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아킨스 자작령2
“이것도 가져가지요.”
“자네 아주 통이 크군, 아주 좋아”
노인이 웃으며 손에 들려있던 가죽 코트를 탁자에 올려놓았다.
“어떤 가죽인지 알겠나?”
“이건… 붉은 여우 가죽인데… 문제가 있군요.”
“역시 대단하군!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단번에 알아맞히다니…. 맞다! 어느 멍청한 기사 녀석이 반 토막을 만들어 가져왔더군.”
노인이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이었다.
“어쩌겠나! 기사가 가져온 가죽이라 안 살 수도 없고, 할 수 없이 이렇게 이어 붙여 짧은 코트를 만들었다네.”
노인이 카일의 눈치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미소를 지으며 이엘을 바라보았다.
“어떤가? 레이디에겐 투박한 곰 가죽보단 흠집은 좀 있지만 여우 가죽이 좋지 않겠나? 이 정도면 흠은 있지만 제법 잘 만든 코트인데!”
노인의 말에 이엘이 가죽 코트를 이리저리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명문 귀족가의 영애로 평생 고급스러운 의상만 보고 입었던 이엘에게 이런 여우 코트가 마음에 들 리 없었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추위로 고생을 한 이엘에겐 이런 투박한 여우 코트마저도 감사할 따름이었다.
“좋습니다. 이걸로 하죠.”
“하하! 결정이 빨라 좋군!”
노인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카일을 살피며 말했다.
“새벽부터 찾아온 첫 손님이니 싸게 해 주겠네! 모두 합해 딱 5골드 어떤가?”
마치 큰 인심을 쓰듯 손바닥을 활짝 펴 보이며 말했다.
‘일단 좀 많이 불러 놓고 선심 쓰듯이 깎아 주면 녀석도 좋다고 가져가겠지.’
노인이 카일의 표정을 살피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일단 가격을 높게 불러야 많이 깎더라도 손해를 보지 않고 묵은 재고를 넘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5골드나 말입니까? 너무 비싼데….”
“어허! 전혀 비싸지 않아! 비록 문제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여우 가죽 아닌가! 5골드면 곰 가죽은 덤으로 가져가는 거네!”
“그래도 너무 비싼데….”
고민하듯 볼을 긁적이며 침묵하는 카일을 노인이 초조하게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5골드는 받아야 하지만… 첫 손님이니….”
“……좋습니다. 5골드 드리지요.”
카일의 말에 노인이 오히려 깜짝 놀라 되물었다.
“정말 5골드를 주겠단 말인가? 그러기엔 너무 비싼데….”
“조금 전엔 5골드를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카일의 말에 노인이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야 자네가 값을 깎겠거니 했지, 원래 장사가 다 그런 거 아니겠나! 처음엔 값을 좀 많이 불렀다가 적당히 깎아 주면, 사는 사람도 기분이 좋고 파는 사람도 손해 보지 않아 좋고 말이야!”
“하하! 그것도 그렇군요.”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이렇게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어떻게 말인가?”
“일단 제가 5골드를 드리기로 했으니 그대로 드리겠습니다. 대신 저희에게 아침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침… 말인가?”
“어려우십니까?”
“아니…. 그야 어렵지는 않지만… 아침이라고 해야 그냥 평범한데 괜찮겠나? 차라리 근방에 있는 식당이 더 좋을 텐데.”
노인이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부탁드리지요.”
카일이 품 안에서 금화 다섯 개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잠시! 잠시만 기다리게! 내 곧 준비하겠네!”
곧장 금화를 내어줄지 몰랐던 노인이 활짝 웃으며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금화를 쓸어 담았다. 그리고는 황급히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여기 앉아 있으면 곧 따뜻해질 겁니다.”
카일이 벽난로 앞에 놓여 있는 가죽 의자에 이엘을 앉히고 여우가죽 코트를 덮어줬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카일이 웃으며 이엘의 반대편 의자에 앉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아침을 달라고 한 거죠? 곧 마크와 비터란 용병이 도착할 것 같은데요?”
“저길 보십시오.”
카일이 이엘의 물음에 웃으며 한쪽에 뚫려있는 창문을 가리켰다.
“여기 가죽공방은 광장을 중심으로 북쪽 끝에 위치해 남쪽을 바라보고 있지요.”
이엘은 곧바로 카일의 말을 알아들었다.
“아! 맞아요. 여기서 창밖을 바라보면 남문을 통해 들어오는 두 사람을 바로 확인할 수 있겠군요.”
