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운수 좋은 날1
빠르게 말을 달려 아킨스 자작령을 벗어난 랜트가 말에서 내려 말고삐를 틀어쥐고는 천천히 바닥을 살피며 걷기 시작했다.
“여기서 기사단이 남쪽이 아니라… 베링산맥으로 향했군.”
랜트가 높게 솟은 베링산맥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무식한 놈! 지휘관이란 녀석이 앞뒤 구분도 못 하고 무작정 쫓아가면 어쩌겠다는 거야!”
랜트가 투덜거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지금쯤이면 콘트가 이끄는 기사단은 레드스톤 지대로 진입해 한참 추격전을 펼치고 있을 것이다.
“아니지, 어쩌면 이미 다 죽었을 수도 있겠군.”
상대는 로하스 단장을 시종일관 몰아붙일 정도로 강력한 무력을 가지고 있었다. 최소한 중급의 끝자락, 어쩌면 상급 엑스퍼트 초입에 들어섰을 지도 모를 강자였다. 그런 강자를 상대로 협공이 불가능한 레드스톤 지대에서 싸운다는 것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어차피 살아있다고 해도 내 말 따윈 들을 녀석도 아니고 말이야.”
랜트는 용병 출신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용병들을 모아 만든 조직이 바로 제2 기사단이다. 이름만 기사단일 뿐 사실상 아킨스 자작과 계약관계로 묶인 용병들로 보는 것이 더 정확했다. 때문에 콘트 뿐 아니라 정통 기사 출신들은 제2 기사단을 기사로 인정하지 않고 배척했다.
태생적으로 출신이 다른 두 집단은 서로 융합할 수 없었다.
그나마 지금까지 기사단이 큰 불화 없이 유지될 수 있었던 건 로하스 단장이 중심을 잡고 이끌어 왔기 때문이었다.
“휴…. 그나저나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랜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핀크 단장에 이어 로하스 단장까지 죽은 이상, 다음 대 기사단장으론 정통기사 출신의 콘트가 유력했다.
하지만 콘트는 명분과 명예를 중시하는 정통기사로, 용병기사를 인정하지 않은 편협한 인간이다.
“그 자식이 기사단장에 오르면 여기서 더 이상 머무르긴 힘들 텐데….”
용병 출신 기사들이 겉으론 표현하지 않고 있지만, 이미 마음속으로 불만이 가득 쌓여 있었다. 다만 지금까지 로하스 기사단장 때문에 불만을 안으로 삼키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콘트가 단장이 된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나도 더는 참지 않을 테니까….”
랜트와 콘트는 서로 비슷한 경지에 올랐다. 체계적인 가문의 검술을 익혀 엑스퍼트에 오른 콘트와는 달리, 랜트는 수많은 실전을 거듭하며 지금의 경지에 올랐다. 검술 자체로 놓고 본다면 콘트가 앞선다고 할 수 있지만, 수많은 실전을 거듭한 랜트는 자신이 콘트에게 질 거란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이긴다 해도 손해만 볼 싸움이라 지금까지 피한 것뿐이었다.
끼야아악-
랜트가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발걸음을 옮기고 있던 그때, 날카로운 비명성이 귓가에 울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치켜든 랜트가 눈을 크게 뜨고 하늘 위를 올려다보았다.
“와… 이번!”
하늘 위에서 거대한 블랙와이번과 골드와이번이 서로 뒤엉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세상에… 블랙와이번이 나타나다니…!”
* * *
“안 돼!”
앤더슨이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멜파스를 보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멜파스를 구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 아직은 남아 있었다.
“네놈을 반드시 죽이겠다.”
사슬에 묶여 공중으로 딸려 올라가던 앤더슨이 입술을 깨물고는 허리에 걸린 고리를 풀어냈다.
철컥-
사슬에 묶여 딸려가던 앤더슨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네놈은 여기서 반드시 죽어줘야겠다.”
대검을 들어 카일을 가리킨 앤더슨의 눈에 살기가 맴돌았다. 지금 멜파스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맹약자를 죽여 블랙와이번이 새로운 맹약자를 찾아 떠나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글쎄? 가능할까?”
카일이 몸을 풀며 장난치듯 검을 이리저리 휘둘렀다. 조금 전 죽음 직전까지 밀렸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곧 보여주지!”
앤더슨이 곧장 카일을 행해 달려들었다. 거칠게 움직이는 시카니스의 등위에서도 앤더슨은 거침없이 움직였다.
쾅-
거대한 대검이 카일의 머리 위로 묵직하게 떨어져 내렸다. 카일의 오른손에 들린 검이 부드럽게 움직이며 대검을 바깥으로 흘리듯 밀어냈다.
“흥! 어림없다. 으아합”
앤더슨이 비명 같은 기합을 지르며 밀려나는 검을 힘으로 붙잡고는 한 걸음 다가서며 밀어붙였다.
