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운수 좋은 날6
스윽-
어깨 위에 롱소드를 걸친 뒤 허리를 굽혀 자세를 낮춘 루트가 신중하게 발을 밀어내며 카일을 탐색하듯 주변을 맴돌았다.
허점이 발견되는 순간 단번에 뛰어올라 목을 날려버릴 듯, 루트의 움직임에선 상당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루트와는 달리 두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린 채 힘없이 두 손을 들어 올린 카일은 마치 지금의 대련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편안해 보이기까지 했다.
‘…빈틈이 너무 많다.’
루트가 긴장한 듯 카일을 살폈다.
상대는 어린 나이에도 이미 완숙한 중급 엑스퍼트에 올랐고, 검술은 물론 격투술에도 능하다.
그런데도 온전히 빈틈을 드러내고 있었다.
공격을 유도해 역공을 펼치려는 함정이란 뜻이었다.
“공격은 하지 않을 생각인가?”
“맨손으로 검을 든 상대를 먼저 공격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서요.”
카일이 미소를 지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흠…. 그럼 내가 먼저 가지!”
카일의 말이 끝나는 순간, 자세를 잔뜩 낮춘 루트가 폭발적으로 튕겨 나가며 어깨 위에 걸친 롱소드를 앞으로 뻗었다.
목표는 카일의 머리.
전광석화와 같이 뻗어나간 루트의 검이 카일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순간 카일은 뒤로 두 발자국 물러나는 동시에 두 손으로 둥글게 원을 그리며 떨어져 내리는 검면을 밖으로 밀어냈다.
‘이런!’
한순간 밀려나는 검에 당황한 루트가 급히 뒤로 물러나며 손목을 꺾어 검을 수평으로 휘둘렀다.
하지만 카일은 오히려 루트의 품 안으로 파고들며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가벼우면서도 빠른 주먹이었다.
퍽-
루트가 깜짝 놀라 급히 서너 걸음 물러나며 검을 비스듬히 들어 방어 자세를 취했다. 가벼운 주먹질이라 충격은 크지 않았지만, 루트의 얼굴에는 당황스러움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검을 막을 때만 해도 부드럽고 느리기만 하던 움직임이 갑자기 배 이상 빨라져서, 순간적으로 카일의 움직임을 놓쳤기 때문이었다.
“…제법 매섭군!”
루트가 붉어진 볼을 쓰다듬었다.
“그냥 가벼운 주먹질입니다. 엄살 부리지 마십시오.”
카일이 피식 웃음을 지으며 좌우로 짧은 스탭을 밟으며 루트에게로 파고들었다.
“당한 건 한 번으로 족하다.”
루트가 들고 있던 검을 반 바퀴 돌렸다.
검날을 두 손으로 짧게 잡고, 카일을 향해 크로스 가드를 도끼처럼 내려찍었다.
카일이 가드를 피해 몸을 회전시키며 팔꿈치로 루트의 턱을 내려찍었다.
퍼억-
조금 전보다 충격이 컸는지 루트가 휘청이며 뒤로 물러났다.
카일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물러나는 루트에게 따라붙으며 어깨로 가슴을 강타했다.
퍼벅-
“크윽-!”
이번 공격은 제법 충격이 심한 탓에 루트의 입에서 짧은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루트도 쉽게 당하지만은 않겠다는 듯 물러나면서도 끝까지 한 손으로 검을 짧게 휘둘렀다.
그으윽-
루트의 검이 카일의 가슴을 스쳐 지나가며 레더 아머를 길게 갈랐다.
루트를 향해 파고드는 순간, 예상치도 못한 각도에서 휘둘러오는 검을 카일이 미쳐 피하지 못한 것이다.
“이런! 갑옷을 다시 사야겠군”
루트가 카일의 갈라진 레더 아머를 보며 말했다.
“근접전을 대비하신 모양이군요. 조금 전은 정말 위험했습니다.”
