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사라진 혈족5
달빛도 차가운 바람에 몸을 감췄는지 주변은 온통 어둠에 잠겨있었다.
“춥진 않습니까?”
“전 괜찮아요.”
이엘이 피풍의를 더욱 여미며 말했지만 산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몸을 더욱 움츠렸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돌아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뇨. 정말 괜찮아요. 전 꼭 따라갈 거예요.”
이엘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단호하게 의지를 밝혔다.
“휴….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좋, 좋아요!”
추위로 창백해진 이엘의 얼굴이 기대감으로 물들었다.
‘사카니스!’
‘…필요할 때만 부르는군!’
시카니스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투덜거리며 허공 위로 거대한 동체를 드러냈다.
‘휴…. 아직도 화가 안 풀린 모양이군.’
카일이 깊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시카니스도 고개를 돌려버렸다.
‘넌 아직도 내가 화난 이유를 알지 못하는군.’
사카니스가 내씹는 말에 카일이 고개를 돌린 시카니스를 바라보았다.
‘단지 멀린 님에게 아공간석을 맡긴 이유 때문만은 아니라는 건가?’
‘마법사가 내 비늘만 만지지 않는다면 그다지 불만은 없었다. 하루 종일 귀찮게 말을 걸긴 하지만, 심심하지는 않아 참을 만도 했다.’
‘그럼 도대체 왜 화가 난 거야?’
‘넌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지?’
갑작스러운 시카니스의 물음에 카일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번졌다. 이런 질문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넌 그저 날 편안한 이동 수단으로만 생각한다. 아닌가?’
시카니스의 물음에 카일은 그만 대답할 말을 잃고 말았다.
‘우리 종족은 드래곤의 피와 살로 만들어졌다. 그들이 왜 우릴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시카니스가 푸른 눈동자로 카일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우린 가디언이다. 우리의 핏속엔 맹약이 끝날 때까지 맹약자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이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와이번이 가디언으로서 존재하는 이유이다. 하지만 넌 어떠냐? 내가 너의 가디언인가?”
시카니스가 카일을 차갑게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건….’
‘가디언의 존재 이유는 맹약자를 지키는 것이다. 하지만 맹약자가 인정하지 않는 가디언이 존재할 수 있나?’
시카니스는 맹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였다. 맹약이 유지되는 이상 맹약자를 보호할 의무이자 사명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맹약자 역시 맹약을 맺은 이상 와이번이 자신을 지키는 가디언임을 인정해야 한다.
아무리 와이번이 맹약자를 지키려 해도, 맹약자가 와이번을 가디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와이번은 그 존재의 의미를 잃게 된다.
‘그런 건가? 지금까지 화를 낸 이유가, 네가 널 가디언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 때문인가?’
카일은 비로소 시카니스가 화를 내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시카니스가 화를 내는 이유는 단순히 자신을 마법사에게 맡겼다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었다. 더 근본적인, 그가 존재하는 이유에 대한 문제로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잊지 마라! 맹약은 절대적이다. 네가 날 가디언으로 인정하는 한 난 반드시 널 지킬 것이다. 하지만 네가 날 가디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언제든 맹약은 파기될 것이며 난 떠나갈 것이다.’
시카니스의 말에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잊지 않겠다. 네가 나의 가디언이란 사실을…. 그리고 미안하다.”
‘사과는 받아들이겠다.’
시카니스가 날개를 넓게 펼쳐 쉽게 등위로 올라갈 수 있게 길을 만들어 줬다.
“가시지요.”
카일이 웃으며 이엘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 * *
“아함!”
낡은 창을 지팡이 삼아 몸을 기대며 긴 하품을 내뱉은 병사가 붉게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며 길게 기지개를 켰다.
“으아아! 아휴…. 이 생활도 지겹다 지겨워.”
“지겹긴 개뿔! 쓸데없는 소리 말고 개문 준비나 잘해! 지난번처럼 늑장 부려 혼나지 말고.”
옆으로 다가온 또 다른 병사가 기대고 있던 창을 툭 치며 말했다.
“아이쿠! 넘어질 뻔했잖아, 핀!”
“이제 잠 좀 깨냐! 정신 좀 차리란 말이야. 괜히 나까지 혼나게 하지 말고, 알았어!”
“아크, 넌 이 지루한 생활이 좋냐? 맨날 성벽 위에 올라 종일 서 있다가 때 되면 밥 먹고 훈련하고 오늘처럼 밤새 경계서고…. 난 이런 일 재미없다.”
