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180화 (180/404)

180.도주3

“클클, 이름이 루트라고 했나?”

툴린이 벽에 기대어 멀뚱히 서 있는 루트에게 다가왔다.

“자넨 날 따라오게! 같이 갈 데가 있어.”

“네?”

“뭐 하고 있어? 빨리 움직여야 일행이 떠나기 전에 돌아오지!”

툴린이 앞장서서 걸어가지 루트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그의 말을 알아듣고는 서둘러 뒤를 쫓았다.

“눈치가 그리 떨어지진 않네요.”

시안느가 카일을 보며 말했다.

“용병기사로 뽑힐 정도면 실력이나 인성이나 그리 나쁘지 않았을 겁니다.”

“축하해요. 부하가 한 명 생겼네요, 세인 경.”

“…부하라니요. 전 그냥 카일이 시킨 대로 했을 뿐인걸요.”

“그래도 저 사람은 세인 경의 말만 들을 거예요. 명색이 기사잖아요.”

시안느가 웃으며 말했다. 시안느 역시 기사이긴 하지만, 그녀와 세인의 처지는 완전히 달랐다. 세인은 켈토 기사단장의 딸인 동시에 후계자다. 사실상 다핸 남작가의 차기 기사단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외부에서 부하를 받아들인다 해도 문제 될 게 없었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그냥 함께할 가문의 기사가 한 명 생겼다고 생각하십시오.”

카일이 웃으며 말했다.

“찾았습니다!”

그때였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은 브린과 버크가 다급히 달려와 말했다.

“좋아! 서둘러 일을 끝내라! 바로 출발하겠다.”

토일의 외침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어깨에 짐을 둘러맸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비칠거리며 식당 안으로 들어선 멀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다가 카일을 발견하곤 급히 달려왔다.

“아!”

멀린의 등장에 사람들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모두들 멀린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최대한 이야기하신 대로 만들었습니다.”

멀린이 기다란 물체를 카일에게 내밀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 밑에 거뭇하게 올라온 다크서클과 흐릿한 눈동자는 그가 얼마나 피로한지를 한눈에 보여주었다.

“괜찮으세요?”

“걱정 마십시오. 그런데… 왜들 이렇게 분주합니까?”

“그게….”

카일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과 자신의 상태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역시…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카일 님의 오러가 상당히 불안정하더군요.”

멀린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떠날 텐데… 준비를 하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가져갈 물건은 이미 다 챙겨 놓았습니다.”

“예?”

카일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멀린을 바라보자 멀린이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품 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아공간 마법을 연구하다가 만든 공간 확장 주머니입니다. 크기는 대충 1m 크기의 입방체 정도지만, 연구하던 물건은 모두 넣을 수 있습니다.”

“대단… 하군요.”

카일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공간확장마법은 아직까지 복원하지 못한 마법 중 하나였고, 그를 이용한 공간 확장 주머니 역시 고대 던전을 발굴하는 중에나 간혹 발견되는 희귀한 아티팩트였다.

비록 주머니의 크기는 작지만 공간확장마법에 성공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멀린은 그걸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대단할 것 없습니다. 순전히 카일 님 덕분에 가능한 마법이었습니다.”

“네?”

“…그게.”

멀린이 조심스럽게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번에 주신 블랙 와이번의 비늘…. 거기서 발생하는 파장을 연구하다 이런 걸 만들게 된 겁니다. 이걸 만드느라 그간 주신 와이번의 비늘을 모두 사용했습니다.”

“그런가요?”

“그래서 말씀드리는데, 혹시 더….”

“알겠습니다. 시카니스에게 물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멀린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때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엘이 멀린의 어깨를 두드리며 물었다.

“저기… 혹시 남는 공간이 있나요?”

“네?”

이엘이 바닥에 놓인 가방과 물건을 가리키며 물었다.

“식량만이라도 어떻게 안될까요?”

이엘의 말에 당황한 멀린이 머리를 긁적였다.

“자, 잠시만….”

멀린이 주머니에 팔을 급히 밀어 넣었다. 밀런의 팔이 사라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작은 주머니 안으로 전부 들어갔다. 팔로 이리저리 공간을 확인하더니,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식량 정도는 가능합니다. 여기로 가져다주십시오. 대신 한곳에 모두 모아주셔야 합니다.”

“네! 걱정마세요.”

이엘이 환하게 웃으며 각자 싸놓은 짐을 풀어 식량을 모았다.

그사이 멀린이 카일의 곁으로 바짝 다가왔다.

