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레드스톤 전투3
레드스톤 지역은 사람 키보다 큰 바위들이 구릉 위로 솟아 있어, 비좁은 바위와 바위 사이를 통과하거나 바위를 뛰어넘어야 하는 만큼 통과하기 힘든 곳이었다.
카일이야 오랫동안 오크랜드를 지나며 비슷한 지형을 수차례 넘나들었지만, 검술도 익히지 않은 이엘이 지나기에는 무척 힘든 곳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작은 체구 탓에 좁은 바위틈을 무리 없이 지날 수 있다는 사실 정도였다.
툭-
커다란 바위에 올라 주변을 살피고 있단 카일이 가볍게 아래로 뛰어내렸다.
“이쯤에서 포기하면 좋겠지만… 아니군요.”
“지금도 쫓아오고 있나요?”
“아무래도 끝까지 쫓아올 생각 같습니다.”
카일이 바닥에 꽂아둔 두 개의 검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로하스와 핀크의 검들이었다. 사실 카일은 핀크가 다시는 오러를 쌓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일부러 가슴뼈를 부러트렸고, 내상을 가중시키기 위해 오러를 밀어 넣은 것뿐이었다. 딱 추적에 나설 수 없을 정도의 부상을 입혔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로하스는 핀크보다 월등히 강한 상대였다. 그만큼 제압하기 힘든 상대였고 기사단까지 도착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목숨을 빼앗은 것이다.
눈앞에서 기사단장이 죽었으니 기사들로서는 카일을 반드시 잡으려 할 것이다.
“그럼 이제 어쩌죠?”
“싸움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아무래도 이엘은 잠시 숨어있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숨어요?”
“이곳은 지형이 고르지 않아 집단전이 어렵죠. 개개인의 실력이 저보다 떨어지는 기사단에겐 아주 불리한 곳입니다. 이 정도는 기사들 정도 된다면 충분히 알고 있을 겁니다.”
“불리한데도 여기까지 따라왔다면… 죽음을 각오했단 말이군요.”
“맞습니다. 그래서….”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절 보호하며 다수의 기사들을 상대로 싸우긴 힘들단 말이군요.”
이엘의 말에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이엘을 보호하려 하면 할수록 이엘을 집요하게 노릴 겁니다.”
“제가… 카일의 약점이 될 거란 말인가요.”
“맞습니다. 그러니 잠시만 숨어 계십시오.”
“그런 이유라면 알겠어요. 그럼 어디에 숨어있는 게 좋을까요.”
“마침 적당한 곳을 보아두었습니다.”
“좋아요.”
이엘이 쉽게 동의해 주자 카일은 먼저 보아놓았던 길쭉한 바위가 쓰러진 곳으로 향했다. 바위 아래쪽에는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낮고 좁은 입구가 있었는데, 안쪽은 바닥이 푹 꺼져있어 제법 널찍했다.
“이만하면 괜찮은 것 같습니다. 전 기사들을 상대해야 하니 밖에 있겠습니다.”
“조심하세요.”
“걱정 마십시오.”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바위틈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입구를 등지고 섰다. 눈을 감고 얼마나 있었을까? 카일의 주변에서 수많은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리고 있었나?”
“더 이상 꼬리를 달고 갈 수는 없을 것 같아서 말이야.”
“설마 로하스 단장님을 죽이고도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았나?”
“오히려 내가 묻고 싶군. 설마 날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카일이 바닥에 꽂아 놓은 두 개의 검을 뽑아 들며 말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콘트의 눈동자가 분노로 물들었다.
“당장 로하스 단장님의 검을 내놓아라!”
기사에게 검은 생명과도 같아, 죽으면 평생 함께한 검을 기사와 함께 묻어주는 것이 관례와 같았다. 더구나 카일은 로하스를 죽였다.
콘트로서는 카일의 손에 로하스의 검이 들린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결투에서 이기면 승자가 전리품을 가지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 이 검은 내 전리품이다. 왜 내가 돌려줘야 하지?”
“검은 기사의 생명과 같은 것이다. 아무리 전리품이라도 검을… 넌 누구냐? 명예로운 기사는 남의 검을 탐하지 않는다. 정체를 밝혀라!”
“내 정체가 중요한가? 어차피 알아도 소용이 없을 텐데.”
“자신만만하군!”
콘트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소리쳤다.
“기회를 주겠다. 돌아가라!”
“흥! 순순히 물러날 것 같았으면 여기까지 쫓아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살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너희는 날 이기지 못해.”
“하하하! 아무리 너라도 우리 모두를 상대로 온전하게 빠져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지켜야 할 사람이 있다면 말이다.”
콘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카일의 뒤에 있는 작은 바위틈으로 향했다.
바위틈 주변에 남아 있는 흔적만으로도 누군가 숨어있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글쎄? 날 넘어갈 수도 없을 것 같은데?”
