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레드스톤 전투4
“카일!”
바위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온 카일이 갑자기 이엘을 품에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반대편 끝으로 달려가 입고 있던 곰 가죽을 뒤집어 썼다.
꽝-
꽈광-
꽝-
순간 천정이 무너질 듯 폭음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며, 뜨거운 불기운이 작은 입구를 통해 바위틈 안쪽까지 밀려 들어왔다가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카일.”
심장이 떨어질 것 같은 폭음과 살을 녹일 것 같은 뜨거운 열기가 줄어들자 이엘이 용기를 내 떨리는 목소리로 카일을 불렀다.
“아직 열기가 남아 있습니다. 이대로 잠시 있는 게 좋겠습니다.”
카일의 말에 이엘이 카일의 품 안에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은 열기가 어느 정도 사라지자 품 안에 안겨 있던 이엘을 풀어줬다.
“무슨 일이죠?”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와이번 나이트들이 나타나 공격을 받았습니다.”
“와이번 나이트요?”
“네! 워낙 갑작스러운 공격이라 미쳐 대비할 틈도 없이 추적해 온 기사단 대부분이 죽었습니다. 아마도 이번 공격으로 그나마 살아남았던 기사들도 죽었을 겁니다.”
“조금 전 공격이면 화염의 스피어겠구요.”
“맞습니다.”
“그럼 대영지 이상의 가문이 보유한 와이번일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대영주들은 아닐 거예요.”
“흠… 대영주의 와이번이 아니라면 어디라도 생각하시는 겁니까?”
“화염의 스피어가 마탑에서 생산되는 마법 스피어 중 가장 싸다고는 하지만 대량으로 매입할 가문은 대영주 정도예요. 하지만 그들도 이렇게 마구잡이로 사용하지는 않아요. 고작 남부 영지의 기사단을 몰살시키는 용도로 쓰기엔 너무 비싼 값이죠.”
“그럼 어느 가문이겠습니까? 재력을 아끼지 않고 사용할 가문 말입니다.”
“왕국 안에서는 단 두 곳이 가능하죠.”
“어딥니까?”
“한 곳은 왕실, 다른 한 곳은 바로 트라발트 공작가예요. 공작가는 왕국의 물류를 움켜쥐고 있는 곳이니 이 정도 스피어는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을 거예요.”
이엘의 말처럼 트라발트 공작가라면 화염의 스피어 정도는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작령이 공격받기 전이라면 말이다.
“휴…. 어렵군요.”
“하지만 꼭 두 곳이 아닐 수도 있어요.”
“예?”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여긴 베링 산맥으로 향하는 초입이에요. 누군가… 아니, 어떤 세력이 베링 산맥에 숨어들었다면 어떨까요? 이를테면 제국이 될 수도 있어요.”
“베링 산맥은 와이번을 타고도 넘을 수 없을 만큼 높고 험준한 곳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야 와이번을 타고 넘을 때의 말이죠. 베링 산맥에는 험준하긴 하지만 수많은 작은 길들이 있다고 들었어요.”
“와이번 나이트들이 충분히 산맥으로 숨어들 수 있겠군요.”
카일이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 생각을 접었다.
“쓸데없는 고민을 했군요.”
“네?”
“누가 공격했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란 말이죠. 중요한 건 무사히 빠져나가는 겁니다.”
“그것도 그렇군요.”
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은 귀족도 아니고 그렇다고 영지를 가진 영주도 아니었다. 베링산맥에 숨어든 자들이 있다고 해도 카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이엘과 카일에게는 지금 당장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더 중요할 뿐이었다.
“일단 와이번들이 아직 남아 있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조심하세요.”
카일이 좁은 입구를 기어나 왔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검게 그을린 바위들과 스피어에 관통당해 죽임을 당한 콘트와 기사들이었다.
복수를 위해 카일을 쫓아왔지만, 결국 검 한 번 뽑아보지 못하고 정체 미상의 와이번 나이트에게 몰살당하고 만 것이다.
“쯧, 그러게 왜 쫓아와서는….”
카일이 고개를 흔들며 하늘 위를 올려다보았다. 푸른 하늘 위로는 떠다니는 구름만 보일 뿐, 와이번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카일만은 아직도 두 마리의 골드 와이번이 허공을 선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러면 빠져나가기도 쉽지 않겠는데?”
카일이 낮게 중얼거리며 바위 그늘에 숨어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는 곧 얼굴을 찌푸렸다.
“…저 녀석들은 왜 여기 있는 거야! 남문에서 기다리라고 했더니!”
카일이 눈썹을 일그러트리며 멀리서 다가오는 비터와 마크를 노려보았다.
이제 보니 아직도 와이번 나이트들이 떠나지 않고 하늘 위를 선회하는 이유가 바로 저 둘 때문인 것 같았다.
“아무튼 도움이 안 되는 놈들이군….”
카일이 고개를 저었다.
이곳은 바위들이 겹겹이 쌓인 곳이라 숨을 곳이 많았다.
누군가 직접 내려와 주변을 확인하지 않는 이상 모두 죽었다고 확신할 수 없는 곳이란 말이었다.
때문에 화염의 스피어를 퍼부은 와이번 나이트들이 구름 위에서 생존자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때 바위틈에 숨어 있던 마크와 비터가 성급하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카일!”
비터가 급히 카일에게 달려왔다. 기사단이 카일을 공격할 때 그들도 기사들의 후미를 공격하려 했었다. 뒤에서 소란이 일면 기사들의 전력이 분산돼 카일에게 도움이 될 거란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와이번 나이트들의 갑작스러운 공격이 시작되자 비터와 마크는 바위틈에 숨어 지금껏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있다가 와이번들이 사라지자 곧장 달려 나온 것이다.