핀이 투덜거리며 또다시 창대에 비스듬히 기대어 섰다.
“참 팔자 좋으셔, 넌 영지병이 얼마나 좋은지 정말 몰라? 밥 주고 돈도 주고 거기다 오늘처럼 성문 담당이면 쏠쏠하게 용돈도 챙길 수 있는데?”
“피! 그게 뭐가 좋냐? 맨날 같은 일상, 똑같은 생활이지.”
“다 똑같이 사는 거야! 인생, 다 그런 거지 뭐!”
“난 싫다, 이런 인생. 난 조만간 떠날 거다. 여기보다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갈 거야.”
“설마 용병이라도 되겠다는 거냐?”
“그래! 난 용병이 될 거다.”
“용병대에 들어가려고? 골드가 만만치 않게 필요하다던데?”
아크 역시 한동안 용병에 대한 로망을 가진 적이 있었다. 물론 이젠 그런 허황된 미련을 버리고 충실하게 현재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래도 용병에 대해서는 제법 많이 알고 있다 자부하고 있었다.
“내가 골드가 어디 있냐? 그냥 길드에서 검술서나 사서 익혀야지!”
“너…. 그러다 용병들이 용병 시험이다 뭐다 시비 걸면 어쩌려고?”
“피! 시비는 무슨! 내가 누구냐. 아직은 영지병이란 말씀이야. 아무리 용병들이 대단해도 날 건드리면 영주님이 가만히 있지 않을걸?”
비록 하찮은 병사지만 엄연히 영주의 병사였다. 아무리 용병 시험이란 명목을 들이대더라도 용병들이 영지 병사를 공격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오호라! 영지병이란 신분을 적극 활용하겠다는 말이구나.”
“그렇지! 영지병이야 용병패를 받은 뒤에 그만둬도 늦지 않고 말이야.”
“와! 계획이 다 있었구나! 대단한데!”
“그럼! 이미 오래전에 계획을 세워 뒀지! 조만간 길드로 찾아가서 검술서를 하나 살 생각이야.”
“그래? …그럼 차라리 한 권을 사서 같이 익히는 건 어때? 나도 반 정도는 보탤 수 있어!”
“넌 용병도 될 생각이 없으면서 검술은 왜? 그냥 창술이나 열심히 배우면 되지?”
“이놈 보게! 영지병에도 직급이 있잖아. 강한 놈이 더 높이 오르는 법이야. 검이라도 다룰 줄 알면 조금 더 빨리 진급도 하고, 그럼 월봉도 오르고 좋잖아! 일종의 투자야 투자!”
“하긴 십인장만 되어도 검술을 배우니…. 나야 골드만 보태준다면 조금 더 괜찮은 검술서를 살 수 있으니 나쁠 건 없지.”
“좋아! 약속한 거다.”
“그래!”
두 병사가 두 손을 맞잡으며 밝게 웃었다. 그런 두 사람의 귓가에 다급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어? 누구지? 이 시간에 올 사람이 있어?”
“전달받은 건 없다.”
“그럼…?”
두 병사가 서로를 돌아보며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전달 사항이 없다는 건 적어도 영주를 찾아온 귀족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아주 급해 보이는데?”
“성문을 서둘러 통과해야 한다는 말이겠지?”
“그럼 우리가 도움을 좀 줘야지.”
“당연하지! 물론 우리의 수고에 따른 적당한 대가도 있어야 하고 말이야.”
핀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다급하게 달려오는 두 필의 말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멈춰라!”
“우린 용병이요. 급히 길드로 가야 하니 문을 열어 주시오.”
마크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하지만 핀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성문은 시간이 되어야 열 수 있으니 기다리시오.”
“정말 급해서 그러니 사정을 좀 봐주시오.”
“아무리 급해도 아무 때나 성문을 열 수는 없소. 그쪽 사정 봐주다가 괜히 우리만 곤욕을 치를 수는 없지 않소?”
핀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어허! 이 사람 빡빡하긴, 사람이 융통성이 있어야지!”
아크가 짐짓 핀을 나무라듯 말하며 성벽을 내려왔다. 그리고는 성문 옆에 만들어져 있는 작은 쪽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저 사람이 좀 융통성이 떨어지니 이해하시오. 그래! 길드에 급히 가신다고….”
“그렇소. 서둘러야 하니 문을 열어주시오.”
“저 친구가 말했듯 우리가 마음대로 성문을 열 수는 없소. 하지만 뭐…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오. 보았듯이 쪽문을 열어 줄 수 있기는 한데… 알겠지만, 우리도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라….”