카일이 입구를 막아서자 콘트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약점이라 생각했던 작은 바위틈 앞을 막아선 카일의 모습이 마치 단단한 성벽을 마주한 것 같았다.
“널 죽이진 못해도 널 뚫을 수는 있을 것이다. 너에게 우리가 느꼈던 고통을 똑같이 되갚아 주마!”
“그럼 말이 필요 없겠군, 와라!”
카일의 고함 소리를 신호로, 카일을 중심으로 넓게 포위하고 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고 바위에서 솟구쳤다. 아니, 솟구치려는 순간 하늘 위에서 무엇인가가 빠르게 떨어져 내렸다.
쉬익-
“크억-!”
꽝-
막 바위에서 도약하려던 기사의 가슴을 뚫고 나온 스피어가 바닥에 깊숙이 박혀 들었다.
“와이번! 와이번이다.”
기사 중 하나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비명 같은 고함을 쳤다.
쉬익-
순간 또 다른 스피어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소리치는 기사를 꿰뚫었다.
“피해라!”
콘트가 고함을 치며 옆에 있던 기사를 안고 바닥을 뒹굴었다.
꽝-
콘트가 있던 자리 위로 하늘에서 떨어진 스피어가 깊숙이 박혀 들었다.
꽝-
꽈광-
“크윽-!”
“크아악!!”
스피어가 바닥으로 떨어질 때마다 기사들의 고통에 찬 비명이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이럴 수가! 기사단이… 기사단이! 어떻게…!”
콘트가 처참하게 죽어가는 기사들을 보며 울분에 찬 음성으로 소리쳤다.
“네놈! 네놈 짓이냐!”
분노한 콘트가 바위틈에 몸을 숨긴 채 심각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 보는 카일을 노려보며 외쳤다.
“멍청한 놈!”
“뭐!”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해라!”
카일은 콘트를 무시하곤 하늘위를 선회하는 와이번들을 살폈다. 아무래도 이곳에 있는 모두를 죽이기 전엔 돌아가지 않을 것 같았다. 카일은 몸을 최대한 낮추고 바위에 바짝 몸을 기댄 후 조심스럽게 앞으로 향했다.
콰드득-
카일이 손을 뻗어 바닥에 박힌 스피어를 붙잡았다. 스피어를 뽑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높은 하늘 위에서 떨어진 스피어는 바닥에 깊게 박혀 쉽게 뽑히지 않았다.
“으합!”
짧은 기합과 함께 스피어를 잡은 카일의 팔 근육이 부풀어 올랐다. 곧 암청색 오러가 스피어를 감싸기 시작했다.
끼이익-
귀를 간질이는 낮은 소음과 함께 바닥에 박힌 스피어가 서서히 뽑혀 나왔다.
“뭘 하려는 것이냐!”
스피어를 뽑아내는 카일의 행동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콘트가 카일을 매섭게 노려보며 물었다.
“받은 게 있으면 돌려줘야 할 거 아냐! 그냥 이러고 저놈들이 물러갈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냐!”
카일은 뽑아낸 스피어를 들고 다시 조심스럽게 바위에 붙어 또 다른 스피어로 다가갔다. 그 모습을 보며 잠시 망설이던 콘트도 조심스럽게 일어나 카일을 따라 바닥을 기어 바닥에 박힌 스피어를 뽑아내기 시작했다.
‘온다. 조심해라.’
카일의 머릿속으로 시카니스가 경고했다.
“와이번이다.”
카일이 재빨리 몸을 낮추며 하늘에서 급강하하는 와이번을 살폈다.
“모두 피해!”
카일의 경고에 콘트가 붙잡고 있던 스피어를 재빨리 놓고는 뒤로 물러났다. 살아남은 기사들 역시 재빨리 바위틈으로 몸을 날렸다.
쉬이잉-
날개를 활짝 펼치며 낮게 땅을 스치듯 지나가는 와이번의 위에는 얼굴을 가면으로 가린 정체불명의 사내가 있었다. 그는 들어 올린 붉은 스피어를 바닥을 향해 던졌다.
쉬잉-
빠르게 떨어져 내리던 스피어는 정확히 기사들이 숨은 바위틈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꽝-
순간 이전과는 확연하게 다른 이질적인 충격파와 함께 붉은 불꽃이 주변으로 확 퍼져나가며 순식간에 주변의 온도를 높였다.
그와 함께 바위틈에 숨어있던 기사 2명이 온몸에 불이 붙은 채 밖으로 뛰쳐나와 고통스런 비명을 질렀다.
“크아악-!”
“아악!”
와이번 나이트는 화염의 스피어를 이용해 바위틈에 숨어있던 기사들을 산채로 태워버린 것이다.
“아… 안 돼!”
온몸에 불이 붙은 기사들의 고통스러운 모습에 콘트가 달려나가려 했지만, 마지막 남은 두 명의 기사들이 필사적으로 말렸다.
