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레드스톤 전투2
식당을 빠져나온 마크와 비터는 남문을 벗어나 인근 숲에서 카일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어떡하지…!”
비터가 남문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다시 들어가 볼까? 혹 카일이 붙잡히기라도 했으면 큰일이잖아.”
“멍청한 소리 좀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정신 사나우니까!”
마크가 비터를 보며 버럭 고함을 쳤다. 그 모습에 비터의 얼굴에 잠시 당황스러움이 번졌다. 툴툴거리기도 하고 간혹 말싸움도 했지만, 지금처럼 소리를 높여 화를 낸 적은 드물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그도 지금의 상황이 당황스러운 것이다.
“아니…. 난 그냥 걱정돼서….”
“지금 녀석을 걱정할 때가 아니란 말이야! 녀석이 살아나오면 우릴 가만히 둘 것 같아? 어쩌면 우리를 보자마자 단칼에 죽여버릴지도 모른단 말이야!”
마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휴…. 어쩔 수 없잖아. 우리가 잘못한 일이니….”
비터나 바닥에 털석 주저앉아 힘없이 말했다.
“너……!”
“알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하지만 잘못을 했으니 대가를 받아야겠지. 그리고 이젠 녀석을 피하고 싶지도 않아. 아니, 피해서도 안 되고.”
“그럼 영지에 남아 있는 가족들은? 그들은 아직도 우릴 기다리고 있을 거야. 여기서 죽기라도 하면….”
“그러니 일단, 카일에게 사정을 해 봐야지….”
“그런다고 녀석의 마음이 풀릴까?”
“어차피 방법이 없잖아. 도망친다고 해도 왠지 다시 녀석에게 붙잡힐 것 같기도 하고.”
“그건….”
비터의 말에 마크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비터의 말대로 아무리 도망을 쳐도 카일을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카일이다!”
그때였다. 비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막 남문을 벗어난 카일이 시야에 들어왔다.
“가자.”
“기, 기다려! 기사단이다!”
비터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말에 오르자, 마크가 급히 달려가 비터의 말고삐를 붙잡았다.
“지금 움직이면 카일에게 다가서기도 전에 우리가 먼저 들킨다. 기다려!”
“하지만… 녀석이 위험할 수도 있어!”
비터가 카일의 뒤를 쫓는 기사단을 보며 초조하게 말했다.
“휴… 쫓아가지 말자는 게 아니라, 일단 거리를 두고 쫓아가 보잔 말이야. 그래야 녀석에게 도움이라도 될 게 아니야!”
마크가 고개를 흔들며 말 위에 올랐다.
“내가 앞장설 테니 따라와.”
마크가 주변 지형을 살피더니 곧장 말을 몰아 달려 나갔다. 하지만 마크가 달려가는 방향은 카일이 달려간 곳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어딜 가는 거야! 카일이 향한 곳은 베링 산맥이 있는 동쪽이야! 남쪽이 아니라”
“저쪽으로 가면 절벽을 돌아 남쪽으로 우회해! 여기로 가는 게 더 빨라!”
마크가 비터의 대답도 듣지 않고 곧장 남쪽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비터가 그 뒤를 바짝 붙어 달려 나갔다.
* * *
카일과 이엘이 탄 말이 쉬지 않고 동쪽 베링산맥을 향해 달려 나갔다. 뒤를 쫓는 기사단을 데리고 남쪽에서 올라오는 아일론 상단과 합류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더는 말이 갈 수 없을 것 같아요.”
눈앞에 붉은빛이 도는 크고 작은 바위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는 넓은 구릉지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본격적으로 베링 산맥의 초입이라 할 수 있는 레드스톤 지대에 들어선 것이다. 이곳은 흙과 바위 속에 함유된 철 성분이 공기 중에 산화되며 붉은색으로 변한 넓은 구릉지대가 형성된 곳이다.
“차라리 잘됐습니다. 도망치기도 귀찮았는데….”