“하지만 손해는 나만 본 것 같은데?”
루트가 가슴을 가볍게 쓸어넘겼다.
* * *
“어떠냐?”
아킨스 자작이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는 기사를 보며 물었다. 창백한 인상과 불편한 자세, 기사는 온전하지 못한 몸으로 이곳에 서 있는 것이다.
“덩치는 비슷하지만, 공격이나 방어패턴이 전혀 다릅니다.”
“흠…. 실력을 감췄을 가능성은?”
“물론 가능은 합니다. 하지만…. 체계를 갖춘 격투술은 검술보다도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중급에 오를 정도의 격투술이라면 더더욱….”
“가능성은 희박하겠군.”
“당시 놈은 단 한 번의 주먹질로 핀크 단장을 무너트렸습니다. 놈은 강맹하면서도 묵직한 기운을 뿜어내는 격투술을 익혔습니다. 하지만….”
“저 녀석의 공격은 빠르다. 하지만 가볍지. 방어는 부드럽지만 느리다. 나도 약간이지만 검술을 익혔다. 그 정도는 알고 있어. …일단 한 가지 더 확인할 게 남았으니 계속 지켜보겠다.”
아킨스 자작이 짜증 섞인 얼굴로 힐끔 조세츠 자작을 돌아보았다.
‘저 녀석이 차라리 기시단장을 죽인 녀석과 같은 놈이라면 좋을 텐데….”
아킨스 자작이 아쉬운 듯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습관적으로 문질렀다.
두 기사단장이 죽거나 폐인이 되었고, 제1 기사단까지 사실상 괴멸했다.
수십 년 동안 수많은 재물을 퍼부어 겨우 만든 무력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린 것이다.
가장 충격적인 건, 바로 오랫동안 자작가를 섬겨온 로하스의 죽음이었다.
하지만 이미 지난 일이었다. 아킨스 자작에게는 더 이상 의미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손해는 만회해야 하는데….”
자작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시 새롭게 기사단을 만들려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조세츠 자작이 나타났다.
조세츠 자작은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재력 또한 상당하다.
만약 카일이란 녀석이 로하스 단장을 죽인 범인과 동일인이라면, 하다못해 의심을 뒷받침할 합리적인 증거가 몇 개라도 나온다면, 조세츠 자작을 압박해 마땅한 대가를 뜯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의심은 가는데….”
갑작스러운 조세츠 자작의 방문은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아니, 그보단 카일이란 녀석을 보는 순간 직감적으로 범인이란 강한 의심이 들었다.
녀석이 평범했다면 잡아들여 고문이라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기사를 잃은 아킨스 자작은 중급 엑스퍼트인 카일을 감당할 수 없었다.
“자작님!”
“응?”
“드디어 오러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아킨스 자작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들어 식당 중앙을 바라보았다. 바로 이 순간을 확인하기 위해 다친 기사까지 억지로 끌고 온 것이다.
* * *
“대단하군! 도대체 어디서 그런 격투술을 배운 거지?”
“…제 아버지를 만나 보신다면 모든 의문은 순식간에 풀릴 겁니다.”
카일이 은근히 보일에게 모든 것을 떠넘겼다. 어차피 루트가 보일을 만날 일도 없을뿐더러, 만난다고 하더라도 상급 엑스퍼트란 사실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이해하고 넘어갈 것이다.
“하하! 이제 보니 정말 대단한 사람은 따로 있었군! 언제 한번 꼭 만나보고 싶은데?”
“글쎄요? 외부로 잘 나오시지 않아서요.”
“아쉽군! 좋아, 몸은 어느 정도 풀린 것 같으니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
“흠….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게! 여기 아킨스 자작령엔 대지의 신전이 있으니, 목만 잘리지 않으면 죽지는 않을 거야!”
“이런…. 제가 불리하겠군요. 전 맨주먹이라 목을 자를 수 없는데….”
