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운수 좋은 날3
“그럼 이제 너희들 이야기를 한번 들어볼까?”
모닥불을 뒤적거리며 한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겨있던 카일이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이걸 돌려주겠다.”
비터가 허리에서 검을 풀어 카일에게 건넸다. 카일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비터가 건넨 검을 받아 들었다.
“좋아! 검은 일단 무사히 돌려받았으니, 이야기를 들어보고 두 사람을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보겠다.”
카일이 무릎 위에 올려놓은 검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비터는 잠시 망설이는 얼굴로 마크를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앞서 말했듯 우리 가문은 제국 동부에 위치한 작은 남작 가문이다. 남부에서 이주해온 증조부께서는 당시 황무지였던 그곳을 사들이고 개간해 지금의 포틀린 남작 가문을 열었다.”
“가문의 역사까지는 알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카일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휴…. 이번 일은 바로 당시 우리가 매입해 토지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토지?”
“정확히는 지금으로부터 5년 전 발견된 금맥 때문이다.”
“…금맥? 지금 금광을 발견했단 말인가?”
“그래. 발견된 금맥도 상당히 커, 개발만 된다면 제국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큰 광산이 될 거라고 하더군.”
“금광이라면 좋은 일 아닌가?”
“물론! 가문의 사람들 모두 그 사실을 알고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가주께서는 대운이 터진 날이라며 매년 이날을 기념하며 축배를 들겠다고까지 말씀하셨지.”
비터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체 모닥불을 뒤적거렸다. 침묵이 이어지자 마크가 대신 이야기를 이끌어나갔다.
“그런데… 어느 날 인접해 있는 테이른 자작이 찾아와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금맥 때문에?”
“그래. 어떻게 알았는지 몰라도 금맥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찾아와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곳의 원래 주인은 자신의 가문이었다면서 말이야.”
“원래 주인?”
“증조부께서 테이른 자작 가문으로부터 황무지를 매입하셨거든.”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미 오래전 매각한 땅이다. 권리를 주장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휴…. 그게 그렇지가 않다. 금맥의 시작 부분이 바로 자작가의 경계와 인접한 곳이라서 말이야. 분쟁을 만들려는 시도는 얼마든지 가능하지.”
“그래서 어떻게 되었지?”
“물론 가주께서는 단호하게 거절하셨다. 자작령과 인접한 곳에 광맥이 있다고 해도 명백한 우리 영토였다. 더구나 오래전 매각한 땅에 대한 권리까지 주장하는 테이른 자작을 용납할 수는 없었지.”
“그래서 영지전이라도 일어난 건가?”
카일의 물음에 마크가 고개를 저었다.
“테이른 가문은 문벌 가문이다. 정통 기사 가문인 우리보다 기사 전력이 약할 수밖에는 없었다. 더구나 가주께서는 중급 엑스퍼트였다. 테이른 자작 입장에선 감히 전쟁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지.”
“그럼 아무 일도 없었단 말인가?”
“…한동안은 정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테이른 자작도 더 이상 권리를 주장하지 않아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마크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붉게 충혈된 눈으로 입술을 꽉 다물고 있던 비터가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잠시 그런 비터를 바라보던 마크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어느 날 인접해 있는 벨린 남작이 가주를 초대했다. 남작도 중급 엑스퍼트라 가주께선 자주 왕래하며 대련을 하곤 했지.”
“자주 왕래할 정도면 상당히 친한 사이였겠군.”
“그래. 비록 실력은 떨어졌지만, 비슷한 실력을 가진 기사와 대련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영주님께선 크게 기뻐하셨다. 하지만 벨린 남작가로 가셨던 영주님은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오셨다.”
“…기습을 당한 건가?”
“아니…. 정당한 대련이었다는 게 남작가의 주장이었다. 참관인도 있었고…. 함께 갔던 기사단장님도 대련 중 돌아가셨다고 했다.”
“기사단장이 대련을 직접 본 건가?”
카일이 마크를 보며 물었다.
“그래. 직접 보셨다.”
“기사단장이 배신했을 가능성은?”
“없다.”
“확신하는 이유가 있나? 금광이 걸려있다면 가능할 것 같은데?”
카일의 물음에 지금까지 이야기를 들으며 침묵을 유지하던 비터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기사단장은 배신하지 않았다. 그분은….”
“그분은 내 아버님이시다.”