카일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지금껏 카일이 도망을 친 건 기사단이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말을 탄 다수의 기사단을 상대로 포위된 상태에서 이엘을 보호하며 싸울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일단 말을 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바위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어 한 번에 상대할 기사의 숫자도 한정적이라 오히려 카일에게 유리한 곳이었다.
“여기서 기사단을 상대할 생각인가요?”
“계속 쫓아온다면 어쩔 수 없겠죠.”
카일이 담담하게 말하며 천천히 레드스톤 지대로 들어섰다.
“여긴 전부 붉은색이군요.”
“철 때문입니다. 공기와 만나며 붉게 녹이 생긴 겁니다.”
“이 넓은 구릉지대 전체가 모두 철광석이란 말인가요?”
“철이 많이 함유되어 있으니 철광석이라 할 수 있겠군요.”
“이렇게 넓은 노천광산을 왜 가만히 내버려 둔 거죠?”
“노천광산이라고 모두 개발할 수는 없습니다. 철 함유량도 높아야 하지만, 개발에 따른 이익도 있어야 하니까요.”
카일이 바위를 한 번 쓸어보며 말을 이었다.
“이곳에 있는 철광석은 개발은 할 수 있겠지만, 그만큼 들어가는 골드가 많아 이익이 나지 않을 겁니다.”
“전 광산에 대해 잘 모르지만 이렇게 넓은 노천광산을 개발해도 수익이 나지 않는다니 이해되지 않아요?”
“주변을 보십시오. 넓은 숲의 대부분이 큰 나무보단 작은 잡목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잡목으론 대량의 광석을 녹일 수 없죠. 그렇다고 외부에서 목제를 사들이기에는 운송하는 데 많은 비용이 듭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다핸 남작령을 통해 대량의 나무를 조달하는 것이겠지만, 아킨스 자작으로서는 경쟁자에게 제물을 가져다 바치는 꼴이기에 결코 선택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마법화로가 있잖아요. 마나석만 교체해 준다면 얼마든지 철광석을 녹일 수 있을 거예요.”
“마나석을 수시로 교체해야 하니 더 많은 비용이 듭니다. 대장장이들도 고합금을 만들 때가 아니면 거의 사용하지 않죠.”
“결국 넓은 노천광산이 눈앞에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이군요.”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킨스 자작가도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대규모의 철광산을 만들고 싶어 했지만, 채산성이 적어 포기한 곳이었다.
물론 카일이 가진 강철제련기술이 있다면 이곳의 가치는 달라질 것이다. 같은 강도의 무기라면 상대적으로 값비싼 고 합금 금속보단 대량생산이 가능하면서도 가격이 싼 강철을 더 선호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카일은 강철에 대한 비밀을 세상에 공개할 생각이 전혀 없지만 말이다.
카일과 이엘이 레드스톤 지대 안쪽으로 사라지고 얼마 뒤, 콘트가 이끄는 20여 명의 기사들이 도착했다.
“흠…. 레드스톤 지대군….”
콘트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곳은 수 많은 바위들이 불규칙적으로 솟아 있는 곳이라, 기사단이 진형을 갖추고 전투를 벌이기는 사실상 불가능한 곳이었다.
“추적이 가능한가?”
“발자국과 보폭이 안정된 것으로 보아 전혀 서두른 흔적이 없습니다.”
추격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흔적을 남긴 것은 얼마든지 따라도 좋다는 의미였고, 기사단 모두를 죽일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던 콘트가 결정을 내렸는지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너힌 그만 돌아가라.”
콘트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무슨 말씀입니까! 돌아가라니.”
“조금만 더 가면 곧 놈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겁니다.”
콘트의 말에 기사들이 하나둘씩 목소리를 높였다.
“…너희도 알 것이다. 놈은 로하스 단장님을 죽일 정도로 강하다. 우리 모두가 진형을 갖추고 달려들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우리 기사단은 모두 로하스 단장님으로부터 혹독한 수련을 받았습니다. 결코 놈에게 지지 않을 겁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면 놈을 잡을 수 있습니다.”