“하하! 아쉽다면 검을 들어도 좋아! 격투술만큼 검술도 뛰어난지 궁금하군”
루트가 눈을 반짝이며 카일의 뒷편, 정확히는 세인의 어깨에 기대어져 있는 특이한 형태의 검을 바라보았다.
“그럴 수야 없죠.”
카일이 웃으며 주먹을 들어 올렸다. 내심 카일의 검술까지 확인해 보고 싶었던 루트가 아쉬운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검을 들게 만드는 수밖에!”
루트가 앞으로 미끄러지듯 다가서며 검을 휘둘렀다. 검을 따라 연녹 빛 오러가 긴 잔상을 남기며 카일을 향해 파고들었다.
순간 카일의 손바닥 위로 아지랑이 같은 청백색의 기운이 몰려들며, 다가오는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카일은 찔러 들어오는 검을 부드럽게 감싸며 오히려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동시에 발목을 걷어차 루트의 중심을 무너트렸다.
쿠웅-
루터가 순간적으로 힘을 이기지 못하고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크윽-!”
짧은 신음을 흘리며 카일의 다음 공격을 피하려는 듯 몸을 굴려 거리를 벌린 루트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카일을 노려보았다.
“이상한 격투술을 쓰는군.”
“그저 잔기술에 불과합니다.”
“잔기술에 당했다니… 이거 불쾌한데?”
루트가 눈썹을 찡그렸다.
“이런…. 정정하죠. 잔기술이 아닙니다. 완전히 숙달되지 않으면 실전에선 사용하기 힘든 고급기술입니다.”
“…갑자기 그리 말하면 더 기분이 나쁠 것 같지 않나?”
“…죄송… 합니다.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카일이 머리를 긁으며 사과했다.
“하하! 나도 장난일 뿐이다. 오히려 처음 보는 독특한 기술이라 재밌군! 그럼 다시 해볼까?”
루트가 좌우로 빠르게 움직이며 카일에게 달려들었다.
쉬익-
머리 위로 루트의 검이 짧은 반원을 그리며 다가왔다. 카일이 뒤로 재빨리 물러나며 두 손을 번갈아 원을 그리듯 휘저으며 루트의 검을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루트가 재빨리 검을 튕겨 내더니 순식간에 역으로 회전하며 카일의 반대쪽 허리를 향해 휘둘렀다.
“이런.”
카일이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몸을 역으로 회전시키더니 루트의 안쪽으로 파고들어 가슴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쉽게 당할 수는 없지!”
카일의 허리로 향하던 검을 다시 반 바퀴 회전시킨 루트가 뻗어오는 카일의 팔을 베어갔다. 주먹이 가슴을 때리는 순간 카일의 팔은 잘려 나갈 것이다.
땅-
카일은 팔을 튕겨 루트의 검을 쳐내며 뒤로 물러났다.
숨이 막히는 공방과 위험천만한 순간이 연속적으로 이어지자 사람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두 사람의 대련에 몰입했다.
* * *
“아닙니다.”
카일과 루터의 공방전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던 기사가 결국 고개를 흔들었다.
“확실한가? 조금의 의심도 없이?”
“저자는… 범인이 아닙니다. 확실합니다. 놈의 오러 색은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암청색이었습니다. 저자의 청백색의 오러와 상반된 색입니다.”
“다른 가능성은 없나? 혹 한사람이 서로 다른 색의 오러를 가질 가능성 말이야!”
아킨스 자작이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물었다. 그도 카일의 손에서 피어오르는 청백색의 오러를 보는 순간 이미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하지만 조세츠 자작을 엮을 수 있는 이런 기회를 놓치고 싶진 않았다.
“오러는 검술이나 마나 연공법, 익히는 사람의 체질과 성격에 따라 색이 달라집니다. 이렇게 형성된 오러는 서로를 배척합니다. 서로 다른 오러가 한 몸에 존재하는 것은 마법사가 오러를 사용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일 겁니다.”
“혹… 마법으로 수작을 부렸을 가능성은?”
