군요.”
이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몸이 아직 굳지 않았습니다. 공격을 받은 지 얼마 안 된 것 같습니다. 상처에 박힌 스피어까지 회수한 것을 보면 아직 이 주변에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야투의 말은 사람들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만약 와이번 나이트에게 발각이라도 된다면 살아남기 힘들 것이었다.
“이거…. 앞서 출발한 사람들까지 죄다 당한 거 아니야?”
“야! 재수 없는 소리 좀 하지 마! 그리고 죽은 사람도 한 명뿐이잖아! 어쩌다 무리에서 낙오한 사람일 수 있어!”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브린의 말대로 주변에 다른 사체가 없다는 것을 보면 무리에서 떨어진 상단 일꾼이 발각돼 죽은 것일 수 있었다.
“아무래도 주변을 먼저 살펴야겠다. 다녀올 테니 최대한 몸을 감추고 있어!”
코퍼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위험합니다. 아직 주변에 적들이 남아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여기에 있을 수만은 없다.”
“차리리 조금 전 통로 쪽으로 되돌아가는 건 어때? 잠깐 숨어 있다 새벽에 움직이면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다.”
확실히 밀런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이미 지나온 길이라 어느 정도 안전도 확보되었고, 지하수로 안쪽이라면 입구도 외부에선 발견하기 힘든 곳이라 몸을 숨기기엔 좋은 곳이었다. 설령 입구가 발각당한다고 해도 성안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었다.
“아니. 지금 돌아가는 건 오히려 위험해.”
코퍼가 죽은 상단 일꾼을 보며 말했다. 와이번 나이트가 성문을 지키고 있는 상황에서 성을 빠져나온 사람이 있다면 가장 먼저 비밀 통로를 의심할 수밖에는 없다. 더구나 강을 따라 이동하다 사람들을 발견했다면 성에서 빠져나가는 물길을 가장 먼저 조사할 것이다.
“그보다 지금은 먼저 확인할 게 있다.”
“뭘 확인한다는 거지?”
“자작님과 상단의 부 단주님은 일단 성만 무사히 빠져나간다면 더 이상 와이번들의 추적은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라 생각하셨다. 나도 같은 생각이었고!”
“그럼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단 말이냐?”
“그래. 여긴 성에서 한참 떨어진 곳이다. 이미 영주성을 점령했고 성을 불태웠다. 이미 목표한 것들은 다 이루었을 텐데 굳이 도주하는 사람들까지 쫓아와 죽일 필요가 있을까?”
“확인해 보겠다는 게… 그럼.”
“갑자기 성 안쪽에 있던 와이번들이 빠져나왔다는 건… 누군가를 쫓고 있다는 거다.”
코퍼의 말에 사람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아마도 그 누군가는 성을 빠져나온 아일론 상단일 것이다.
“젠장! 한몫 잡을 거란 생각에 쫓아왔더니… 여기가 죽을 자리구나!”
밀런이 험악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원한다면 지금 돌아가도 말리지 않겠다.”
“뭐!”
“우릴 쫓아온 건 너다. 여기서 돌아간다고 해도 말릴 사람은 없다.”
코퍼의 단호한 말이 밀런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이내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흥! 그런다고 내가 순순히 돌아갈 것 같아! 난 아직 아일론 상단에게서 1천 골드를 받지 못했어! ”
밀런이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뒤로 물러나 흙벽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