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잠식1
“호오! 신기하군! 신기해!”
툴린이 카일의 양손에 피어오른 상반된 성질의 오러를 보며 연신 탄성을 터트렸다.
카일은 툴린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아킨스 자작령을 떠나기 전까지 자신의 오러를 연구할 수 있게 도움을 주기로 한 것이다. 대신 툴린의 원소마법진을 얻기로 했다.
“그러니까 그 흑기사란 놈과의 전투 이후 오러의 변화를 겪었다는 말이냐?”
“네.”
카일의 대답에 툴린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검은 금속 갑옷과 암흑오러를 사용했다면, 놈은 아마도 암흑기사라 불리는 데스트 나이트일 것이다.”
“암흑 마법사가 나타났으니 데스트 나이트가 나타난다 해도 이상한 게 없긴 하지만 분명 흑기사는 살아있는 존재였습니다.”
카일이 의문 가득한 얼굴로 툴린을 바라보았다.
“클클클, 사람들은 죽암흑기사를 죽은 기사의 영혼을 끌어내 만들어낸 사악한 존재로 알고 있지만, 그건 잘못 알고 있는 거다.”
“역시 흑기사는 살아있는 기사가 확실하군요.”
“그래. 하지만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존재라 볼 수 없다. 대부분 암흑마나를 받아들이며 발생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이지를 상실하거든.”
“하지만 당시 흑기사는 분명 어눌하긴 하지만 이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카일의 말에 툴린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안쪽 책장 깊숙한 곳에서 먼지가 쌓인 두꺼운 책을 꺼냈다.
“어디 보자…. 여기 어디서 읽은 것 같은데….”
그는 한참 동안 책장을 넘기며 손가락으로 글자를 세세히 읽어 내려갔다.
“……찾았다. 여기 있다.”
툴린이 천천히 글을 읽어 나갔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구나. 읽어 보겠느냐?”
툴린이 카일에게 책을 내밀었다. 오래된 양피지로 이루어진 책은 암흑기사에 대한 실험 내용을 일지 형식으로 기록한 것들이었다. 죄인을 대상으로 인체실험을 감행한 내용과 결론들이 책 대부분에 짤막하게 기록되어있었다.
“허허!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라! 설마 내가 이런 실험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툴린이 눈을 가늘게 뜨고 카일을 노려보았다.
“이건 우연히 얻은 암흑마법사의 실험일지일 뿐이야!”
“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만?”
“내 녀석 눈빛이 돌변한 걸 모를 줄 아느냐?”
“잘못 본 겁니다.”
카일이 단호하게 말하고는 고개를 숙여 툴툴거리는 툴린을 외면하며 책을 읽어 나갔다.
“…엑스퍼트 상급 이상의 강인한 기사가 스스로의 의지로 암흑마나를 받아들일 경우, 내부 오러와의 충돌을 최소화하며 암흑오러로 변환시킬 수 있다. 이 경우 정신적인 데미지도 줄어들 수 있다. 하지만 암흑마나가 뇌로 침투, 지능이 현저히 떨어지며 목표에 대한 집착과 집념이 강해질 수 있다.”
“아마도 그 흑기사란 녀석, 스스로 원해서 암흑기사가 된 것 같구나.”
“상급 엑스퍼트라면 상당한 실력자인데 왜 스스로 암흑기사가 되었을까요?”
“클클클! 기사란 족속들은 합리적인 사고보단 끝없는 강함만을 추구하는 무식한 녀석들이다.”
기사와 마법사의 사이는 오래전부터 불화가 끊이지 않아 왔지만, 툴린의 얼굴에 드러난 기사에 대한 반감은 조금 더 강하게 느껴졌다.
카일은 툴린의 말 속에 담긴 감정을 모른 척 넘기며 되물었다.
“더 강해지기 위해 스스로 암흑기사가 되었다는 말입니까?”
“너도 직접 겪었지 않았느냐! 암흑마나를 받아들여 마스터의 전유물인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이지를 모두 상실하지도 않았고 말이다. 그만하면 손해를 보는 일은 아니라 생각한다만?”
“그것도… 그렇군요.”
“너도 알고 있겠지만, 변화된 암청색 오러는 암흑마기를 흡수해 만들어진 오러다.”