“신성력을 받아들이신 겁니까?”

멀린의 속삭임에 카일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어떻게 아신 겁니까?”

“암흑마기를 동결할 정도의 기운은 신성력밖에 없으니까요. 그나저나… 왜 그렇게 무모한 일을 벌이신 겁니까? 자칫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암흑마기가 오러를 모두 잠식해 암흑기사로 변할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그 전에 마기를 없애야 했습니다.”

“마나에 정통한 마법사를 만나셨나 보군요.”

“툴린이란 마법사입니다. 이곳에서 만났습니다.”

“휴… 아무리 급하더라도 저와 상의를 하셨어야 했습니다. 마나의 관점에서만 보자면 분명 그 툴린이란 마법사의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마법진과 각인법으로 본다면 그 마법사가 틀렸습니다.”

“…그럼 다른 방법이 있었단 말입니까?”

“암흑마기를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은 저입니다. 제가 카일 님의 상태를 몰랐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그럼… 왜 지금까지 가만히 계신 겁니까?”

카일이 눈썹을 찡그렸다.

“저도 준비와 확신이 필요했으니까요. 마기가 오러를 모두 잠식하지 못하게 할 방법 말입니다.”

“몸 안에 마기를 그대로 남겨두고 말입니까?”

“카일 님도 마기 섞인 오러의 위력을 경험하셨을 겁니다. 굳이 마기를 버릴 필요가 있을까요? 암흑기사로 변화하는 것은 몸 안의 모든 오러가 암흑마기에 잠식되고 나서의 일입니다.”

“오러가 모두 잠식되지만 않는다면… 암흑기사로 변하는 일은 없겠군요.”

“정확합니다.”

“그래서… 방법은 찾으셨습니까?”

“네! 찾았습니다. 흑마법 진의 일종인 블러드릭이란 마법진이 있습니다. 피에서 마나를 추출하는 사악한 마법진이죠. 이걸 변형시켜 사용하면 됩니다.”

“…해결책이 흑마법진이란 말입니까?”

“마법진을 아랫배에 위치한 마나 플라워에 새겨 일정한 양의 암흑마기만 지속적으로 뽑아내는 겁니다. 이 방법을 사용하면 암흑마기가 오러를 잠식하지 않으면서도 마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지요.”

“그럼 지금이라도 마법진을 새겨 마기를 뽑아내면 굳어있는 마나 플라워를 다시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요?”

“불가능합니다. 이미 마기와 신성력은 균형을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마기만 뽑아낸다면 신성력이 순식간에 우위를 차지해 버릴 겁니다. 그럼….”

“신성력이 전신을 장악할 거다. 순식간에 성기사로 변해 신의 뜻을 따르게 되겠지! 그런데… 이 녀석은 누구냐!”

갑자기 끼어든 말소리에 카일과 멀린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지팡이에 몸을 기댄 툴린과 커다란 가방을 등에 진 루트가 서 있었다.

“오셨습니까?”

카일이 툴린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인사는 됐고, 이 마법사 녀석은 누구냐? 흠… 특이한 기운인데…. 너, 흑마법사냐?”

“특이한 건 저보다 영감님 같습니다만? 그리고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흑마법사가 아닙니다. 그나저나… 도대체 카일 님의 몸에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엥? 너… 그걸 어떻게 알았지! 너 정체가 뭐야!”

툴린이 지팡이를 들어 찌르는 시늉을 하며 멀린을 위협했다.

“아, 이제보니 카일 님을 이렇게 만든 게 영감님이군요!”

멀린도 지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툴린을 노려보았다.

“이이, 망할 놈이! 어디서 눈을 부라리고 있어! 이놈! 넌 마탑에서 선배 마법사를 그리 대하라고 배웠느냐! 이놈!”

“이놈 저놈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전 왕립 마탑 평민마법사 출신입니다. 제게 선배 마법사나 스승은 없습니다.”

“뭐? 그럴 리가 없는데….”

멀린의 말에 툴린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멀린의 말대로 평민마법사는 마탑의 정식 마법사가 아니다. 이들은 마법사들의 심부름을 도맡아 하며 마법을 하나둘 얻어 익혔기에 선배도 없고 스승도 없었다. 또한 3서클에 올라서면 마탑을 떠나야 했다.

툴린은 멀린이 5서클 마법사란 사실을 단번에 알아챘다. 그래서 당연히 마탑 출신의 마법사라 생각한 것이다.

“설마… 거짓말은 아니겠지!”

