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도주4
“저리 꺼져!”
“왜 그래! 아는 사람들끼리 같이 가면 좋잖아!”
밀런이 사납게 자신을 노려보는 루트를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
“뭐!”
루트가 밀런의 말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쯧! 지금이 싸움이나 할 땐가!”
툴린이 짜증스러운 눈빛으로 루트를 돌아보았다.
“죄… 송합니다.”
루트가 입술을 깨물며 밀런을 노려보았지만, 밀런은 모른 척 고개를 돌려 버렸다. 루트로선 화나고 억울했지만 여기서 밀런과 다퉈봤자 자신만 손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멈춰!”
한참을 달려가던 코퍼가 갑자기 멈춰 섰다.
“무슨 일이에요?”
시안느와 세인이 재빨리 앞으로 달려 나왔다.
“앞쪽에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습니다. 대략 십여 명은 될 것 같습니다.”
“적일까요?”
세인이 검을 반쯤 뽑으며 물었다.
“흠…. 아마도 아닐 것 같군요. 저길 보십시오.”
코퍼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어두운 그늘 아래에서 작은 인영이 조심스럽게 앞으로 걸어 나나오는 게 보였다.
“넌… 돌아간 게 아니었니?”
시안느가 앞으로 걸어 나온 소년을 보며 물었다.
“저희도 같이 데려가 주세요.”
“뭐!”
시안느가 당황한 얼굴로 코퍼를 돌아보았다. 그 사이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앵? 네놈들이 여기에 왜…!”
가장 놀란 사람은 뒤에서 상황을 주시하던 밀런이었다.
“아는 놈들이냐?”
코퍼가 밀런을 노려 보았다.
“너도 본 적이 있을 거야. 저 녀석들 빈민가 주먹패들이잖아!”
“주먹패?”
코퍼가 고개를 돌려 나타난 사람들을 살폈다. 건장한 사내는 전부 8명이었고, 두 명은 젊은 여인들이었다.
“한 명은 낯이 익군요”
“여관에서 음식을 날라주던 여자예요.”
“상황을 보아하니 우리가 떠날 때를 기다렸군!”
코퍼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타난 사람들 모두 가죽을 말아 만든 등짐을 하나씩 매고 있었다. 모두 아일론 상단이 버리고 간 몬스터의 가죽과 물품들이었다.
아마도 사람들이 떠나길 기다렸다가 물품을 챙겨 지름길로 달려와 앞을 막아선 것 같았다.
“이미 물건과 식량을 챙겼다면 굳이 우리와 같이 갈 필요가 있나요? 나가는 길은 저희보다 더 잘 알잖아요.”
“우린 모두 평민입니다. 이대로 떠나면 유민으로 평생을 떠돌아야 합니다.”
“그건….”
“부탁입니다. 저희를 데려가 주십시오. 절대 짐은 되지 않을 겁니다.”
무리 중 가장 앞으로 나선 건장한 체구의 사내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 사람! 일전에 소년의 누이를 데려가려 했던 사람이에요.”
이엘이 사내를 알아보고는 작은 목소리로 카일에게 말했다.
“이제 보니 옆에 서 있는 여인도 안면이 있군요. 아마도 저 소년의 누이 같습니다.”
“정말! 그러네요.”
이엘이 묘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은 겁에 잔뜩 질려 사내의 팔을 양손으로 꽉 붙잡고 있었다.
“시간이 없어요. 어서 결정을 내려야 해요.”
시안느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데려가죠.”
카일이 말했다.
“데려간다고 해도 짐이 될 거다.”
“어차피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뒤를 쫓아올 거예요.”
“맞아요. 뒤를 쫓아오다 와이번 나이트에게 발각이라도 되면 앞서간 사람들 모두가 위험할 수 있어요.”
시안느의 말대로 괜히 꼬리를 달고 다니는 것보다 자신들의 통제하에 두는 것이 오히려 안전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여기서 시간을 지체해서 좋을 것이 없었다.
“…좋습니다. 더 시간을 끌 수 없으니 바로 움직이죠.”
코퍼의 말에 소년과 주먹패가 일행에 곧장 합류했다.
“이건 저희가 들겠습니다.”
버크와 아덱의 옆으로 사내들이 다가와 카일이 누워있는 들것을 보며 말했다.
“아니…. 우리가 들어도 되는데….”
아덱과 버크가 당황한 듯 말했다.
“아닙니다. 저희 모두 힘 하나는 자신이 있습니다. 저희가 들겠습니다.”
“어…. 아니, 괜찮은데….”
“그렇게 해! 지금은 사람이 늘었으니 호위할 사람이 더 필요해!”