“이미 짐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오러에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카일의 변화된 오러는 카일에게 어떠한 위해도 가하지 않았고 부작용도 없었다. 오히려 마기와 섞인 암청색 오러는 일반적인 오러보다 강력한 위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래. 지금까지 확인한 것만 보면, 마기와 섞인 오러는 너에게 당장은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다.”
“당장은… 이라면 앞으로 해를 끼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너의 마나 연공법은 특이하고 특별하다! 마치 태초 혼돈의 마나처럼 가장 순수한 오러에 가깝다. 마기가 아무런 충돌도 없이 자연스럽게 섞여들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
툴린이 책을 덮고서 카일을 바라보았다.
“처음 몸 안에 스며든 마기의 양은 아마도 크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극소량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어떠냐?”
“…그건.”
“마기가 빠르게 오러를 잠식하고 있을 것이다.”
툴린의 지적은 정확했다. 기사단장들과의 결투 이후 카일이 보유한 암청색 오러의 양이 대폭 증가했다. 신분을 숨기기 위해 의도적으로 암청색 오러를 사용하자 마기의 양이 순간적으로 증식해버린 것이다.
“이게… 문제가 됩니까?”
“조금 전 암흑기사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느끼는 것이 없느냐?”
툴린의 지적에 카일의 얼굴이 점점 창백하게 변해갔다.
“제가… 암흑기사로 변해가고 있다는 말입니까?”
“…오러가 마기의 특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니 가능성은 높다. 다만 순수한 암흑오러는 아니라 어찌 될지는 직접 확인해봐야겠지.”
툴린이 흥미로운 얼굴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최초로 온전한 정신을 가진 데스트 나이트, 암흑기사를 볼 수도 있을 것 같구나, 클클클.”
툴린의 음침한 웃음소리에 카일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지금 웃음이 나오십니까?”
“클클, 당연히 웃음이 나오지 않겠느냐? 이런 재미나고 흥미로운 일을 또 어디서 보겠느냐?”
“…그럼 막을 방법이 없단 말입니까?”
“의지만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다지 걱정할 건 없을 것 같은데? 오러의 색이야 사람마다 수없이 다르니, 암청색 오러 쯤이야 얼마든지 둘러댈 수도 있지 않느냐?”
“의지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도 짐작일 뿐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설령 의지가 온전하다고 해도, 지능이 현저하게 떨어질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걱정하지 말아라! 지난번 찾아왔던 아가씨들 모두 널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더구나. 설마 그중 하나 정도는 널 거둬주지 않겠느냐.”
툴린의 장난스러운 말에 카일의 얼굴이 단번에 일그러졌다.
“…계속 이러시면 전 그냥 돌아가겠습니다.”
카일이 곧장 몸을 돌렸다.
“클클! 장난 좀 친 것 가지고는…. 이리 와보거라!”
툴린이 벽난로에 걸어 놓은 무쇠 주전자를 들어 찻잔에 따랐다. 향긋하고 고소한 보리의 향이 은은하게 공방 안을 감쌌다.
“방법이 있습니까?”
“흠….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이라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이야기를 들어보거라.”
“경청하겠습니다.”
“…일단 첫 번째 방법은, 처음 말한대로 그냥 그대로 지켜보는 것이다.”
“툴린 님!”
카일이 눈썹을 찌푸렸다.
“장난처럼 이야기는 했지만 가장 위험성이 적은 방법이다. 오러가 너에게 순응을 하고 있으니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휴…. 첫 번째 방법이라고 하셨으니, 다른 방법도 있겠죠?”
“두 번째 방법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네?”
“몸안에 있는 오러를 모두 흩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수련하여 오러를 쌓는 것이다. 좀 아깝긴 하겠지만, 이미 걸어봤던 길이니 처음보다는 빠르게 지금 경지에 다시 오를 수 있을 거다.”
“그건…. 마지막 방법까지 들어보겠습니다.”
카일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리 카일이 성취가 빠르고 뛰어난 마나연공법을 익히고 있다고 해도, 이미 이룩했던 모든 것을 한순간 날려 버린다는 건 카일로서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하긴… 지금까지 이룩한 것들을 모두 포기한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지.”
툴린이 카일을 이해한다는 듯 바라보며 찻잔을 들었다.
“마지막 방법은… 가장 위험한 방법인 동시에 마법사로서 가장 실험해보고 싶은 방법이지만, 너에겐 권하고 쉽지 않다. 그래도 들어보겠느냐?”
