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사라진 혈족4
“전 욕심도 많고 소유욕도 강합니다. 그래서 일단 내 것을 건드린 놈들은 절대 가만두지 않습니다. 그러니 두 사람도 잡고 검도 곧 되찾을 겁니다. 그러니 자책하거나 실망할 필요 없습니다.”
얼굴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카일의 말속에는 그의 분노가 고스란히 담겨 천막 안을 싸늘하게 만들었다.
사실 카일에게 검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제법 심혈을 기울여 만들긴 했지만, 검을 잃어 버린다 해도 얼마든지 다시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카일이 진짜 화난 이유는 바로 배신 때문이었다.
카일이 비록 담담한 척 웃고 있지만, 그도 이번 일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모른 척, 아닌 척했지만, 카일도 피를 나눈 혈족이란 생각에 더 심혈을 기울여 그들을 가르쳤고 배려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그에게 준 보답은 고작 배신이었다. 남이 아닌 혈족의 배신은 카일에게 더욱 커다란 충격을 가져다준 것이다.
“하지만 이미 늦었어요. 아무리 말을 빨리 달려도 아킨스 자작령에 도착할 때쯤이면 두 사람은 벌써 영지를 떠난 후일 거예요. 더구나 카일을 아직 승마에도 서툴잖아요.”
시안느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 모습에 카일 역시 심각하게 고민을 하려는 듯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흠…. 그렇긴 합니다. 다들 이미 늦었다고 말하더군요. 하지만 제가 왜 말을 타고 아킨스 자작령까지 가야 합니까?”
“네? 그야 당연히 말을 타고 가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시안느를 보며 카일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아! 맞아요. 정말 잊고 있었네요. 카일이라면 반나절 만에 아킨스 자작령에 도착할 수 있어요.”
“네? 그럴 리가요. 아킨스 자작령은 여기서 빠른 말을 타고 달려도 하루가 걸려요. 반나절 만에 가려면 적어도… 아!”
시안느는 곧 자신이 멍청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는 없었다.
“휴…. 제가 바보 같네요.”
“그럴 리가요. 저도 잠시 잊고 있었는걸요.”
“그럼 언제 출발할 생각이에요?”
“곧 출발할 생각입니다.”
“저도 가면 안 될까요?”
시안느가 카일을 보며 눈을 빛냈다. 하지만 카일은 고개를 저었다.
“시안느 경께서는 상단을 지켜 주세요. 아킨스 자작령까지는 저 혼자 갔다 오겠습니다.”
카일의 말에 시안느가 실망스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카일의 말대로 아킨스 자작령까지 상단을 호위하기 위해서는 시안느는 물론 세인과 워드까지 빠질 수는 없었다.
“그럼 제가 따라가는 건 문제가 없겠네요.”
이엘이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건…….”
“제가 카일을 따라가는 게 오히려 상단 호위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시안느 경이 자유로워지려면요.”
이엘의 말에 카일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엘은 상단 호위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었다. 오히려 이엘을 호위하기 위해 시안느라는 강력한 전력이 묶여 있으니 차라리 카일을 따라가는 것이 상단 호위에는 도움이 될 것이다.
“흠…. 좋습니다. 그럼 같이 가시지요.”
카일의 말에 이엘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대신 최대한 조용히 영지로 들어갈 생각입니다.”
“몰래 영지로 들어가겠다는 건가요?”
“일단은 그럴 생각입니다. 두 사람을 잡으려면 소란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요.”
영지에서 무력싸움이 일어나더라도 용병들과의 다툼에는 영지병이나 기사들이 그다지 관여하지 않는다. 대부분 용병길드에서 중재를 하거나 그들만의 방식으로 해결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용병이 아닌 자들과의 충돌이 발생하면 이때는 영지병이나 기사들이 적극적으로 관여하기 때문에 마크와 비터를 잡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있었다.
“음…. 영지병과 충돌을 걱정하는군요.”
이엘이 곧장 카일의 말을 이해했다.
