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아킨스 자작령1
“이런….”
시카니스를 타고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순간 카일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상에서 느꼈던 서늘한 바람이 하늘 위에서는 거대한 폭풍처럼 카일과 이엘을 덮쳐 왔기 때문이었다.
냉기가 몸 안으로 스며드는 순간, 카일의 내부에 잠들어 있던 오러가 활발하게 움직이며 냉기로부터 카일의 몸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카일과 달리 차가운 바람에 고스란히 노출된 이엘은 커다란 피풍의로 감싸고 있는데도 온몸이 꽁꽁 얼어붙었다.
“안 되겠습니다. 이대로 곧장 자작성으로 가야겠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을… 잡아야 하잖아요.”
이엘이 떨리는 몸을 최대한 진정시키려는 듯 더듬거리며 말했다.
카일의 계획은 마크와 비터가 아킨스 자작성으로 들어가기 전 두 사람을 사로잡는 것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하늘 위에서 발견하는 즉시 단번에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적어도 배신한 이유 정도는 알아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자작성으로 향하고 있으니, 먼저 가서 기다리면 자연스럽게 만나게 될 겁니다.”
“미안해요. 괜히 저 때문에….”
“휴…. 아닙니다. 조금 더 세심하게 살폈어야 했는데… 제 잘못입니다.”
카일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등 뒤에 기대어 있어, 추위에 바들바들 떨고 있는 이엘의 얼어붙은 몸이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 * *
‘놈들을 찾았다.’
빠르게 아킨스 자작령으로 향하고 있던 카일의 머릿속으로 시카니스의 음성이 들려 왔다.
‘어디지?’
‘바로 아래쪽에서 말을 달리고 있다.’
‘벌써 여기까지 왔다니…. 잡을 수 있을까?’
‘숲이 우거져 있어 당장 잡긴 어렵다. 하지만 숲만 벗어나면 단번에 낚아챌 수 있다.’
숲을 벗어나면 자작성 남문으로 향하는 넓은 개활지였다. 시카니스라면 어렵지 않게 두 사람을 낚아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곧 날이 밝아올 시간이었다. 시카니스가 숲을 벗어난 두 사람을 낚아채는 순간 블랙 와이번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날 것이다.
“휴.… 운이 좋은 놈들이군.”
카일의 얼굴이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네?”
“아닙니다. 그냥 혼잣말입니다.”
카일 대충 얼버무리며 말을 이었다.
“일단 내려가 쉴 곳을 찾아봐야겠습니다.”
카일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숲을 지나친 시카니스는 이미 아킨스 자작성에 도착해 밤하늘을 선회하고 있었다. 다행히 아직은 달빛도 없는 어두운 밤이라, 누군가 밤하늘을 올려본다 해도 블랙 와이번인 시카니스를 찾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아직… 성문이 열리기 전이… 잖아요.”
“상관없습니다. 곧장 성안으로 들어가면 되니까요.”
“하지만… 성안에서 와이번이 내릴만한 곳은 영주성이나 광장밖에는 없는걸요.”
아무리 어두운 밤이라도 집채만 한 와이번이 하늘에서 내려앉는다면 누구라도 시카니스의 존재를 인지할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걱정 마십시오. 제게 다 방법이 있습니다.”
카일이 웃으며 안장에 미리 걸어 둔 굵은 밧줄을 풀더니 곧장 아래로 던졌다.
안장에 묶이지 않은 밧줄의 한쪽 끝이 자연스럽게 풀려나가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지금… 뭘 하려는 거예요?”
이엘이 불안한 표정으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카일의 행동이 뭘 의미하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금방 끝날 겁니다. 무서워할 필요 없습니다.”
카일이 웃으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는 이엘의 팔을 잡았다.
“설마… 안 돼!”
“그럼 갑니다.”
카일은 몸을 기울여 이엘의 허리를 감싸 안은 뒤 곧장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쉬이익-
순간 시카니스 역시 부드럽게 지상으로 하강했다.
한 손으로는 이엘의 허리를 가볍게 끌어안고, 다른 한 손으론 밧줄을 단단히 부여잡으며 미끄러지듯 빠르게 아래로 떨어져 내리던 카일은, 지상과 가까워지는 순간 밧줄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속도를 줄이는 동시에 두 발을 L자로 만들며 가볍게 지상으로 착지했다.