“…아버지라 믿는 건가?”
카일이 냉정하게 마크를 바라보며 물었다.
“…기사단장님은 비록 살아 돌아오셨지만, 온전하게 돌아오지는 못했다.”
“부상을 당했군.”
“오른팔이 잘려 돌아오셨다.”
검을 들던 팔이 잘렸다면 기사로서의 생명은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금광 때문에 오른팔을 희생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그럼… 결국 정당한 대결이었다는 말이군.”
“…그래….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지.”
“흠…. 당시 참관인이 있었다고 들었다. 결투도 아닌 대련에 참관인까지 부른 이유가 있었나?”
“벨린 남작이 영주님을 초대한 건 대련 때문만은 아니었다. 테이른 자작과의 갈등을 중재하기 위해서였다.”
“흠….”
카일이 눈썹을 찡그리더니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영주님이 돌아가시고 얼마 후, 테이른 자작이 노골적으로 영지를 넘보기 시작했다. 광산과 인접한 경계 지역에 병사와 기사들을 진주시키기 시작했지.”
“그럼 더더욱 의심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의심을 한들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영지를 끌어 들일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사방에서 승냥이 같은 녀석들이 달려들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지켜만 볼 수도 없었을 텐데?”
“물론 우리도 지켜만 볼 생각은 없었다. 비록 영주님께서 돌아가시긴 했지만, 기사 전력은 아직도 우리다 우세했으니까. 그때쯤, 벨린 남작에게서 혼담이 들어왔다.”
“영주가 죽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혼담이라니? 더구나 영주를 죽인 벨린 남작가에서?”
“당장 하자는 건 아니었다. 일단 약혼한 뒤 누이동생이 성인이 되면 혼인을 하자는 것이었다.”
“누이동생?”
“그래…. 나에겐 이제 15살이 된 누이동생이 하나 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지?”
“당연히 거절했다. 어린 누이동생을 원수인 벨린 남작에게 보낼 수는 없으니까.”
“혼인 대상이 벨린 남작 본인이란 말인가?”
“벨린 남작은 이제 30대 후반으로, 검술에 빠져 아직 혼인하지 않았다. 가문으로만 본다면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귀족 가문 간의 정략혼에서는 나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더구나 상대는 남작위를 가진 중급 엑스퍼트였다. 당장 테이른 자작가에게 압박을 받는 가문의 입장에서는 쉽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더 이상 가문의 적을 늘려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많았다. 하지만 난 단호하게 거절했다.”
“벨린 남작이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그래. 그는 네게 모욕을 받았다며 결투를 신청했다.”
비터는 씁쓸하게 웃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남작의 결투 신청은 내게 절망을 안겨주었다. 고작 소드 유저에 불과한 내가 중급 엑스퍼트를 상대할 수는 없는 일이니 말이야. 때문에 다시 혼인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헌데 그때 갑자기 이변이 생겼다.”
“이변?”
“그래. 상황을 지켜보던 테이른 자작이 어린 소녀를 취하기 위해 소드 유저에 불과한 소영주를 겁박하고 있다며 벨린 남작을 맹비난하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금광이 빼앗길 위기에 처했으니 자작도 가만히 있을 순 없었겠지.”
카일의 말에 비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어쨌든 자작의 노력이 통했는지 남작이 10년의 기한을 주었다. 10년 안에 자신을 이기지 못한다면 누이와 혼인을 하겠다고 말이야.”
“헌데 왜 10년이지? 더 짧게 기한을 줄 수도 있는데?”
“10년이 지나면 비터의 나이가 당시 벨린 남작의 나이와 같아지거든.”
“명분과 실리를 모두 차지하겠다는 말이군.”
남작은 10년의 기한을 줌으로써 자작의 비난을 피하고, 동시에 비터의 누이동생과 혼인하여 금광에 관여할 수 있는 실리를 챙기려는 것이다.
“맞다. 우리가 왕국으로 넘어온 이유도 10년 안에 중급엑스퍼트에 올라 벨린 남작을 상대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앞으로 남은 시간은 고작 5년뿐이다.”
“그래서 검을 훔친 건가? 조금이라도 승률을 높이기 위해?”
“…그렇다.”
“멍청하군. 차라리 나에게 정식으로 도움을 청할 생각은 하지 못했나?”