영주들은 기본적으로 용병길드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용병들은 목숨을 담보로 위험한 일을 하다 보니 많은 골드를 벌어들였다. 그만큼 씀씀이도 커, 영주에겐 커다란 수입원 중 하나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장점이 있다면 단점도 있기 마련이었다. 기본적으로 무력을 가진 집단이 모이면 싸움이 발생하거나 영지민에게 해를 주는 경우가 많았다. 영주로서 이를 방관하면 영지 내의 치안이 무너지고 영주의 권위가 떨어질 수밖에는 없었다. 그렇다고 영지에 이익이 되는 용병들을 쫓아낼 수 없으니, 나름 규칙을 세워 용병과 용병 간의 분쟁은 용병길드에서 처리하고 중재할 수 있도록 해 용병길드와의 갈등을 최소화하였다. 하지만 이를 제외하고 문제를 일으키면 적극적으로 개입해 엄하게 처벌했다.
“곧장 용병길드로 찾아가 용병 시험을 볼 수도 있지만, 놈들이 도주할 수 있으니 최대한 조용히 처리하고 돌아올 생각입니다.”
“흠…. 좋아요.”
이엘이 기분 좋게 대답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토일 지부장님께 잠시 자리를 비운다고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이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시안느가 부러운 듯 그 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고개를 돌렸을 때, 마치 무엇에라도 홀린 듯 멍한 얼굴로 중얼거리며 앉아 있는 세인을 볼 수가 있었다.
“왜 그래요. 세인 경? 어디 아픈가요?”
시안느가 세인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하지만 세인은 여전히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곤 고개를 들어 시안느에게 물었다.
“조금 전 카일이 그랬잖아요. 내 것을 건드린 놈은 가만히 안 둔다고….”
“네, 그랬어요. 그런데 왜 그래요?”
“그… 내 것에… 저도 포함되나요?”
세인의 물음에 시안느의 얼굴에 황당함이 어렸다.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죠?”
“아닐까요…?”
세인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시안느는 그런 세인을 보면서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아니…?”
시안느의 단호한 얼굴이 점점 변해가더니, 그녀가 모호한 표정으로 세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 니겠지?”
* * *
화려하진 않지만 작고 튼튼한 사두마차가 평온하게 관도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아직은 이른 새벽녘이라 그런지, 마차에 달린 마법등이 밝은 빛을 뿌리며 길을 밝히고 있었다.
“아무래도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심각하게 굳어진 표정의 시종장이 조금 전 전해 받은 작은 서류를 이사벨라 남작에게 건네며 말을 이었다.
“요즘 왕국에 이상한 자가 나타났습니다. 일명 나이트 헌터란 별칭으로 불리는 자인데, 영지를 돌아다니며 기사들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있다고 합니다.”
“나이트 헌터? 재미있는 별칭이군요. 하지만 그런 일이야 종종 있지 않았나요?”
이사벨라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수련이라는 명목의 대련이나, 귀족 또는 영지 간의 분쟁으로 인한 대전사 결투도 흔하게 일어나는 세상이었다. 기사에게 결투를 신청했다고 해서 이상한 것 없는 일이었다.
“물론 기사들 사이에서의 대련이야 일상적인 일이지요. 하지만 그 대상이 기사단장급 인물이라면 어떨까요?”
이사벨라가 들고 있던 서류에서 눈을 떼고 시종장을 바라보았다.
“기사 단장급이라면 적어도 엑스퍼트 중급이상일 텐데…. 나이트 헌터란 자가 그리 대단하단 말인가요?”
“대단한 정도가 아닙니다. 이틀 사이에 6명의 기사단장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시종장의 말에 이사벨라의 얼굴도 심각하게 굳었다.
“이틀 사이에 6명이라면…. 설마 나이트 헌터가 혼자가 아니란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동부에서 두 명, 중부에서 세 명이 당했습니다. 그리고 어제, 서부 마란트 백작령의 프란 기사단장이 단골식당에서 목이 잘렸습니다.”
“왕국 전역에서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이군요?”
시종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자들 역시 일반적인 기사들이 아닙니다. 대부분 향후 10년 이내에 상급에 오를 것이라 확신하고 있던 자들입니다.”
