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운수 좋은 날2
“여기서 기다려. 도망가면 알지?”
블랙와이번을 타고 하늘을 날던 감동도 잠시, 카일의 싸늘한 목소리에 마크와 비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걱정 마라. 도망갈 수도, 도망갈 생각도 없다.”
“알고 있다니 다행이군.”
카일 고개를 돌려 이엘을 바라보았다.
“이엘은 아무래도 먼저 상단에 합류해야 할 것 같군요.”
“제가 들으면 안 될 이야기인가요?”
“죄송합니다.”
카일이 고개를 저었다. 이엘이 실망한 표정을 지었지만, 카일이 단호한 표정으로 몸을 돌려 앞서 걸어가자 어쩔 수 없이 카일의 뒤를 쫓았다.
카일과 이엘이 숲을 벗어나 상단과 합류한 것은 늦은 저녁 무렵이었다.
“카일 님.”
“아가씨!”
숲을 빠져나오는 카일과 이엘을 발견한 세인과 시안느가 급히 달려왔다.
“어떻게 됐어요?”
“잘 해결됐습니다. 전 잠시 부 단주님께 다녀오겠습니다.”
카일은 이엘을 남겨두고 곧장 마티슨을 찾았다. 마침 마티슨은 조세츠 자작과 함께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고 있었다.
“오! 카일이 아닌가? 그래, 갔던 일은 잘 해결했나?”
가장 먼저 조세츠 자작이 카일을 발견하곤 자리에서 일어나 반갑게 맞이했다.
“걱정해주신 덕분에 잘 해결되었습니다.”
“잘 됐군! 하하.”
조세츠 자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뒤에 서 있는 젊은 기사를 돌아보았다.
“루트! 이 녀석이 바로 카일이다.”
조세츠 자작의 말에 루트가 카일에게 다가서며 놀란 얼굴로 그를 살폈다. 카일이 이제 고작 17살의 어린 나이란 말은 듣기는 했었다. 하지만 실제 마주 본 카일은 큰 체구와 단단해 보이는 육체를 가졌지만, 얼굴만은 생각보다 더 어려 보였다.
“루트라고 한다. 도와줘서 고맙다. 반드시 은혜는 갚겠다.”
루트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카일이 깜짝 놀라 손을 저었다.
루트는 조세츠 자작의 뒤를 이어 영지를 물려받을 후계자였다. 아무리 도움을 받았다고는 해도 이렇게 쉽게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일 신분이 아니었다.
“이러지 마십시오. 그저 도울 수 있어 도운 것뿐입니다.”
“그 덕분에 자작님과 난 목숨을 건졌다. 도움을 받았다면 그에 따른 보답을 해야 한다고 배웠다. 그러니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연락을 다오! 어디에 있든 달려가겠다.”
루트의 단호한 말에 카일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카일은 루트의 말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저 도움에 대한 고마움을 표한 정도로만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부탁이 있다.”
“네?”
“나와 대련을 해 다오.”
“대련… 말입니까? 갑자기 왜….”
카일이 갑작스러운 루트의 부탁에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구나. 이 녀석이 그놈과의 대결을 잊지 못해 그런 거니 이해해다오.”
“그… 녀석이라면…?”
“우릴 쫓아왔던 피스트 워리어 말이다.”
“아!”
“녀석이 널 피스트 워리어라 했던 말 때문에 이러는 거란다. 이 녀석의 호승심은 나도 말리기 어려워서 말이다.”
조세츠 자작이 카일의 눈치를 살피더니 엄한 표정으로 루터를 돌아보았다.
“아직 몸도 성치 않은 녀석이 무슨 대련이란 말이냐!”
“부 단주님이 주신 포션으로 내상은 어느 정도 치유가 되었습니다. 대련 정도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루트가 카일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을 재촉하듯 말했다.
“허허… 그래도.”
조세츠 자작이 짐짓 엄한 표정으로 루터를 바라보며 말했지만, 그는 눈빛을 묘하게 반짝이며 카일을 힐끔거렸다.
“휴…. 알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힘듭니다.”
카일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승낙하지 않으면 자신을 놓아주지 않을 것 같은 은근한 조세츠 자작의 집요함에 카일이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허허…. 이거 정말 좋은 구경거리가 하나 생겼군.”