아크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이쯤 되자 마크와 비터 역시 병사가 원하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병사들이 상인들에게 편의를 봐주고 돈을 챙기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용병인 비터와 마크가 고작 병사에게 돈을 뜯길 일이 생길 거라곤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두 사람은 당황한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급한 건 두 사람이었다. 물론 성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지만, 베링산맥을 넘으려면 생각보다 할 일이 많았다. 여기서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부탁하지.”
마크가 마지 못해 품 안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내 병사에게 던지며 차가운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헙-!”
아크가 마크의 차가운 눈빛에 급히 숨을 들이마시며 긴장했지만, 날아오는 주머니를 놓치진 않았다.
‘어… 제법 묵직한데?’
아크가 주머니 속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에 언제 긴장했냐는 듯 히죽 웃으며 성벽 위 핀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마크와 비터를 보며 말했다.
“따라오시오. 문을 열어줄 테니.”
아크의 말에 말에서 내린 비터와 마크가 쪽문을 향해 다가갔다.
“생각보다 많이 받은 것 같으니 보답으로 한 가지 말해줄 게 있소.”
아크가 쪽문을 열어주며 말을 이었다.
“어제저녁 영지로 밀런 용병단이 왔소. 숫자는 10명 남짓인데 아주 고약한 자들이니 조심하시오.”
“밀런이란 자의 검술 실력이 대단한가 보군.”
“소드 유저 정도라 듣긴 했는데… 그렇다고 함부로 싸울 생각은 마시오. 그랬다간 자칫 죽을 수 있으니 말이요.”
“왜? 우리가 질 것 같소?”
마크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소드 유저 정도면 마크 혼자서도 충분히 이길 자신이 있었다.
“실력이야 모르겠고… 그보단 그놈들 뒷배가 겁나지.”
“뒷배?”
“그는 영지의 제2 기사단장과 친분이 상당하오. 자칫 기사단장이 나설 수도 있으니 조심하란 말이지.”
아크의 말에 마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참고하지.”
“이 정도 정보면 우리에게 준 돈은 아깝지 않을 거요. 밀런이 기사단장과 친분이 두텁다는 사실을 아는 자는 많지 않으니 말이요.”
마크와 비터는 아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 위에 올랐다. 그리고는 곧장 길드를 향해 달려갔다.
* * *
“밀런 형님! 일어나 보십시오.”
“무슨 일이야! 네가 오늘은 깨우지 말랬지!”
험악하게 상을 찌푸린 밀런이 자신을 깨운 사내의 멱살을 틀어쥐며 붉게 충혈된 눈으로 노려보았다.
“커억…. 이거… 좀 놓으세요. 중요한… 일이란 말입니다.”
“너 이 자식, 하찮은 일이면 죽을 줄 알아, 알겠어?”
“길드… 헉헉…. 조금 전 길드에서 누군가 골드를 찾았습니다.”
“골드?”
밀런이 눈을 비비며 침대 한편에 놓여있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덮고 있던 이불이 흘러내리며 벌거벗은 밀러의 상체가 드러났다. 잘 짜여진 단단한 근육과 함께 상체 여기저기에는 험악한 상처들이 가득해, 지독한 험로를 수없이 넘나들며 살아남은 용병임을 알 수 있었다.
“털어봐!”
밀런이 가죽 의자에 깊숙이 몸을 누이며 말했다.
“두 놈입니다. 나이는 고작 20대 초중반 정도 되어 보이지만, 소드 유저라고들 합니다.”
“그래서 얼마나 찾은 거야! 지금 녀석들 신상이나 말하자고 날 깨운 거야?”
“아휴…. 그럴 리가요. 찾아간 금액은 대략 80골드가 조금 못 되는 것 같았습니다.”
“80골드?”
밀런의 눈빛이 탐욕스럽게 변했다. 80골드는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그 정도면 용병단이 한 달은 용병일을 하지 않고 놀 수 있는 금액이었다. 물론 이 기준은 순전히 밀런의 기준이지만 말이다.
“녀석들, 어디에 있지?”
“잡화점과 대장간을 돌며 물품을 구입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곧 떠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급히 형님을 깨운 거고요.”
“자식! 알았다. 이번 일 잘 끝나면 좀 더 챙겨주지, 애들 깨워!”
“알겠습니다.”
사내가 뛸 듯이 기뻐하며 급히 달려나갔다. 그리고 얼마 후 여관 주변으로 소란이 일며 일단의 용병들이 어디론가 급히 달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