“이번 공작령 습격과 관련 있는 자들이라 생각하나요?”
이사벨라의 말에 시종장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은 정식으로 결투를 신청하는 대신, 대상이 자주 가는 곳에서 정확한 시간에 미리 기다렸다가 결투를 벌였습니다.”
“오래전부터 조직적으로 상대를 조사했다는 말이군요.”
이사벨라의 얼굴에 근심이 어렸다.
“…지금으로선 그렇게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정보력을 총동원해 놈들을 추적하고는 있지만, 흔적을 찾기도 쉽지 않습니다.”
“사건이 여러 곳에서 동시에 벌어지는 탓이겠군요.”
“그것이 걱정입니다. 이렇게 여러 일이 동시에 벌어지면, 조사하는 과정에서 역으로 우리가 노출될 수 있으니까요.”
“저들의 목적이 뭐라고 생각하나요?”
“알 수가 없지요. 단순히 왕국에 혼란을 주려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우리가 파악하지 못한 노림수가 있겠지요.”
시종장이 담담하게 말했다.
“차라리 영주들에게 비밀리에 협조를 요청하면 어떨까요? 그들도 피해를 입었으니 누가 저지른 일인지 알고 싶을 것 같은데요?”
“아마도 어려울 겁니다. 오히려 영주들은 이번 일을 감추기에 바쁠 겁니다.”
시종장의 말에 이사벨라가 눈썹을 찡그렸다.
“자신의 기사가 죽었는데도 그냥 넘어간단 말인가요?”
“아무리 갑작스러운 결투라도 정당한 대결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외부로 알려질수록 영주나 죽은 기사의 명예만 실추될 뿐이지요. 지금으로선 감추는 게 최선이라 생각할 겁니다. 그리고 직접 놈들을 찾으려 하겠죠.”
“그 과정에서 영지 간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겠군요.”
“맞습니다. 놈들이 노린 일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제법 심각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겠지요.”
시종장이 깊게 한숨을 쉬며 품 안에서 잘 접힌 손수건을 꺼냈다. 그리고는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침을 흘리고 있는 여기사의 입가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많이 피곤했나 보군요.”
잔뜩 굳어 있던 이사벨라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아무리 그래도 주인을 지켜야 할 기사가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그야 시종장님이 옆에 있으니 안심이 되어 그런 거죠. 로렌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아시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기사로서는 불합격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호위는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여인이 이렇게… 쯧! 이러니 여직 혼인도 못하고 있지요.”
“그게 어디 로렌 탓인가요?”
이사벨라가 웃으며 시종장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모른 척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더니 입을 다물어 버렸다.
“정말 시종장은 혼자 지내실 간가요?”
“…이 나이에 무슨…. 전 지금 이대로가 좋습니다.”
시종장의 말에 이사벨라가 안타까운 눈으로 시종장의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든 여기사 로렌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며 손에 들려있는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혹… 이번 일, 다른 세력과는 관련이 없나요?”
“주시는 하고 있지만 그다지 큰 움직임은 없습니다. 다만 공작령에 남아있던 각국의 위장 세력들 대부분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좀 더 자세하게 파악하긴 힘든가요.”
“아시겠지만 공작과의 맹약 때문에 20년 전 대부분의 시설을 철수시켰고, 남은 곳도 연락소 정도가 전부라 정보수집이 어렵습니다.”
“결국 방법이 없단 말이군요.”
이사벨라가 아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서는 놈들이 다시 움직일 때까지 기다리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휴…. 어쩔 수 없죠. 그나저나 그분에겐 연락이 없나요? 지금쯤 소식이 왔어야 할 것 같은데요?”
“글쎄요. 아직은 소식이 없었습니다.”
“무슨 일이 생겼을까 걱정이네요.”
“그분이라면 잘 대처하실 겁니다. 걱정 마십시오. 곧 연락을 주실 겁니다.”
위로 섞인 시종장의 말에도 이사벨라가 걱정 어린 표정을 지우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