툴린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들어보겠습니다.”
카일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툴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지막 방법은 바로 마기를 내부에서 소멸시키는 방법이다.”
“마기만을 없앨 수 있다면 가장 완벽한 방법이 아닙니까?”
카일의 눈에 빛이 어렸다.
“아주 위험한 방법이다. 마기를 선택적으로 소멸시키려면 마기와 상극인 기운을 몸 안으로 밀어 넣어야 한다. 이 경우 내부에서 극심한 충돌이 일어나 자칫 폐인, 아니, 어쩌면 죽을 수도 있다.”
“상극인 기운이라면….”
“신성력이다. 마침 이곳의 성력 높은 노신관을 알고 있다. 그에게 부탁하면 비밀리에 신성력을 불어넣어 줄 거다.”
“…신성력.”
카일이 굳은 얼굴로 툴린을 바라보며 물었다.
“툴린 님이 저라면 어떤 결정을 내리시겠습니까?”
“쯧! 전제가 잘못되었다. 난 마법사다. 마법사의 최우선은 진리를 탐구하고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다.”
“목숨을 잃는다 해도 말입니까?”
“그렇다. 하지만 내가 너라면 첫 번째를 선택하겠다. 넌 마법사가 아니다.”
툴린의 말에 카일이 잠시 고민을 하더니 곧장 툴린을 보며 말했다.
“마자막 방법을 택하겠습니다.”
“흠…. 첫 번째 방법을 선택할 거라 생각했는데….”
“마기에 잠식될 때까지 마음 졸이며 기다리긴 싫습니다. 더구나 의지를 잃거나 지능이 떨어져 가는 모습을 생각하니 더 고통스럽더군요.”
“두 번째 방법은 좀 힘들긴 하지만 가장 안전한 방법이다.”
“다시 처음부터 수련하려면 마을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단 며칠 만에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결정을 했다면…. 좋아! 그럼 바로 가겠느냐?”
틀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습니다.”
* * *
툴린이 향한 곳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작은 신전이었다.
“대지의 여신 레아의 신전이군요. 그런데 생각보다 작군요.”
“신전의 크기는 어딜 가나 비슷하다. 영주가 조금 신경을 써주면 약간 더 넓고 큰 건물을 짓기도 하지만, 신전 건설에 관심이 있는 영주는 적다.”
“그런가요?”
카일이 의아한 얼굴로 툴린을 바라보았다.
“일단 들어가 보자! 그 녀석은 아마도 안에 있을 거다.”
툴린이 앞장서서 신전 안으로 행했다. 카일은 툴린의 뒤를 급히 뒤쫓아 신전 안으로 향했다.
“상당히… 소박하군요.”
카일이 받은 첫인상이었다. 이곳은 신성력을 실체화시켜 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만큼 신전의 권위가 높고 깊을 거란 카일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다.
“신을 모시는 신전의 상황이야 다들 비슷하지.”
“영지민들이 신전을 찾지 않나요?”
“파종 때나 추수철이면 대지의 여신께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많은 영지민들이 찾아오긴 하지만, 그때를 제외하면 거의 찾지 않는다네.”
신전 안쪽에서 수염을 길게 늘어트린 신관이 천천히 걸어 나와 툴린을 대신해 대답했다.
“포라스라고 한다네.”
“내가 말한 신관이다.”
툴린이 카일을 보며 말했다.
“카일이라고 합니다.”
카일이 고개를 숙였다.
“그래! 툴린 마법사님께서 이런 누추한 신전까진 어쩐 일이신가?”
“잉? 말에 뼈가 있는데…. 내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냐?”
“허허…. 그럴 리가요. 감히 저 같은 미천한 신관이 툴린 님의 잘못을 논하다니요…. 당치 않습니다.”
“어허! 그러지 말고 말해 보라니까?”
툴린이 포라스를 붙잡으며 말했지만 노신관은 여전히 모른 척 몸을 피해 다녔다.
“이런 젠장! 저 녀석 삐지면 오래가는데….”
툴린이 투덜거리며 서성거렸지만 아무리 고민하고 생각해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아니! 도대체 뭣 때문에 또 심통이 난 거야!”
툴린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노신관 포라스가 고개를 획 돌려 툴린을 쏘아보았다. 그저 과묵하고 인자해 보이던 노신관의 눈빛이 한순간 사악하게 돌변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