툴린의 말에 버크와 아덱의 얼굴이 찌푸려졌지만, 그렇다고 틀린 말도 아니었다.
“알… 겠습니다.”
마지못해 두 사람이 들것을 사내들에게 넘겨주었다.
“허억!”
들것을 넘겨받은 사내들이 비틀거렸다.
“조심하게!”
“아! 죄송합니다.”
사내들이 재빨리 사과하며 고개를 숙였다.
“제가 좀 무거울 겁니다.”
“아니…. 아닙니다. 전혀 무겁지 않습니다. 사실 체구가 너무 커 무거울 거란 생각은 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힘을 잔뜩 주고 있었는데…. 너무 가벼워서 그만!”
사내들이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클클! 당연하지! 경량화 마법이 걸려있어 가볍게 느껴진 거야!”
“마법?”
사내들이 놀란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고작 촌구석 주먹패일 뿐인 그들로서는, 마법사는 하늘 위를 날아다니는 신과 같은 경외의 대상이었다.
“크크, 이제 좀 가볍게 가겠군, 자! 이건 돌려주지!”
버크에게 다가온 야투가 커다란 짐을 버크에게 던지듯 건넸다. 원래 버크가 짊어지고 가야 할 짐들이었다. 아덱 역시 어쩔 수 없이 짐을 짊어지는 버크를 보며 코퍼에게서 자신의 짐을 돌려받았다.
두 사람은 빼앗긴 들것을 아쉬운 듯 바라보았다.
“시간을 너무 지체했습니다. 속도를 올리겠습니다.”
코퍼의 외침에 화들짝 놀란 아덱과 버크가 급히 코퍼의 뒤를 쫓았다.
* * *
“허! 우리가 오리란 걸 알고 도망을 친 걸까? 아니면 이것도 우연일까?”
영주성을 벗어나 곧장 여관으로 달려온 사내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여관 안에 어지럽게 널려있는 몬스터 가죽과 각종 물품들은, 조금 전까지 이곳에 적어도 수십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남은 흔적으로 보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한발 늦었다는 말인데, 설마… 성문을 돌파할 생각인가?”
큰 희생이 따르겠지만, 성문을 지키는 와이번 나이트가 고작 하나뿐인 걸 생각한다면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능성이 높은 방법이었다.
“그럴 가능성은 없을 것 같습니다. 수레는 물론 말과 마차도 그대로입니다.”
“흠…. 이곳에 그만한 사람들이 숨을 만한 장소가 있을까?”
“…겉으로 드러난 건물들은 몇 곳 있지만, 이곳과 별반 차이가 없는 곳입니다. 그리고 몸을 숨길 작정이었다면 몬스터 가죽은 몰라도 식량을 남겨 뒀을 리가 없습니다.”
수십 기의 와이번 나이트들이 영주성을 공격하고 불태웠다. 사실상 영지가 점령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약 이번 일을 영지전으로 생각했다면 상단이 몸을 감출 이유가 없었다. 영주만 새롭게 바뀔 뿐 상단 입장에선 바뀌는 게 없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용병들도 외부 출입만 자제할 뿐 딱히 몸을 숨기지도, 탈출을 감행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아일론 상단은 과감하게 몸을 피했다. 영주성을 공격한 와이번 나이트들의 정체를 이미 짐작했단 말이다.
그들 곁에 조세츠 자작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가 언제 철군할지 모를 테니… 몸을 숨길 생각이라면 식량을 남기기보단 더 확보해야 했을 거야…. 그런데도 식량이 남았다라…. 결국 어딘가를 통해 영지를 빠져나갔단 말이군!”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일단 너희 둘은 곧장 와이번을 소환해 놈들을 찾아! 멀리 가지 않았다면 분명 아직도 이동 중일 것이다.”
“명!”
문 근처에 서 있단 두 기사가 빠르게 밖으로 달려 나가 와이번을 소환해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대주! 여길 보십시오.”
소환된 와이번을 타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부하들을 지켜보고 있던 사내가 몸을 돌렸다.
“무슨 일이지.”
“여기 발자국이 남아 있습니다.”
“발자국?”
바닥은 커다란 돌들을 얼기설기 깔아 놓고 석회와 흙을 섞어 돌과 돌 사이를 메꿔 단단히 굳혀놓은 곳이었다. 발자국이 남을 만한 곳이 아니었다.
“여깁니다.”
사내가 발자국 앞으로 다가와 자세히 살폈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자국입니다. 주변으로 뻗어나간 균열로 보아 강력한 오러의 힘이 작용한 것 같습니다.”