마티슨이 카일과 루터를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일정에 차질이 생겨….”
“너 때문이라니? 오히려 너와 함께 움직인 덕분에 상단의 피해가 줄었으니 우리가 고마워해야지. 상단 일정은 그리 걱정 말거라! 급할 것 없으니.”
마티슨이 카일을 보며 밝게 미소를 지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근심 걱정이 얼굴에 가득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전보다 더 밝아 보이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할 일이 좀 있습니다.”
“그래 할 일이 있다니 그만 가보게나.”
마티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은 조세츠 자작과 마티슨, 그리고 루터에게 인사를 하곤 물러나왔다.
“부단주님에게 좋은 일이 생겼습니까? 하루 사이에 얼굴빛이 완전히 달라진 것 같은데요?
카일이 옆으로 다가온 토일에게 물었다.
“있었지! 부단주님의 걱정거리를 단번에 날려준 것도 모자라 입술이 귀에 걸릴 정도로 좋은 일이.”
“어째 토일 지부장님은 기분이 썩 좋지 못한 것 같습니다.”
“칫! 눈치 하난 빠르군.”
“무슨 일입니까?”
카일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토일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게 다 너 때문이다.”
“네?”
“조세츠 자작이 왕실과의 거래를 주선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왕실? 왕실은 직영 상단에서 물품을 조달하고 있지 않습니까? 왕실은 직영 상단 이외에는 왕국 3대 상단과도 직접 거래를 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그렇지! 하지만 꼭 왕실 상단을 통해서만 거래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주 예외적이긴 하지만, 가끔 왕실과 직접 거래하는 상단이 있긴 하다.”
“처음 듣는 이야기군요.”
“극히 일부니까 모르는 게 당연하지. 대부분이 일반 상단에서는 구하기 힘든 물건이거든.”
“그럼 조세츠 자작이 주선한 거래가….”
“도자기다. 왕실에 직접 도자기를 납품하기로 했다.”
“그… 런!”
카일이 깜짝 놀란 얼굴로 토일을 바라보았다. 설마 도자기를 왕실에 직접 납품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가져온 물량 전부를 왕도로 가져가야 한다. 그것도 내가 직접 말이다. 젠장!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왕도까지 다녀와야 한다니….”
토일이 잠시 화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체념한 듯 고개를 저었다.
“…일단 우리는 공작령에 들렸다가 조세츠 자작님의 영지까지 간다. 그리고 다시 왕도로 올라갈 거다.”
“일정이 갑자기 늘었군요.”
“어쩌겠냐…. 왕실과의 거래는 상단에게 있어 포기할 수 없는 큰 거래니, 일정이 늘어나도 어쩔 수 없지.”
아일론 상단에게 이번 거래는 상단을 한 걸음 더 성장시킬 수 있는 중요한 거래였다. 거래의 규모와는 상관없이 왕실에 납품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상단의 위상은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군요.”
“넌 어쩔 생각이냐?”
“네?”
“처음 계획대로라면 공작령에서 헤어져야 하지만, 이젠 일정이 늘었잖아. 너도 다른 계획이 없다면 왕도로 가보는 건 어떠냐? 어차피 자유민 등록 때문에 왕도로 가야 하잖아.”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래! 이왕이면 긍정적으로 대답해다오. 너처럼 실력 있는 호위도 필요하니 말이야. 물론 공짜로 부려먹을 생각은 없으니 걱정 말고.”
토일이 카일의 어깨를 툭 치고는 몸을 돌려 마차로 돌아갔다.
그가 카일의 뒤를 쫓아온 것도 왕도까지 호위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카일 일행만 그대로 따라와 준다면 토일로서는 따로 실력 있는 용병을 구할 필요 없이 지금 인원만으로도 충분히 왕도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 * *
“휴…. 카일이 와이번의 오너였다니…!”
마크가 붉은빛을 토해내는 모닥불을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와이번도 그냥 와이번이 아니잖아…. 세상에, 블랙와이번이라니….”
비카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마크를 보며 말했다. 와이번과의 맹약은 쉽게 맺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와이번을 멀리서나마 보는 것도 어려운 현실에서 와이번의 선택을 받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간혹 블랙마킷에서 거래가 이루어지긴 하지만, 천문학적인 가격일 뿐더러 정확한 신분이 아니면 경매에 참가 할 수도 없었다.