콘트는 기사들의 말에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훌륭하다. 만약 놈을 넓은 개활지에서 따라잡았다면 난 망설임 없이 너희와 함께 놈을 공격했을 거다. 하지만… 이곳은 험준한 바위 지대다. 놈을 찾는다 해도 진형조차 갖추지 못하고 각개격파 당하고 말 것이다.”
콘트의 말에 기사들의 얼굴이 침울하게 굳어졌다.
“그럼… 콘트 님은 어쩌시려는 겁니까?”
“나 말인가?”
“그렇습니다.”
콘트는 가만히 고개를 돌려 붉은 대지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오늘따라 붉은 피를 뿌려놓은 듯 더욱 붉고 스산해 보였다.
“로하스 단장께서 괴한에 목숨을 잃었다. 그분을 위해 검을 들고 싸워줄 사람이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저희도 가겠습니다.”
“콘트 님 혼자 보낼 수는 없습니다.”
“그럴 수는 없다. 이곳은 사지다. 너희 모두를 사지로 끌고 갈 수는 없다.”
“하지만 콘트 님은 지금 놈을 쫓으려 하시지 않습니까?”
“난 종자 시절부터 지금껏 단 한 번도 로하스 단장님의 곁을 떠난 적이 없다. 그러니 내가 가는 것이 온당하다. 그러니 너희들은 돌아가라!”
콘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몸을 돌렸다.
“돌아가라! 이건 명령이다.”
콘트가 마지막 말을 남기고 걸음을 옮겼다. 그때 정렬해 있던 기사 중 하나가 콘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지금 명령을 어기려는 것이냐?”
“저 역시 로하스 님을 존경했고, 줄곧 콘트 님을 모셨습니다. 콘트 님께서 사지로 걸어 들어간다면 콘트 님 곁에도 역시 함께 싸워줄 사람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가겠습니다. 동료와 함께 검을 들겠습니다.”
기사들이 하나둘 콘트의 뒤에 섰다.
그 모습에 콘트의 가슴이 절로 뜨거워졌다.
“이 길은 죽음의 길이다. 그래도 가겠나?”
“가겠습니다.”
“말리셔도 따르겠습니다.”
“…좋다! 더 이상 너희를 말리지 않겠다. 당당하게 놈을 만나 최선을 다해 후회 없이 싸워보자!”
콘트가 크게 외치며 검을 뽑아 들었다.
“당당하게 맞서자!”
“후회 없이 싸우자!”
기사들 역시 검을 뽑아 들며 소리를 높였다. 지금껏 로하스 단장의 죽음으로 가라앉았던 기사단의 사기가 부쩍 달아올랐다.
“가자!”
콘트가 다시 앞장서서 카일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기사단의 뒤를 따르던 마크와 비터가 커다란 바위 뒤에 숨어 바라보고 있었다.
“로하스 단장이 죽었다고? 카일의 손에?”
마크가 깜짝 놀라 중얼거렸다. 남부 영지에서 가장 강한 기사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모두 다핸 남작령의 켈토 기사단장이라 말할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상급 엑스퍼트에 오를 기사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모두 아킨스 자작령의 로하스라 말할 정도로 강한 자였다. 그는 켈토 단장보다 열살이나 어렸지만, 그와 대등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로하스를 적지인 아킨스 자작령 한복판에서 죽이고 이곳까지 도주해온 카일의 강함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가자.”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비터가 마크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로하스를 죽였다면 카일도 부상을 당했을 거야. 기사단이 카일을 찾기 전에 먼저 합류해야 해.”
“휴…. 여기까지 쫓아오긴 했지만, 우리 실력으론 저기 있는 기사 한 명 상대하기도 벅차다.”
“아니. 한 명, 그 이상도 상대할 수 있어.”
비터가 웃으며 자신의 허리를 가리켰다.
“아직 검을 돌려주지 않았잖아.”
“아!”
마크가 놀란 얼굴로 비터를 바라보았다. 그동안 검을 돌려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 이다.
“가자!”
비터가 다시 한번 마크를 재촉했다.
“그래. 죽든 살든 가 보자”
마크가 다시 기사들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이들이 레드스톤 지역에 발을 들여놓기 전부터 누군가 이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