전생에 수도 없이 익혔던 패스트 로프를 응용한 완벽한 착지였다.
패스트 로프는 레펠과는 달리 헬기가 착지할 수 없는 공간에서 로프만 잡고 빠르게 하강하는고난도의 기술이었다.
정지 비행이 힘든 와이번을 타고 시도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방법이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카일과 시카니스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는 만큼 가장 이상적인 속도와 높이를 생각만으로 전달할 수 있어 오히려 안전하면서도 은밀하게 바닥에 내려설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악!”
이엘이 카일을 붙잡고 뒤늦은 짧은 비명을 질렀다.
카일이 와이번에서 뛰어내리는 순간 몸이 공중으로 부웅 떠오르며 세찬 바람이 그녀의 뺨을 차갑게 때렸다. 곧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며 생길 충격에 너무 긴장한 나머지 심장은 미칠 듯이 뛰고 숨이 턱 막힐 것만 같아 카일의 품속으로 더욱 깊숙이 얼굴을 묻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른 것이다.
설마 카일이 밧줄 하나에 몸을 의지한 채 이렇게 망설임 없이 와이번에서 뛰어내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다왔습니다.”
눈 한 번 깜짝할 시간에 들려온 카일의 목소리가 이엘에게는 꿈처럼 들려왔다. 믿을 수 없는 선명한 목소리에 두근거리는 심장을 겨우 진정시킨 이엘이 고개를 살며시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자신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는 카일의 두 눈과 마주쳤다. 순간 겨우 진정시켰던 심장이 또다시 뛰기 시작했다. 이엘이 카일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카니스를 찾았지만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누군가 오는 것 같습니다. 일단 자리를 피하시죠.”
주변을 한차례 둘러보던 카일이 근처에서 들려온 인기척에 급히 이엘을 부축해 좁은 골목 안으로 몸을 피했다.
“못된 놈들! 절대 가만두지 않겠어.”
카일과 이엘이 골목 안으로 몸을 피한 순간, 술에 취한 듯 어눌한 말투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서라! 그러다 큰코다친다. 녀석들이 어떤 놈들인지 잘 알잖아!”
“하지만… 어떻게 번 골드인데… 당장 길드에 고발하고 말겠어.”
“너! 그러다 죽어.”
“그러면 어쩌라고! 이대로 당하고 있으란 말이야?”
“길드에 신고한다고 녀석들이 순순히 인정할 것 같아!”
“증인! 증인이 있잖아!”
“밀런이란 놈 뒤엔 여기 기사단장이 있어! 영지민 중 널 위해 증언할 사람이 있을 것 같아? 결국 길드에서 제시할 방법은 용병검투 뿐이야.”
“하지만…. 크윽!”
“그냥 이대로 조용히 있다가 날이 밝으면 나랑 곧장 여길 뜨는 거야, 알겠지!”
“밀런! 이 개 같은 놈!”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가자, 카일와 이엘이 골목에서 빠져나왔다.
“저 사람… 밀런이란 사람에게 돈을 빼앗겼나 보군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대충 그런 것 같습니다.”
카일이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카일은 저 사람들 대화가 마음에 들지 않나 보군요.”
“그냥 관심이 없습니다.”
“저 사람들 불쌍하지 않나요?”
“흠…. 글쎄요?”
“카일이라면 어떨 것 같아요. 카일보다 강한 사람이 무력으로 돈을 뺏으려 한다면요?”
“저보다 강하다면 어쩔 수 없이 뺏겨야겠죠. 하지만 그냥 도망가진 않을 겁니다.”
“그럼요?”
“되찾을 수만 있다면 되찾아 오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에 따른 대가를 받아 내야죠.”
“카일보다 강한데도요?”
“꼭 무력만으로 상대할 필요가 있을까요?”
“무력만이 다가 아니라는 말이군요.”
이엘이 카일의 말뜻을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냥 갑작스러운 질문이라 아무렇게나 대답한 것뿐입니다. 그보다는 우선 쉴 곳부터 찾아보죠.”
카일은 골목 안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미 하늘 위에서 위치를 파악한 덕분에 카일의 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골목 안을 이리저리 돌아 나가자 눈앞에 작은 원형 광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광장 주변으로 크고 작은 상점들이 아직 날이 밝지 않았는데도 등불을 밝히며 이른 새벽 장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뭐 찾는 게 있나?”