“아직까지 그런 마법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저 녀석을 범인으로 몰아간다면…?”
“그곳에는 상당수의 용병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지켜보았습니다.”
아킨스 자작이 심각한 얼굴로 기사를 향해 손가락을 그었다.
“…이미 상당수가 영지를 빠져나갔습니다. 그리고 조세츠 자작이 반발할 겁니다. 주군께서도 아시겠지만, 저 두 사람을 막는 것은 지금 영지의 전력으론 어렵습니다. 차라리….”
“차라리?”
“저 녀석을 영지로 끌어들이는 편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기사가 눈을 빛내며 카일과 루트의 대련을 바라보았다. 루트의 실력은 남부는 물론 중부에도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런 루트를 압도하는 카일의 경지는 놀라울 정도다. 저런 자는 적으로 삼기보단 영지로 끌어들여야 했다.
“저 녀석은 조세츠 자작이 보증을 섰다. 당연히 조세츠 자작의 사람이 아니겠나?”
“그랬다면 벌써 기사로 서임을 했을 겁니다. 애초 조세츠 자작이 보증을 설 필요도 없습니다.”
“흠…. 일리가 있어!”
아킨스 자작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랄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영주님. 저자는 다핸 남작령 출신이라고 합니다. 남작령에서 발급한 임시신분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임시신분증?”
“이제 17살이더군요. 아마도 공작령을 거쳐 왕도로 가려는 것 같았습니다. 새해에 맞춰서 말입니다.”
랄프의 말에 아킨스 자작이 놀란 얼굴로 다시 카일을 살폈다.
아직 성년도 되지 못한 소년이 벌써 중급에 올랐다니 그의 재능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대단한… 재능이군! 그럼… 다핸 남작가와 관계가 있는 것 아닌가?”
“그것이… 아무래도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려는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지?”
“저기, 검을 안고 있는 여인이 보이십니까? 바로 켈토 기사단장의 딸인 세인 경입니다.”
“뭐라?”
아킨스 자작이 눈을 가늘게 뜨곤 멀리 검을 소중히 품고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몇 년 전 다핸 남작령으로 혼담을 넣었던 여인이었다. 혼인을 통해 남부 최강이라는 켈토 단장을 적절하게 통제하려는 이유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오래전 우연히 본 세인의 모습을 잊지 못해서였다.
나이 차이가 제법 많이 나지만, 귀족 가문 간 정략혼에서 나이는 그리 큰 흠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세인이 가문의 검술을 정식으로 익히고 엑스퍼트에 오르는 순간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변해 버렸다. 그런 자는 검술의 유출을 막기 위해서라도 외부인과 혼인은 가급적 피한다. 물론 검술을 공유하기 위해 정략혼을 추진하기도 하지만, 극히 예외적인 경우였다.
“그렇다면 저 녀석은 켈토 단장의 제자일 수 있겠군.”
“아마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됩니다.”
“흠… 곤란하군…. 저런 녀석이 다핸 남작령에 있다면… 역시 제거를 해야 하나?”
“영주님! 저자는 중급 엑스퍼트입니다. 당장 영지의 전력으로는….”
“…어렵겠군. 자칫 남은 기사단까지 피해를 볼 수도 있고….”
“주군! 저자는 자유민입니다. 영지에 묶인 자가 아닙니다. 제거보다는 회유를 생각해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흠…그렇긴 하지…. 저 녀석을 영지로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단번에 두 기사단장의 빈자리를 채워줄 테니 말이야….”
아킨스 자작은 대련에 열중하고 있는 카일을 바라보다 천천히 시선을 돌려 세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흠…. 확실히 생각해볼 만하군…. 랄프!”
“네! 영주님.”
“핀크 단장을 따르던 밀런이라는 자가 있다지?”
“핀크 단장이 쓰러진 뒤 모습을 감췄습니다.”
“당장 영지병을 풀어 놈을 찾아!”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