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운수 좋은 날4
아일론 상단이 아킨스 자작령에 도착한 건 다음 날 늦은 저녁 무렵이었다.
“멈춰라!”
성문으로 들어가는 입구, 병사 수십 명이 상단의 앞을 막아섰다.
“무슨 일입니까?”
“어디서 오는 상단이지?”
“아일론 상단입니다. 다핸 남작령에서 오는 길입니다.”
“아일론 상단?”
중년의 사내가 앞으로 나와 상단을 살폈다.
“확실히 아일론 상단이 맞는 것 같은데? 일정이 상당히 늦었군. 꽤 오래전에 다핸 남작령으로 넘어갔다 알고 있는데?”
“일이 좀 있었습니다.”
“일?”
사내가 의심스런 눈빛으로 코퍼를 비롯한 상단의 사람들을 살폈다. 그들이 상단의 뒤편에서 따라오던 카일 일행에게 시선을 돌리려는 순간, 마차의 문이 열렸다.
“랄프!”
밖으로 나온 토일이 인상을 찌푸리며 랄프를 불렀다.
“토일, 오랜만이군!”
랄프가 반갑게 웃으며 토일에게 다가왔다. 두 사람은 나이도 비슷하고 자주 마주치기까지 해 자연스럽게 인연을 쌓으며 친구가 되었다.
“이보게! 우리 아일론 상단이 한두 번 지나다닌 것도 아니고, 오늘따라 검문이 너무 심한 것 아닌가?”
“나도 어쩔 수 없네! 어제 영지에 큰일이 연달아 터졌거든.”
“큰일?”
토일이 의문 가득한 얼굴로 랄프를 바라보았다. 랄프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휴… 비밀도 아니니…. 어제 아침, 괴한이 나타나 기사단장을 죽이고 도망쳤네”
“기사단장이면 핀크 단장말인가?”
토일의 물음에 랄프가 고개를 저었다.
“처음 문제를 일으킨 사람은 핀크 단장이 맞지만 정작 죽은 사람은 로하스 단장이라네!”
“지금… 로하스 단장이… 죽었단 말인가? 제1 기사단의?”
“그뿐인 줄 아나? 핀크 단장도 큰 부상을 입었다더군. 다시는 검을 잡지 못할 거란 소문이 파다하게 났네.”
“핀크 단장까지… 세상에…. 그럼 두 기사단장 모두….”
토일이 깜짝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아킨스 자작령이 자랑하던 중급 엑스퍼트, 두 기사단장이 모두 사라졌다. 남부 최강이라는 아킨스 자작가의 명성은 이제 다핸 남작령에 넘겨줘야 할 것 같았다.
“어디 그뿐인 줄 아나? 이건 아직 영지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괴한을 쫓던 제1 기사단도 문제가 생긴 것 같네! 아직도 영지로 돌아오지 않고 있거든.”
“기사단까지… 큰일이군!”
“그러니 어쩌겠나! 안팎으로 출입하는 사람들의 검문을 강화할 수밖에….”
“그런 거라면….”
토일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네!”
“아니지! 자네가 미안할 게 뭔가?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리 말해주니 고맙군!”
“자! 이걸로 일 끝나면 병사들과 술 한잔하게!”
토일이 품 안에서 제법 묵직한 주머니를 꺼내 랄프의 옷 안으로 밀어 넣었다.
“어허! 이러면 안 돼! 이런다고 검문을 소홀히 할 수는 없어!”
“검문을 소홀히 하다니! 원칙대로 하게! 이건 그저 수고하는 자네와 병사들이 안타까워 주는 거야!”
토일이 늘어서 있는 병사들을 흘깃 바라보며 말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랄프가 마지 못한 듯 주머니를 챙기며 병사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병사들이 상단으로 달려가 사람들의 신분을 살피고 물품을 확인했다.
“그런데 저 기사분은 누군가? 아무리 봐도 상단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아! 깜빡할 뻔했군! 저분은 조세츠 자작을 모시는 루트 님이네!”
“그럼 자작님께서 마차에 타고 계신단 말인가?”
“그렇네!”
“이런… 진작 말을 하지 그랬나!”
“자작님께서 그저 조용히 지나가려 하셔서 말이야.”
“흠… 아무래도 그건 어려울 것 같네! 영지의 사정이 이러니 사소한 것 하나까지 영주님께 보고가 올라가야 해서 말이야.”
“어쩔 수 없지.”
토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냐! 신분을 밝혀라!”
그때였다. 상단 후미에서 영지병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토일과 랄프는 깜짝 놀라 급히 후미로 달려갔다. 병사 수십 명이 커다란 덩치의 사내를 포위하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이게 무슨 짓인가?”