“그건… 내 불찰이다. 당시엔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마크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
“뭐…. 가족을 위한 일이라니 더 이상 잘못을 문제 삼지는 않겠다.”
“……고맙다.”
비터가 밝아진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앞으로 어쩔 생각이지?”
“검술에 남은 문제점을 해결했으니, 우린 이대로 가문으로 돌아가 검술에 매진할 생각이다. 반드시 5년 안에 중급에 올라 벨린 남작을 꺾을 생각이다.”
비터가 굳은 얼굴로 의지를 다지며 말했다.
“쯧! 역시 멍청하군.”
“뭐?”
“왜 쉬운 방법을 두고 멀리 돌아가려 하지?”
카일의 물음에, 비터와 마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카일을 돌아보았다.
“무슨 말이지?”
“조금 전 말하지 않았나? 왜 정식으로 나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 거지?”
“설마… 우릴 도와주겠다는 건가?”
마크가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카일은 중급 엑스퍼트로, 아킨스 자작령의 핀크 기사단장을 단번에 꺾을 정도의 강자일 뿐 아니라 블랙와이번의 오너였다. 카일이 도와주기만 한다면 의외로 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직접 제국까지 찾아가 도움을 줄 수는 없다. 다만 새로운 검술을 가르쳐주겠다.”
“…새로운 검술?”
“이전 검술보다 안정된 검술이다. 대신 공짜로 가르칠 생각은 없다. 앞으로 남은 5년간 날 도와라!”
마크와 비터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설마 이런 제안을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할 거지? 하겠나?”
“…하겠다! 검술만 알려준다면, 시키는 건 뭐든 다 하겠다!”
비터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곧장 대답했다. 하지만 마크는 미심쩍은 듯 카일을 바라보며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을 시키려는 거지?”
“조금 전 이야기하지 않았나? 날 지키려면 스스로 세력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이야?”
“설마… 세력을 만들 생각인가?”
“그래. 용병대을 만들어볼 생각이다.”
“용병대? 하지만 너 정도면 우리 도움 없이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마크의 말대로 카일은 강인한 무력을 가졌다. 원하기만 한다면 카일의 밑으로 들어올 용병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내 말을 전적으로 따라줄 용병이 필요하다. 용병으로서 왕국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으니, 믿을 수 있는 용병 몇 명 정도는 알고 있겠지?”
“그야… 알고는 있다. 하지만 대부분이 실력이 떨어지는 하급 용병들이다. 그런 자들은 모아봐야 전력이 될 수는 없다.”
“무력은 가르치면 된다. 내게 필요한 건 끝까지 날 믿고 따를 수 있는 자들이다. 어때, 찾을 수 있겠나?”
카일의 물음에 비터와 마크가 잠시 당황한 듯 카일을 보며 물었다.
“검술을 가르치겠다고?”
“그래!”
“흠…. 그렇다면야…. 몇 명 생각 나는 자들이 있긴 하다.”
“좋아! 그럼 너희 두 사람이 그런 자들을 모아서 왕도로 데려와라!”
“왕도?”
“상단의 일정이 바뀌었다. 공작령에 들렀다가 왕도로 갈 생각이다.”
카일은 품 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50골드다 경비가 필요할 테니 가져가라.”
“…우릴 믿을 수 있나?”
마크가 손에 들린 묵직한 주머니를 보며 물었다.
“그럴리가?”
“그런데 왜 골드까지 안겨주며 우릴 보내주려는 거지? 이대로 도망칠 수도 있는데?”
“너희는 믿지 못해도 너희의 상황은 믿을수 있다. 내 도움이 없다면 아무리 수련을 한다고 해고 벨린 남작을 이길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야.”
카일이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걱정 마라…! 이번엔 실망시키지 않겠다.”
“반드시 약속은 지키겠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카일을 향해 비터와 마크가 큰 소리로 말했다.
“됐어! 카일만 도와준다면 분명 벨린 남작을 이길 수 있을 거야!”
비터가 기쁜 얼굴로 말했다.
“설마 카일이 우릴 도와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그래. 정말 잘됐다. 가자, 서두르자!”
비터가 당장이라도 떠나려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하지만 밝아졌던 얼굴도 잠시, 비터의 얼굴이 점차 굳어가더니 마크를 보며 물었다.
“저기… 여긴 어디지?”
“그건… 나도 모른다.”
마크 역시 비터의 물음에 당황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