“블랙와이번…. 과연 녀석에게 좋은 일일까?”
마크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슨 말이야? 당연히 좋은 일이지,”
“휴…. 나도 블랙와이번과 맹약을 맺은 카일이 대단하다고 생각해. 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보물은 화를 불러올 수밖에 없어.”
“감당할 수 없다니, 너도 카일의 실력을 봤잖아?”
“물론 나도 그가 강하다는 건 알아. 하지만 카일은 혼자야. 아무리 뛰어나도 혼자서는 세력을 당해낼 수 없어.”
“…그렇긴 하지만…. 앞으로도 지금처럼 계속 숨길 수 있지 않을까?”
“그건 불가능해.”
마크가 단호하게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때, 숲에서 카일이 천천히 걸어 나오며 물었다.
“카일…!”
비터와 마크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마 둘의 대화를 듣고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카일은 모닥불 앞으로 다가와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되물었다.
“왜 와이번 오너라는 사실을 감출 수 없다고 생각하지?”
“그건…. 우리가 알았기 때문이다.”
“마크!”
비터가 깜짝 놀라 마크를 불렀다.
“왜? 내가 블랙와이번의 오너라고 밝힐 생각인가?”
카일이 날카롭게 마크를 쏘아보았다. 카일의 살기 어린 눈빛에 마크가 주춤 물러서며 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다. 단지… 비밀을 공유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비밀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마크가 카일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비밀을 공유하는 사람이라….”
카일은 마크의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방법은? 문제를 알았다면 해결책도 있을 것 같은데?”
“세 가지 해결책이 있다.”
“뭐지?”
“하나는 스스로 블랙와이번의 오너임을 밝히는 거다.”
“위험을 자초하란 말이냐?”
“아니! 스스로 몸값을 높이란 말이다.”
마크는 카일을 돌아보며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넌 어린 나이에 벌써 중급엑스퍼트다. 거기에 블랙와이번과 맹약을 맺었다. 널 죽여 블랙와이번을 차지하는 것보단, 차라리 너와 블랙와이번을 동시에 얻길 원할 거다!”
“높은 가격을 제시하는 곳에 몸을 의탁하란 말이군.”
“그래! 가장 상책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넌 평민이 아닌 자유민이니, 혼인으로 묶어 가문에 들여도 문제가 될 것도 없지.”
마크의 말에 카일이 고개를 저었다.
“누군가의 밑에 들어갈 생각은 없다. 더구나 마음에도 없는 정략혼은 더더욱 할 생각이 없다.”
“그럴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도 생각은 해보는 게 좋다. 목숨이 걸린 일이니 말이야.”
“생각은 해보겠다. 그럼 두 번째 방법은?”
“스스로 세력을 만드는 거다.”
“세력?”
“그래. 최대한 와이번 오너임을 감추고 세력을 만드는 거다.”
“하지만 카일이 아무리 세력을 만든다고 해도 대영주들만큼 세력을 키울 수는 없어.”
마크의 말을 비터가 곧장 반박했다.
“당연히 거대한 세력을 가진 대영주와 비교하면 부족하겠지만, 적어도 상대에게 큰 피해를 입힐 정도라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
“확실히….”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크의 말대로, 블랙와이번이 아무리 욕심이 나도, 상대를 공격했을 때 자신 역시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된다면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카일은 세력을 키울 수 있는 조건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으니 충분히 가능한 방법이다.”
“세력을 키울 수 있는 조건?”
“무력과 골드!”
“아…!”
비터는 마크의 말을 곧 이해했다. 카일은 도자기란 물건을 만들어 냈다. 세력을 일으킬 자금은 얼마든지 마련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럼 세 번째는?”
“이대로 샤론 마을도 돌아가 몸을 숨기는 거다. 지금 알고 있는 사람들이 비밀을 확실히 지켜준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난 넓은 세상을 돌아보기 위해 마을을 떠나왔다. 나중이라면 몰라도 지금 당장 마을로 돌아갈 생각은 없다.”
“그럼 답은 하나뿐이군!”
마크의 말에 카일이 아무 말 없이 모닥불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