“정확합니다.”
“그럼 처음부터 여길 들어온 이유가 감시 때문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마침 아가씨께서도 옷이 필요할 것 같아 들어온 겁니다. 여길 들어와 보니 창밖을 통해 남문으로 향하는 길이 보이더군요. 거기다 이렇게 벽난로도 있으니 잘됐다 싶어 부탁해 본 겁니다.”
“그렇군요.”
이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창밖을 바라보는 카일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리고는 잠시 망설이다 물었다.
“카일은 언제까지 절 아가씨라고 부를 건가요?”
“네? 갑자기 무슨….”
카일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이엘을 보며 물었다.
“그렇잖아요? 전 지금 그리넨 백작가의 영애가 아닌 자유민 이엘이에요. 그런데 계속 절 아가씨라 부르면 주변에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어요?”
“그건….”
“그냥 편하게 이엘이라 불러주면 안되나요?”
이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전 지금 자유민 이엘인 걸요.”
“그렇다면… 알겠어요. 이엘.”
“고마워요. 카일! 부탁을 들어줘서.”
이엘이 미소를 지으며 벽난로의 뜨거운 열기로 붉어진 얼굴을 매만졌다.
“이거 좋은 분위기를 이 늙은이가 망친 건 아닌지 모르겠구만.”
노인이 커다란 트레이를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트레이 위에는 이제 막 구워낸 커다란 호밀빵과 하얀 버터, 산딸기 잼, 훈제한 고기, 갓 짜낸 우유와 마지막으로 완두콩과 각종 야채를 넣어 끓인 스튜가 놓여 있었다.
“아닙니다. 헌데 이 많은 걸 언제 준비하신 겁니까?”
“그야 주변에서 조금씩 얻어 왔지. 난 아침에 완두콩 스튜랑 빵이면 충분하거든.”
노인이 의자에 앉으며 커다란 빵을 삼등분으로 잘라 카일와 이엘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제 막 구운 호밀빵이라네, 옆집이 빵을 구워 파는 곳이라 이럴 땐 아주 편하지. 한번 먹어보게!”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카일과 이엘이 감사를 전하자 노인이 급히 손사래를 쳤다.
“감사할 게 뭐 있나? 나도 자네 덕을 봤으니 이 정도는 대접해야지.”
노인이 빙그레 웃으며 따뜻한 빵을 뜯어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 * *
마크와 비터는 영주성으로 들어오자마자 곧장 길드를 찾아가 맡겨 놓은 골드를 모두 찾았다. 그리고는 산맥을 넘을 동안 먹을 식량과 각종 물품을 구매하기 시작했다.
“말을 가져갈 수 없으니, 최대한 가볍게 짐을 꾸려야 해.”
“먹는 거야 육포와 건량이면 충분하지만, 문젠 추위야! 산맥은 여기보다 더 추울 텐데, 어쩌지? 여기서 방한 장비까지 구입하면 고향까지 돌아가기엔 골드가 부족할 수 있어.”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산을 넘으려면 따뜻한 옷과 여벌의 신발 정도는 필수야, 지금은 일단 제국으로 넘어가는 게 먼저니, 나중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해 보자!”
“휴…. 할 수 없지, 좋아. 지금은 베링 산맥을 넘는 데만 집중하자.”
비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커다란 가방을 짊어졌다.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남루한 옷차림의 소년이 쪼르르 달려와 비터의 앞을 막아섰다.
“도와주세요. 제발 도와주세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조그마한 꼬마 녀석이 비터의 다리에 매달려 소리쳤다.
“놔라! 이게 무슨 짓이냐!”
마크가 그런 소년 팔을 낚아채며 떼어내려 했지만,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소년은 집요하게 비터의 다리를 부여잡고 놓지 않았다.
“도와주세요. 제발! 누이가 나쁜 놈들에게 끌려가려 해요. 제발 도와주세요.”
떨어지지 않으려 애쓰며 소리치는 소년의 목소리에, 비터는 자신의 기억 속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누군가를 떠올렸다.
“누이….”
비터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기서 낭비할 시간이 없어!”
마크가 비터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눈썹을 찡그렸다. 하지만 비터는 이미 마음을 정했는지 짊어지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았다.
“잠시 다녀올게.”
“비터!”
“잠시면 돼.”
비터는 마크를 뒤로하고 소년과 함께 골목으로 사라졌다. 얼굴을 찌푸린 마크가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 급히 비터의 뒤를 쫓았다.