카일이 광장에 들어선 후에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지팡이를 든 왜소한 체구의 노인이 다가와 물었다.
“예?”
“보아하니 용병 같은데…. 아닌가?”
카일의 모습을 살핀 노인의 물음에 카일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맞습니다.”
“그러니 말해보란 말이야. 급히 찾을 게 있어 이른 시간에 나온 것 아닌가?”
노인이 이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필요한 거라면… 아! 옷…. 두툼한 코트가 필요합니다.”
“코트?”
“예! 좀 일찍 나와봤더니 어제와 달리 춥더군요.”
“음…. 하긴, 좀 춥긴 했지.”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안 따라올 거야?”
“예?”
“코트가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나? 여기가 바로 내 가겔세!”
노인이 지팡이를 들어 낡은 가게를 가리켰다.
“툴린 가죽공방?”
“내가 바로 툴린이지! 보기엔 낡아 보이지만 가죽으로 된 건 웬만해선 다 있다네.”
딸랑-
노인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카일이 잠시 주춤거렸지만, 결국 노인의 뒤를 따라 공방 안으로 들어갔다. 낡고 오래된 건물이라 큰 기대 없이 들어간 공방이지만, 생각보다 많은 물건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카일을 기쁘게 한 건, 벽 한쪽 돌로 된 커다란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붉은 불꽃이었다. 덕분에 내부는 생각보다 훨씬 따뜻하고 아늑했다.
“어디 보자…. 자네가 입을만한 가죽 코트가 있었는데….”
“아니…. 제 건 필요가….”
“여기있구만.”
노인이 가게 안쪽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더니 곧 갈색빛이 도는 검은색의 커다란 가죽 코트를 가지고 나왔다.
“좀 오래되긴 했지만, 제법 잘 만든 코트라네. 어떤가?”
“블랙베어 가죽이군요.”
카일이 코트를 한 번 쓸어보며 말했다.
“오! 가죽에 대해 잘 아는군. 맞네, 곰 가죽으로 만든 녀석이지”
“그럼 여기 레이디가 입을 코트도 있을까요?”
“앵? 레이디라니….”
노인이 당황한 표정으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카일은 웃으며 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커다란 피풍의에 가려져 있던 이엘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제 보니 어여쁜 레이디가 계셨군. 흠…. 어쩐다…. 여긴 이런 어린 아가씨가 입을만한 옷이 없는데….”
“전 그냥 편하고 따뜻하기만 하면 돼요.”
“그렇다면야…. 아! 마침 적당한 게 있군. 잠시만 기다려 보게!”
노인이 뭔가 떠올랐는지 다시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사이 카일은 공방 내부를 둘러보았다. 대부분 용병들이나 쓸만한 투박한 가죽 제품들이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그중 카일의 눈에 특이한 형태의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진 가죽 가면들이었다.
“이건?”
“그건 앞면을 보호하는 가면이야.”
안쪽에서 붉은빛이 도는 갈색 가죽 코트를 가지고 나온 노인이 카일의 손에 들린 물건을 보며 말했다.
“보호가면?”
“관심이 있으면 싸게 줄 테니 가져가게! 예전엔 제법 팔리던 물건인데, 요즘은 통 관심이 없는지 사는 사람이 없다네.”
카일이 가면에 관심을 보인 것은, 앞서 카일과 대결을 펼쳤던 피스트 워리어가 썼던 가면과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시 피스트 워리어가 썼던 가면이 정교하면서도 화려했다면 공방 안에 진열된 가면들은 투박하고 단순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단순히 얼굴을 가리는 가면이 아니란 말이군요.”
“당연하지! 보기엔 투박해 보여도 얼굴을 보호하는 용도라 손이 많이 가는 물건이라네.”
노인이 카일의 옆으로 다가와 진열되어 있는 가면을 하나 들어 올렸다.
“보게! 이렇게 겉면은 기름에 넣었다가 그늘에 말린 강화 가죽을 쓰고, 안쪽은 부드러운 가죽을 덧대 오래 가면을 쓸 수 있게 만들었지, 이 정도면 오러가 아닌 칼이나 화살 공격 정도는 막아줄 수 있다네.”
“보기엔 아무 도움이 안 될 것 같았는데 꽤 괜찮은 물건이군요.”
“그럼! 자네가 뭘 좀 아는군.”
노인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