토일이 랄프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하지만 랄프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검 손잡이를 꽉 쥘 뿐이었다.
“…상단의… 사람인가?”
“도대체 왜 이러는지 말은 해줘야 할 것 아닌가?”
“어제 괴한이 기사단장을 죽였다고 말했던 걸 기억하나?”
“물론 기억하네!”
“그 괴한이 저자와 비슷했네”
“뭐?”
토일이 깜짝 놀라 카일을 돌아보았다.
“그럴 리가? 저 녀석은 다핸 남작령의 샤론 마을에서 우리와 함께 이곳까지 왔네! 카일이 범인일 리가 없어!”
“의심이 가는 자는 무조건 잡아들이란 명을 받았네! 나로서는 어쩔 수 없어!”
“하지만….”
토일이 난처한 얼굴로 카일을 돌아보았다. 랄프의 표정을 보니 절대 양보할 것 같지 않아 보였다.
“그럼 내가 증인이 되면 어떤가?”
고함 소리에 마차에서 내린 조세츠 자작이 다가와 말했다.
“자작님!”
토일이 깜짝 놀라 소리치자 랄프도 조세츠 자작을 보며 급히 고개를 숙였다.
“자작님을 뵙습니다. 수문장 랄프입니다.”
“반갑네!”
조세츠 자작이 랄프의 어깨를 두드리며 천천히 병사들 사이를 지나 카일의 앞에 섰다.
“이 녀석은 이틀 전 저녁까지 분명 나와 함께 있었네!”
자작의 말에 랄프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자작님께서 증언에 해주셨으니 저자를 감옥에 가두지는 않겠습니다. 대신 이 사실을 영주성에 알릴 수밖에 없음을 알아두십시오.”
“알겠네!”
자작의 말에 랄프가 병사들을 뒤로 물렸다. 이틀 전 저녁까지 자작과 함께 있었다면 범인일 수가 없었다. 아무리 빠른 말로 밤새 달린다고 해도 그 짧은 시간에 아킨스 영지에 도착할 수는 없었다.
“일단 검문은 끝났네! 다행히 문제 될 만한 것은 없으니 들어가 보게!”
“알겠네!”
“아, 그리고 밀밭의 여인은 지금 영업을 중단했네!”
“영업을 중단하다니? 이 인원을 모두 수용할 여관은 그곳뿐이지 않나?”
“로하스 단장과 핀크 단장이 괴한과 대결을 벌인 곳이 밀밭의 여인이었네! 지금 그곳은 엉망이라 숙박을 하긴 힘들어”
“이를 어쩐다….”
토일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어쩌겠나! 일단 부서진 집기들을 모두 끄집어내긴 했지만, 영업을 재개하려면 시간이 필요할 거야! 일단 다른 곳을 알아보게!”
“휴… 고맙네! 알려줘서….”
토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코퍼 대장!”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브린이 적당한 숙소를 찾기 위해 먼저 출발했습니다.”
코퍼 대장의 말에 토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랄프를 돌아보았다.
“그럼 가보겠네”
토일이 마차에 오르자 상단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재밌군.”
“네?”
“이상하지 않나? 카일이 사라진 동안 갑자기 아킨스 자작가의 기사단장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니 말이야.”
“하지만 카일은 이제야 겨우 승마를 배운 차입니다. 카일이 그날 아침 아킨스 영지에 있었을 리가 없습니다.”
“흠… 그래…. 그 짧은 시간 만에 아킨스 영지에 다다르는 건 불가능하겠지.”
조세츠 자작이 묘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부장님!”
마차 옆으로 다가온 코퍼가 토일을 불렀다.
“여관은 알아보았나?”
“아무래도 다른 여관을 구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어렵다니? 아킨스 영지에 여관이 두 곳은 더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밀밭의 여인에 있던 투숙객들이 몰려들어 남은 빈방이 없다고 합니다.”
“이런….”
토일이 난처한 얼굴로 조세츠 자작과 마티슨을 돌아보았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나가봐야겠습니다.”
“우린 너무 신경 쓰지 말게!”
“아닙니다. 자작님께서 머무실 객실은 구할 수 있을 겁니다.”
토일이 급히 밖으로 나갔지만 이미 여관마다 투숙객이 가득해 더 이상 객실을 구하기는 힘들어 보였다.
“이를 어쩐다….”
잠시 고민에 빠져 있던 토일이 곧장 밀밭의 여인으로 향했다.
“아이쿠, 토일 지부장님 아니십니까.”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여관 한쪽에 앉아 있던 왜소한 체구의 사내가 벌떡 일어나 토일에게 달려왔다.
“잘… 있지는 못했군.”