“기사단장을 죽인 피스트 워리어가 강력한 암청색 오러를 뿜어낸다고 들었다. 단 두 번의 주먹질로 중급 엑스퍼트를 무력화시켰다고 했지!”
사내가 굳은 얼굴로 발을 들어 올렸다.
꽈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내려친 발자국을 따라 부서진 돌 파편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가공할 만한 위력이었다.
그러나 발을 들어 올린 사내의 얼굴은 더욱 굳어져 있었다.
사내의 발을 중심으로 부서진 돌 파편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지만, 발자국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분명 힘의 강도는 새겨진 발자국보다 강해 돌바닥을 부숴놓았지만, 힘의 집중도는 새겨진 발자국이 월등히 앞서 있었다.
“이놈…. 위험한 놈이야!”
사내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대주! 이번에 도망친 무리에 있다는 피스트 워리어…. 블랙와이번의 오너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한 곳에 두 명의 피스트 워리어가 며칠 간격을 두고 나타났다. 더구나 아킨스 자작이 의심할 정도로 비슷한 체구를 가지고 말이야! 충분히 의심할 만한 상황 아닌가?”
“하지만 조세츠 자작과 동행한 피스트 워리어는 격투술 자체가 달랐다고 들었습니다. 결정적으로 오러 역시 청백색으로, 암청색으로 확연히 달랐습니다.”
“…나도 알아! 다른 자일 가능성이 높다는 건…. 그래도 확인은 해야겠지!”
사내가 바닥에 찍힌 발자국을 사나운 눈길로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오늘따라 부대주의 말이 많아졌군! 아주 좋은 징조야, 부대주는 다 좋은데 말이 너무 없어 좀 심심했거든!”
사내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부대주는 사내의 말에 웃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더욱 굳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곳에 나타났다는 피스트 워리어….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던 자일 수도 있습니다.”
“뭐…!”
사내의 손이 번개같이 움직이며 부대주의 목을 틀어쥐었다.
“커억-!”
“지금, 내가 모르는 다른 일이 있었던 것인가?”
“…그것이…. 얼마 전 베링산맥 북동쪽에서… 조세츠 자작… 이 누군가에게… 쫓겨 남하하고 있다는 보고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것과 이번 일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지!”
“나중에… 들어온… 보고에…. 추격자가… 블랙… 마킷의…십호였다고 합니다.”
“10호! …피스트 워리어!”
사내가 손에 잡힌 부주대를 놓아 주며 뒤로 물러났다. 그때만 해도 공작령에 대한 공격이 막 시작되려던 시점이라, 부대주의 보고를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린 것이 바로 자신이었다. 더하여 조세츠 자작의 일은 그냥 지켜만 보란 명령을 내린 것 역시 자신이었다.
“그… 녀석이 여기에 나타났을 가능성은?”
“자작… 이 이곳에 있는 이상… 9할이 넘을 거라 생각합니다. 당시 블랙마킷에서 사라진 물건을 생각해 본다면….”
“그 녀석…. 얼굴에 항상 가면을 쓰고 다닌다고 했던가?”
“신분을 최대한 감추기 위해 블랙마킷의 지도부 대부분이 가면을 쓰고 다닙니다만… 녀석의 경우는 조금 더 유별납니다. 신분이 알려지지 않은 자는 블랙마킷의 주인과 또 다른 한 명을 제외하면 10호가 유일합니다.”
부대주가 힘겹게 일어나 목을 쓰다듬었다.
“그 녀석이 이 발자국의 주인일 가능성은?”
손톱이 살 속으로 파고들 정도로 꽉 말아쥔 주먹 사이로 붉은 핏물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10호의 격투술은 대단히 강맹하면서도 강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전에… 암시장을 찾은 귀족의 호위무사를 단번에 때려죽인 일화는 마킷에서도 유명합니다. 그때 죽인 기사가 바로 중급 엑스퍼트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크크크, 블랙마킷이란 말이지!”
“대주! 하지만 모든 것이 추측일 뿐입니다. 블랙마킷이 관여되었단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더구나… 그곳과 충돌을 일으키면… 공작가도 큰 피해를 입을 겁니다.”
“상관없다. 이번 일에 관여한 자라면 황제라도 죽여 버리겠다.”
“…대주!”
부대주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넌 이곳에 남아 자작을 쫓아라! 아무래도 조세츠 자작에게 들어야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으니 말이야!”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 블랙마킷의 본거지는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본거지는 몰라도 언제 블랙마킷이 열리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다.”
“정말… 블랙마킷을 공격하실 생각입니까?”
“넌 일이 끝나면 곧장 돌아와라! 그리고 자작령은… 불태워 버려!”
사내가 싸늘한 눈으로 바닥에 박힌 발자국을 노려보며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