“콘트 님! 안됩니다.”
“위험합니다.”
“놔라! 저들은 아직 살아 있다. 가서 구해야 해! 놓으란 말이다.”
콘트가 발버둥을 쳤지만 이미 그들을 구하기엔 늦었다는 사실은 콘트 본인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은 콘트와 그런 콘트를 바라보는 기사들이 하늘 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는 와이번을 허탈하게 바라보다.
끼이익-
그때, 귀를 간질거리는 낮은 소음이 또다시 들리자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던 세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소리가 난 곳으로 옮겨갔다.
그곳에선 카일이 벌써 3자루의 스피어를 뽑아내고 있었다.
“하하하!”
스피어를 뽑아내는 카일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콘트가 갑자기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그래! 어차피 이곳에 온 목적은 네놈을 죽이기 위해서다. 비록 내 손으로 죽이지 못해 안타깝지만, 너도 와이번의 공격만큼은 피하지 못할 테니 이곳에 온 목적만은 달성하겠군. 하하하.”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한가? 그럼 그렇게 생각하도록.”
카일은 콘트의 말을 무시하며 4번째 스피어를 뽑았다. 순간 하늘을 선화하던 와이번이 또다시 떨어져 내렸다.
마치 매가 사냥감을 낚아채듯 빠르고 위협적이었다.
카일은 곧장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와이번을 보며 손에 들린 스피어를 바닥에 꽂은 후 스피어 한 자루를 들어 올렸다. 순간 카일의 손에서 피어오른 암청색의 오러가 스피어를 잠식해 들어갔다.
웅웅웅
암청색으로 물든 스피어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때를 같이해 빠르게 떨어져 내리던 와이번이 날개를 활짝 펼치며 속도를 줄이더니 바닥을 쓸듯 낮게 비행했다. 그리고 앞서와 같이 와이번 위의 사내가 붉은 스피어를 머리 위로 높게 들어 올렸다.
‘지금이다.’
카일은 와이번 나이트를 확인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들고 있던 스피어를 힘껏 던졌다.
위잉-
카일이 던진 스피어가 빠른 속도로 와이번을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카일은 날아간 스피어는 신경도 쓰지 않고 바닥에 박아놓은 스피어를 연달아 뽑아 또다시 있는 함껏 던졌다.
쉬익-
쉬익-
“헉-!”
생각지도 못한 순간 갑작스럽게 날아든 3발의 스피어에 화염의 스피어를 던지려던 와이번 나이트가 깜짝 놀라 급히 몸을 틀어 스피어를 피했다.
사실 카일이 던진 스피어는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다.
빠르게 날아오는 와이번 나이트를 지상에서 스피어를 던져 맞추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와이번 나이트가 몸을 피한 건 갑자기 날아든 스피어에 놀란 반사적인 행동일 뿐이었다. 그리고 바로 카일이 노린 것이 이것이었다.
와이번 나이트가 스피어를 피해 기수를 트는 순간, 카일이 경사진 바위를 박차고 높이 뛰어올라 손에 들린 마지막 스피어를 있는 힘껏 던졌다.
앞서 던진 3발의 스피어로 와이번이 몸을 돌리며 방향을 바꾸는 순간을 노린 한 수였다.
쉬이익-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며 날아가는 스피어는 정확히 와이번 나이트를 향했다.
퍼억-
하지만 카일의 의도는 정확하게 빗나갔다. 맹약자의 위험을 감지한 골드와이번이 급히 동체를 뒤튼 덕분에, 스피어는 와이번 나이트의 어깨를 스쳐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강력한 스핀으로 인해 와이번 나이트의 오른쪽 어깨 살점이 통째로 뜯겨 나가며 동시에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물론 안장에 연결된 끈으로 인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은 면했지만, 더 이상의 전투는 불가능해 보였다.
“아깝군!”
카일이 멀리 베링 산맥을 향해 다급히 날아가는 와이번을 보며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카일 역시 마냥 여유를 부릴 상황은 아니었다.
하늘을 선회하던 두 마리의 와이번들이 곧장 급강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넌… 도대체 누구냐!”
비록 실패는 했지만, 단 4개의 스피어로 와이번 나이트를 다치게 했다. 지금껏 콘트가 알고 있던 상식으론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카일 역시 워드의 조언으로 끊임없이 시카니스와 생각을 공유하며 심상 훈련을 하지 않았다면 와이번의 움직임을 예측해 모험을 하진 못했을 것이다.
“궁금증은 살아남은 뒤에 풀도록!”
카일은 콘트를 보며 하늘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급히 달려가 미끄러지듯 바닥으로 몸을 낮춰 이엘이 숨어있던 바위틈으로 사라졌다.
콘트는 사라진 카일을 멍하니 바라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런!”
급강하하는 두 마리의 와이번과 함께 자신을 향해 빠르게 떨어지는 붉은 스피어가 콘트의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