토일이 내부를 둘러보며 말했다. 1층 식당 안에는 온전한 식탁이 고작 서너 개 밖에 남아 있지 않았고, 2층 객실 벽들은 모두 사라져 있었다. 그나마 부서진 계단은 어느 정도 수리가 되어있어 위층으로는 왕래가 가능해 보였다.
“휴…. 오늘 하루 부서진 집기들과 잔해만 겨우 치웠을 뿐입니다. 이걸 수리하려면 얼마나 걸릴지… 암담합니다.”
사내가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1층 식당과 2층 객실만 부서진 것 같은데… 그럼 3층 객실은 온전하겠군.”
“온전하면 뭐하겠습니까? 더 이상 손님을 받을 수 없는데요.”
“잘됐군!”
“네?”
“오늘 우리 상단이 여기서 묵으려 하는데 어떤가?”
“상단 전체가 말입니까?”
“그렇네!”
“보시다시피 객실이 모두 부서졌습니다. 3층 객실은 고급객실이라 객실 숫자도 고작 4개가 전부입니다. 상단 전체가 머물기에는….”
“걱정 말게.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자넨 음식과 침구만 충분히 준비해주면 되네! 어떤가?”
토일이 미소지은 얼굴로 물었다.
“그렇다면야…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좋아! 그럼 일단 3층 객실부터 정리해주게! 아주 중요한 손님들이 계셔서 말이야!”
“걱정 마십시오. 아킨스 영지에서 고급객실을 가진 여관은 여기 밖에 없습니다.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고맙네!”
“아이고, 그런 말 마십시오. 한동안 장사를 접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오늘 하루, 제 운이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하!”
“저는 집으로 돌려보낸 아이들을 불러와야 하니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러게!”
아일론 상단은 곧장 밀밭의 여인으로 향했다. 2층 객실이 모두 부서지는 바람에 대부분 바닥에서 잠을 청해야 했지만, 밖에서 노숙을 하는 것보단 훨씬 편안했다.
“흠….”
루터가 가만히 식당 바닥에 새겨진 커다란 발자국과 함께 방사형으로 뻗어 나간 균열을 바라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느냐?”
“이 발자국… 어디서 보신 기억이 없습니까?”
“흠… 글쎄?”
“얼마 전 보셨던 피스트 워리어가 강맹한 펀치를 날릴 때면 바닥에 이런 자국이 남았습니다.”
얼굴을 찌푸린 루트가 돌바닥에 새겨진 발자국을 쓸어내며 말했다.
“피스트… 워리어?”
“그렇습니다. 조금 전 종업원들을 붙잡고 물어보니, 그자가 상당한 체구에 검은 가죽 코트를 입고 얼굴은 가면으로 가렸다고 합니다.”
“흠… 그때 그 녀석과 인상착의가 비슷하군…. 우리와 헤어진 뒤 곧장 이곳으로 왔다면… 시간대도 얼추 비슷하고….”
“거기다 단 두 번의 주먹질로 핀크란 기사단장을 쓰러트릴 정도로 강한 자입니다. 그가 용병 두 명을 쫓고 있었다고 합니다.”
“용병?”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넌 여기 나타난 자가 암시장에서 우릴 쫓던 피스트 워리어라고 생각하는군”
“그렇습니다.”
“흠… 그럴 수도 있지만…. 난 다른 생각이라네!”
“네?”
조세츠 자작이 바닥에 새겨진 발자국에서 고개를 돌려 벽면에 새겨진 수많은 검흔을 바라보았다.
“저길 봐라! 수많은 검흔을 말이야! 난 비록 검술을 익히지 않았지만, 검술마다 검흔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 어때? 모두 같은 검흔 인가?”
조세츠 자작의 말에 루트가 벽면과 기둥마다 새겨진 검흔을 둘러보며 고개를 저었다.
“검흔만 보면 서로 다른 검술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우리가 알던 그자는 검술에는 문외한이었어!”
“흠…. 그자가 검술을 숨겼을 수도 있습니다.”
루트의 말에 자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난 다른 사람을 의심 중이다.”
“…카일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두 사람이 알고 있는 또 한 명의 피스트 워리어는 카일이 유일했다.
“녀석의 행적도 의심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더구나 저 녀석은 검술에도 능하지.”
“하지만 시간대가 맞지 않습니다.”
“알아! 녀석은 분명 그날 저녁 상단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게 바로 사람이지.”
“그럼 방법은 하나뿐이군요.”
“확인할 방법이 있나?”
“간단하면서도 확실한 방법이 있죠.”
루트의 말에 조세츠 자작이 곧바로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직접 확인하는 방법이 가장 좋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