“아악-”
달려가는 비터의 귀에 여인의 비명성이 들려왔다.
“누나!”
앞서 달려가던 소년이 더욱 속도를 내며 골목을 정신없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좋은 말 할 때 따라와!”
“잘못했어요. 때리지 마세요!”
비터가 도착했을 때 이제 십여 세 정도의 소녀가 바닥에 쓰러져 두 손을 모아 빌고 있었다.
“누나!”
앞서 달려간 어린 소년이 바닥에 쓰러져 있던 소녀에게 달려가 안겼다.
“누나 이제 괜찮아! 저 사람들 따라가지 않아도 돼!”
소년이 고개를 들어 눈앞에 서 있는 사내를 바라보며 말했다.
“시키는 대로 했어요. 이젠 가도 되죠?”
“하하! 똘똘한 녀석이군, 좋다. 약속은 약속이니 보내주겠다. 참고로 말하지만,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게 좋아! 다시 우릴 보기 싫으면 말이야.”
“다신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그래! 우리 같은 놈들은 오래 보면 안 되지!”
사내가 히죽 웃으며 옆으로 물러섰다.
그러자 소년이 비터를 힐끔 바라보다 입술을 깨물곤 급히 소녀을 일으켜 세웠다.
“아! 그렇지. 계산은 바로 해야지!”
사내가 품 안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내 소년에게 던졌다.
“계산은 정확해야겠지? 빌린 돈에 이자 빼고 남은 돈이다. 잘 챙겨! 뺏기지 말고. 그 정도면 한동안 둘이서 먹고살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우릴 너무 미워하진 말라고, 받을 돈 받고 줄 돈 주는 것뿐이니 말이야.”
골목 안으로 사라져가는 소년을 보며 사내가 피식 웃으며 돌아섰다.
“가자! 우리 할 일은 끝났다. 괜히 남아 있다 피 볼라!”
“예, 형님!”
사내가 터벌거리며 걸어가자 주변에 몰려 있던 사내들 역시 아무런 말도 없이 떠나가 버렸다. 혼자 남아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비터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까지 자신을 끌고 온 소년은 말도 없이 소녀를 데리고 사라져 버렸고, 소녀를 끌고 가려던 사내는 떠나는 소년에게 돈까지 쥐여주고는 역시 비터에겐 관심도 주지 않고 떠나버렸기 때문이었다.
“비터!”
골목을 돌아 쫓아온 마크가 급히 비터를 불렀다.
“어떻게 된 거야?”
“나도 모르겠어….”
“무슨 말이야?”
마크가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골목 안은 아무런 소리도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기분이 이상해. 아무래도 서둘러 빠져나가는 게 좋겠다.”
“그래.”
비터가 몸을 막 돌리려는 순간, 어두운 음영이 깊게 드리워진 그늘 속에서 작은 나이프가 비터를 향해 곧장 날아들었다.
“조심!”
탱-
마크가 급히 비터의 앞을 막아서며 날아든 나이프를 검집을 들어 막았다.
“누구냐!”
“이런, 제법인걸? 내 나이프를 쳐내다니 말이야.”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밀런이 마크를 보며 웃음을 흘렸다.
“네놈이냐…. 날 여기까지 끌고 온 놈이?”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밀런이 손에 든 나이프를 이리저리 위협적으로 굴리며 웃음을 흘렸다.
“날 여기까지 부른 이유는?”
“아! 그거 말인가? 뭐 간단한 건데…. 요즘 내가 골드가 부족하거든. 그래서 같은 용병끼리 좀 나눠 가지면 어떨까 하는데 말이야.”
“지금… 강도질을 하겠다는 말이냐?”
“강도라니, 무슨 그런 험악한 말을 하나? 그저 좀 빌려 달라는 거라네. 갚기는 힘들겠지만 말이야.”
밀런이 장난을 치듯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와 함께 골목 여기저기서 검을 든 용병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걸 우린 강도질이라 부르지.”
“뭐, 생각은 자유롭게 하시고…. 우린 원하는 결과만 있으면 되니까 말이야. 어떻게, 순순히 빌려주겠나? 아니면 우리가 강제로 빌려 가야겠나.”
“우릴 너무 만만히 본 것 같은데?”
“안타까운 일이군. 우리 물주께서 강제로 빌려 가길 원하시니 말이야.”
밀런이 사악하게 웃음을 지으며 손에 들린 나이프를 벼락같이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