퍽-
카일이 달려오는 비터를 곧장 걷어찼다.
“크억-!”
비터가 바닥을 굴러 쓰러졌다.
“이게 무슨 짓이냐!”
마크가 바닥에 쓰러진 비터의 앞을 막아서며 소리쳤다.
“무슨 짓? 지금 너희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봐라!”
“무슨 소리냐!”
“멍청한 놈들, 저길 보고도 할 말이 있느냐!”
카일이 하늘 위를 가리켰다.
“뭐어….”
마크가 깜짝 놀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구름 속에서 두 마리의 와이번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와이번… 나이트!”
“이제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겠냐!”
카일이 두 사람을 노려보자 비터의 앞을 막아선 마크도 더 이상 카일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수련법을 배우고도 검을 훔쳐 달아났고, 아킨스 영지에서는 두 사람을 구해주기까지 했다. 헌데 이번엔 성급하게 모습을 드러내 와이번 나이트에게 카일의 위치만 노출시켜 준 것이다.
“미안하다. 우리 때문에….”
마크와 비터는 차마 카일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상대는 조금 전 엄청난 폭격을 가한 와이번 나이트였다. 아무리 카일이라도 더 이상 와이번 나이트를 피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니, 카일 뿐만 아니라 마크와 비터 역시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흥! 알긴 아는군!”
카일은 두 사람을 외면하며 곧장 바위를 박차고 공중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순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거대한 그림자가 허공을 스치듯 지나며 공중으로 뛰어오른 카일을 낚아채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뭐야…!”
갑작스러운 카일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비터와 마크는 하늘 위를 새까맣게 뒤덮은 거대한 그림자의 위압감에 주춤주춤 물러났다.
“와… 이번….”
비터가 스스로 내뱉은 말에 깜짝 놀라 다시 허공을 올려다보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블랙 와이번…. 그럼 카일이 와이번 나이트….”
“정확히는 와이번 라이더가 맞겠군요. 카일은 기사가 아니니까요.”
갑자기 들려온 와이번의 괴성에 급히 바위틈에서 빠져나온 이엘이 비터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당신은?”
“절 모르겠나요?”
이엘이 쓰고 있던 가면을 벗었다.
“전 이엘이라고 해요. 아일론 상단에 있을 때 보았지요?”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어떻게 라니요? 당신들을 찾으러 왔잖아요.”
이엘이 한심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건….”
“궁금하군요. 당신들… 정체가 뭐죠?”
이엘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어쩌면 카일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설레기까지 했다.
“그게 왜 궁금한 겁니까?”
“이상해서요. 카일은 남의 일에 끼어드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데 당신들 때문에 아킨스 영지와의 싸움을 마다하지 않았잖아요.”
이엘은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 보 듯 두 사람을 향해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번엔 외부에 드러내길 꺼려하던 시카니스까지 불러내며 당신들을 구하려 하죠. 왜 그런 걸까요? 당신들이 훔쳐간 검 때문에?”
“그런 이야기는… 카일에게 직접 들으십시오.”
마크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추려는 듯 이엘을 외면하며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말하지 않아도 돼요. 이미 짐작하고 있으니까요.”
이엘은 전부 알고 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네?”
“카일이 다른 건 몰라도 가족에 대해서만큼은 손해를 감수하죠.”
“그걸… 어떻게….”
“어머, 정말 카일과 가족? 아니죠…. 카일에겐 아버지뿐이니 직계일 리는 없고… 외가 쪽도 아닐 거예요. 카일의 어머니는 분명 가족이 없다고 했으니. 그럼 먼 친척?”
마크와 비터는 그때서야 이엘의 유도신문에 넘어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하시죠. 지금은 카일이 걱정이군요.”
마크가 더는 대답을 하지 않겠다는 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요. 카일이 분명 이길 테니까요.”
이엘이 미소를 지으며 확신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 * *
구름 위에서 빠져나온 두 마리의 와이번이 지상으로 급강하를 시작했다. 모습을 드러낸 생존자와 새롭게 나타난 두 사람을 단번에 처치하기 위해서였다.
키아악-
하지만 어디선가 들려온 괴성과 함께 나타난 거대한 블랙 와이번에 깜짝 놀라 급히 기수를 돌려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블랙와이번!”
앤더슨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설마 이곳에서 블랙와이번을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조장님! 블랙와이번입니다. 피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작은 근거리 통신구에서 들려온 타스의 당황스러운 목소리에 앤더슨이 고민에 빠졌다. 블랙와이번은 다른 와이번에 비해 덩치가 큰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와이번의 기량만 놓고 본다면 골드와이번으론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강력한 와이번이었다.
하지만 공중전은 와이번의 기량만으로 승리할 수 없다. 그보다는 와이번 나이트의 역량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때문에 그와 부하들은 와이번 나이트가 된 이후 지금까지 많은 시간 비행을 하며 교감하고 와이번의 움직임을 익히도록 노력했다.
“블랙와이번이라 겁먹을 것 없다. 녀석은 맹약을 맺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햇병아리일 뿐이다.”
“일단 단장님께 먼저 알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갑자기 나타난 블랙와이번이다. 여기서 놈을 놓치면 보고한다고 해도 다시 찾을 수 있단 보장이 없다. 일단 여기서 잡는다.”
앤더스는 단호하게 말하며 스피어를 뽑아 들었다. 그리곤 블랙와이번을 향해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타스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하강하는 엔더스의 와이번을 바라보았지만, 그렇다고 조장의 명을 어길 수는 없었다.
타스는 어쩔 수 없이 앤더스를 따라 급강하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