가가각-
거침없이 밀어붙이는 앤더슨의 검과 카일의 검이 얽혀들며 팽팽한 대치상태가 이어졌다.
“제법 거칠군!”
“크크, 이거 미안하게 됐군. 조금만 참게. 곧 목을 잘라줄 테니!”
앤더슨이 잔인한 웃음을 지으며 검에 더욱 힘으로 밀어 넣었다. 하지만 그는 내심 매우 초조해하고 있었다. 이곳은 블랙 와이번 위다. 아무리 덩치가 큰 블랙 와이번이라도 싸울 수 있는 공간은 한정되어 있었다. 안전장치 하나 없는 앤더슨으로서는 밀려나는 순간이 곧 죽음이었다. 더구나 지금 이 순간에도 멜파스는 블랙 와이번에게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과연 그럴 기회가 있을까?”
“뭐!”
카일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앤더슨의 검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나도 힘에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거든!”
앤더슨이 밀려나는 검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금까지 힘에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만 것이다.
“크윽…. 내가… 힘에서 밀리다니…!”
앤더슨이 잠시 당황한 사이 카일이 더욱 강하게 앤더슨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순식간에 역전되며 앤더슨이 뒤로 주춤 물러나기 시작했다.
“어때? 이래도 내 목을 자를 수 있을 것 같나?”
“크윽…. 넌 도대체 누구냐?”
“굳이 알 필요가 있을까? 곧 죽을 텐데.”
“그래도 누구에게 죽는지는 알고 싶다.”
그는 이미 삶에 대한 미련을 포기한 듯 비참한 얼굴로 카일을 보며 물었다.
하지만 그런 앤더슨을 바라보는 카일의 눈은 싸늘했다.
“그럼 넌 누구냐? 이곳 온 목적은? 왜 기사단을 공격했지?”
카일이 오히려 앤더슨을 몰아붙이며 물었다. 앤더슨은 카일의 질문에 입을 꾹 다물고는 아무 말도 없이 카일을 노려보았다.
“왜 대답이 없지? 내 정체가 궁금하다면 너도 신분을 밝혀야 하는 것 아닌가? 나도 내가 죽인 와이번 나이트의 정체가 궁금한데 말이야.”
“그건…!”
“누군가에게 내 정체를 알리고 싶은 모양인데… 난 그렇게 바보가 아니야.”
카일이 앤더슨을 싸늘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아쉽군. 단장님께서 자네 정체를 무척 궁금해하실 텐데 말이야.”
앤더슨이 고개를 저었다.
“들었나? 아무래도 난 이대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다. 그러니 넌 꼭 살아서 돌아가라!”
“조장… 님”
약속대로 있는 힘을 다해 베링산맥을 향해 달렸는지, 거친 잡음과 함께 통신구 저편에서 타스의 음성이 아련히 들려왔다.
“다행이군”
앤더슨이 거친 잡음이 섞인 타스의 목소리에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 통신영역 밖으로 멀어진 이상 아무리 블랙 와이번이라도 타스를 찾지는 못할 것이다.
앤더슨은 잠시 고통에 울부짖는 멜파스를 보며 고개를 저으며 카일을 돌아보았다.
“이제 끝을 봐야겠군. 멜파스가 아무래도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으니 말이야.”
앤더슨은 입술을 깨물며 몸 안에 남아 있던 오러를 모조리 검에 밀어 넣었다. 푸른 빛으로 물든 앤더슨의 검이 카일을 강하게 밀어붙였지만, 카일 역시 지지 않고 오러를 더욱 강하게 밀어 넣었다.
쩌어억-
순간, 갑자기 카일의 검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카일의 당황스러운 얼굴과는 반대로 앤더슨의 얼굴이 점점 밝아지기 시작했다. 이미 패했다고 생각한 순간, 갑자기 카일의 검에 균열이 가며 상황이 역전되기 시작한 것이다.
“끝이다! 놈!”
앤더슨이 더 강하게 카일의 검을 밀어붙였다.
퍽-
“크윽-.”
있는 힘껏 카일을 밀어붙이던 앤더슨이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으며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갑자기 카일이 앤더슨의 발목을 걷어차며 무게중심을 무너트려 버린 것이다. 팽팽한 대치 상황이 일순간 깨져버리자 카일은 때를 놓치지 않고 들고 있던 검을 놓아 버리곤 곧장 앤더슨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퍼버벅-
연달아 가슴에 주먹을 꽂아 넣은 카일이 뒤로 물러나려는 앤더슨의 멱살을 움켜잡고는 앞으로 끌어당겼다.
“이… 놈!”
앤더슨이 피를 토하면서도 검 손잡이로 품 안으로 파고든 카일의 머리를 내려치려 했지만, 카일이 또다시 앤더슨의 발목을 걷어차며 중심을 무너트리는 동시에 연달아 암청색으로 물든 주먹을 앤더슨의 심장에 박아넣었다.