“흥! 마법사는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건 사실이다만…. 너! 어떻게 5서클에 올랐지? 평민마법사라면 불가능한 일인데….”

툴린의 말에 이번엔 멀린이 놀란 듯 툴린을 바라보았다.

“그걸… 어떻게…!?”

멀린은 5서클의 회색 마법사였다. 5번째 서클에 어둠의 마나가 스며, 아무리 높은 서클의 마법사라도 그의 수준을 쉽게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런데 툴린이란 노인이 너무도 쉽게 자신의 서클을 알아챈 것이다.

“내가 평생 연구한 게 마나란 놈이다. 그깟 어둠의 마나를 읽지 못했을 것 같으냐?”

“그건….”

말문이 막힌 멀린이 말없이 툴린을 살폈다.

“일단 두 분 앉으시지요.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닙니다. 힘을 합쳐 영지를 빠져나가는 게 먼저입니다.”

카일은 두 사람의 말싸움이 잠시 멈추자 급히 끼어들어 그들을 말렸다.

“흠… 알겠습니다. 카일 님의 말씀이라면….”

가장 먼저 멀린이 자리에 앉았다. 툴린 역시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필요한 건 모두 챙기셨습니까?”

“중요한 것만 챙기고 나머지는 연수실에 넣어 폐쇄했으니 아무도 찾지 못할 거다.”

“다행이군요.”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소개를 해드리겠습니다. 여기 이분은 남부 하늘 탑을 관리하다 하늘 탑이 폐쇄되며 저와 함께하기로 한 멀린 마법사님입니다.”

“…멀린입니다.”

멀린이 먼저 이름을 밝혔다.

“이분은 툴린이란 마법사입니다. 이곳에서 공방을 운영하시는데… 알고 보니 선대에 인연이 있더군요.”

“흥! 이제 보니 하늘 탑을 관리한다던 4서클 각인마법사였군!”

툴린이 툴툴거리며 고개를 돌렸지만, 내심 멀린의 능력에 놀라워하고 있었다. 아무런 마법적 기반도 없는 평민마법사가 무려 5서클의 마법사가 된 것이다. 마법에 천부적인 자질이 있는 게 분명했다.

“당분간은 동행을 해야 하니 부디 사이좋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저 녀석이 내 신경만 긁지 않는다면 싸울 일 없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할 일도 많은데 싸울 시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툴린의 말에 멀린이 지지 않고 노려보며 말했다.

“휴… 부디 그랬으면 좋겠군요.”

카일이 고개를 저었다. 그사이 준비가 끝났는지 코퍼와 부하들이 다가왔다.

“이제 출발해야 한다.”

“부탁드립니다.”

카일의 말에 코퍼가 고개를 끄덕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덱과 버크가 커다란 들것을 들고 다가왔다.

“이동은 두 사람이 책임져줄 거다.”

“감사합니다.”

카일이 아덱과 버크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서둘러 가야 하니 들것에 경량화 각인을 새겨드리죠. 가는 동안 각인이 사라진다면 새로 새겨드리겠습니다.”

멀린이 손을 뻗어 들것에 각인을 새겼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툴린의 얼굴에 감탄의 빛이 어렸다. 각인을 저렇게 쉽게 새겨 넣는 마법사는 처음이었다. 저 정도면 일반 캐스팅 마법보다 빠르게 마법을 펼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흐흐, 마법사가 옆에 있느니 정말 좋긴하네요.”

두 사람이 들것으로 옮긴다고 해도 카일의 체구를 생각한다면 큰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때마침 마법사가 경량화 마법을 걸어주자 버크의 입이 귀에까지 걸렸다.

“자!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일단 최대한 조심스럽고 신속하게 조를 나눠 움직이겠습니다.”

토일이 말을 마쳤다. 마티슨과 토일이 앞장서서 밖으로 달려 나갔다.

“우린 가장 마지막이야! 무력을 가진 사람들이 뒤를 지켜줘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코퍼의 말에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저 자식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기분 나쁘게!”

“모르지. 저 녀석 생각을 누가 알겠어!”

버크가 한쪽에 서 있는 밀런을 노려보며 툴툴거렸다. 밀런도 떠날 준비를 마쳤는지 가죽으로 등짐을 만들어 허리와 등에 지고 있었다.

“이제 우리 차례다. 가자!”

코퍼가 가장 먼저 앞으로 달려 나갔다. 들것을 든 버크와 아덱이 그 뒤를 따랐고, 양옆으로 툴린과 멀린 역시 따라붙었다. 나머지 인원도 후미를 경계하며 서둘러 뒤를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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