퍽퍽-
“컥-!”
텅-
앤더슨이 검을 떨어트리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쿠우웅-
동시에 거친 충격파와 함께 시카니스 역시 골드와이번 멜파스를 붉은 대지에 처박았다.
울컥-
카일에게 멱살이 잡힌 채 매달려 있던 앤더슨이 피를 토하며 고통에 찬 얼굴로 바닥에 처박혀 미동도 없는 멜파스를 바라보았다.
“…미안… 하다.”
앤더슨이 그대로 고개를 떨궜다.
카일이 얼굴을 찌푸리며 바닥에 앤더슨을 풀어줬다.
“카일!”
앤더슨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고 있던 카일이 고개를 돌렸다. 이엘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카일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 뒤를 마크와 비터가 강화스피어와 기사들의 롱소드를 잔뜩 짊어지고는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뭐냐?”
카일이 인상을 찌푸리며 마크와 비터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강화스피어는 골드가 있어도 구하기 힘든 물건이라… 필요할 것 같아서….”
비터가 카일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비터의 말대로 강화 스피어는 골드가 있다고 함부로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와이번 나이트나 라이더들이 직접 상단과 계약을 맺고 주문생산을 하거나 용병길드를 통해 매입해야 한다. 즉 스스로 와이번 오너임을 알려야 하는 것이다.
잠시 두 사람을 바라보던 카일이 긴 한숨을 내쉰 다음 고개를 저었다.
“일단 여기서 벗어난다.”
카일의 말에 잔뜩 긴장을 하고 있던 마크와 비터가 한순간 긴장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뭘 멍하니 서 있는 거야. 빨리 움직여!”
카일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쓰러져 있는 골드와이번을 가리켰다. 마크와 비터가 멍하니 카일을 바라보았다.
“강화스피어는 저기도 있잖아!”
“어… 그래”
“….”
카일의 말에 마크와 비터가 서둘러 골드 와이번에게 달려가 안장에 남아 있던 강화스피어를 뽑아냈다. 그 모습을 피식 웃으며 바라보던 카일이 쓰러져 있는 앤더슨의 가면을 벗겨 냈다.
가면 안에서 갈색 머리의 잘생긴 중년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카일이 앤더슨의 품 안을 이리저리 뒤져보았다. 약간의 골드를 비롯한 물건이 나왔지만, 신분을 알 수 있는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이래서는 신분을 알 수 없겠는데….”
카일의 옆으로 다가온 비터가 앤더슨의 소지품을 살피며 말했다. 카일은 비터를 보며 잠시 얼굴을 찡그렸지만, 아무 말 없이 앤더슨의 소지품 중 필요 없는 것들은 버리고 얼굴을 가렸던 가면과 머리에 쓰고 있던 가죽으로 만든 투구를 챙겼다.
“서둘러!.”
“그럼… 우린….”
비터가 카일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챙길 게 있나?”
카일이 비터를 노려보며 물었다.
“…아니. 없다.”
비터가 급히 고개를 저었다. 숨겨 놓은 말이 있긴 하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그럼 서둘러 돌아간다. 오늘 저녁까진 상단에 합류해야 한다. 서둘러 간다.”
“알겠다….”
비터와 마크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블랙와이번의 등 위로 올랐다.
“가자 시카니스”
카일은 마크와 비터가 와이번에 오르자 급히 방향을 틀어 남쪽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랜트가 조심스럽게 바닥에 쓰러져 있는 골드 와이번에게로 가가갔다.
“내가… 와이번을 직접 보다니….”
랜트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천천히 와이번을 살폈다. 와이번의 사체는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가치를 가진다. 물론 영지까지 무사히 가져간다고 해도 영주와 일정 부분 나눠야겠지만 말이다.
한참 동안 와이번을 살피던 랜트의 머릿속으로 미약하지만 거친 음성이 들려왔다.
‘그대는… 누군가?’
“헉!”
랜트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는 순간, 붉은 눈동자가 랜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살… 아 있어!”
랜트가 당황한 얼굴로 골드와이번을 바라보았다.
‘그대의 말대로 난 아직 살아있다. 하지만 이대로 있으면 곧… 죽는다. 그대, 나와 맹약을 맺겠나?’
“맹약!”
‘아공간석만이 날 살릴 수 있다. 그대, 맹약을 맺겠나?’
다시 한번 골드와이번의 음성이 랜트의 머릿속을 울렸다. 랜트는 급히 품 안에서 깨끗한 수정을 갈아 만든 아공간석을 꺼냈다. 용병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 만드는 무속성 아공간석이었다.
“물론! 맹약을 맺겠다. 나 랜트, 그대와 맹약을 맺겠다.”
랜트가 골드와이번을 보며 큰소리로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