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사라진 혈족2
“혹 암흑마법사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물론 알고 있네. 설마 암흑마법사가 나타났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암흑마법사가 변종 오크와 흑기사를 동원해 습격을 해왔습니다. 덕분에 용병들 대부분이 죽었습니다. 여기 있는 카일 덕분에 겨우 목숨을 구했죠.”
“카일 덕분에 말인가? 하지만 암흑마법사와 흑기사라면 카일만으론 힘들 것인데?”
조세츠 자작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 모습에 토일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의 도움도 있었지만, 암흑마법사를 물리친 분은 따로 있습니다.”
“오! 그렇지, 그럴 거라 생각했네! 흑기사를 가디언으로 두고 있다면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자라도 혼자 암흑마법사를 상대하긴 힘들지!”
“아! 마침 저기 오는군요.”
토일이 다가오는 멀린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 자넨?”
조세츠 자작이 단번에 멀린을 알아보고는 다가갔다.
“아는 사이십니까?”
토일이 멀린과 자작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절… 아십니까?”
멀린이 경계의 눈빛을 보내며 물었다. 멀린이 알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왕립 마탑의 귀족 마법사와 그들과 연관된 일부뿐이었다.
“아! 자넨 기억하지 못하는군! 얼마 전 식당에서 보지 않았나? 그때가 아마도 남부 하늘탑이 폐쇄되고 얼마 안 돼서였던 것 같은데?”
“아!”
“이제 생각이 나나 보군!”
“모르겠습니다.”
“…응? 몰라?”
“글쎄요. 이미 오래전 일이라… 더구나 그때 딱히 누구와 대화한 기억이 없어….”
“…그렇긴 하군.”
자작이 실망스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멀린의 말대로 당시 인사를 나눈 것도 아니었고, 그저 옆 테이블에 앉았다는 것만으로 상대를 기억해 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일단 치료부터 하겠습니다.”
멀린이 자작에게 고개를 숙인 뒤 누워있는 루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세심하게 루트를 살피며 말했다.
“가슴뼈가 부러졌습니다. 일단 마법으로 어긋난 부분을 맞추고 상처가 난 곳은 치료하겠습니다.”
“부탁하지.”
멀린이 자작의 말에 곧 루트의 가슴으로 손을 올렸다.
“힐!”
멀린의 짧은 주문과 함께 움푹 들어가 있던 루트의 가슴이 제 모습을 찾고, 얼굴에 난 상처와 멍 자국들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고맙네!”
“아닙니다. 일단 겉으로 드러난 상처는 모두 치료했습니다. 하지만 뼈를 붙이거나 내상을 치료하려면 사제에게 보이거나 신성력이 깃든 포션이 있어야 합니다.”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네, 지금은 이 정도만으로도 루트에겐 큰 도움이 될 거야. 고통만 줄어도 그게 어딘가!”
경박스러워 보이던 조세츠 자작도 초췌한 루트의 모습에 입을 꾹 다물고 근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저분에게 저런 모습도 있군요.”
카일이 토일에게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루트란 기사는 자작의 후계자라네. 그러니 얼마나 걱정이 되겠나?”
“후계자 말입니까? 하지만 아들 같아 보이진 않았습니다. 얼굴도 전혀 닮지 않았구요.”
“당연하지. 자작에겐 아들이 없으니 말이야. 그나저나 어떻게 된 건가?”
“자작님이라면 암시장 조직들에게 쫓기고 있었습니다.”
“아니, 자작을 말하는 게 아니네. 비터와 마크 말이네.”
토일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그 녀석들, 자네와 숲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곧장 계약을 파기하고는 떠나버렸네”
“떠… 나다니요?”
“몰랐나? 난 또 자네와 다툼이 있었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 비터 녀석의 검이 부러져 있었는데?”
“검을 부러트린 건 제가 맞습니다. 하지만 다툼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흠…. 일단 아가씨께서 일어나시면 정확한 사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알겠네! 일단 오늘 하루는 아무래도 이곳에서 더 머물러야겠군.”
토일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일정이 계속 늦어지는군요. 괜히 저 때문에….”
“자네 때문이라니, 그럴 리가 있나. 오히려 자네 덕분에 습격을 물리칠 수 있었으니 오히려 상단에서 고마워 해야지!”
토일이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짓고 말을 이었다.
“더구나 이번엔 우리 상단도 중요한 인연을 만들었느니 오히려 이익을 봤다고 할 수 있지.”
토일이 조세츠 자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조세츠 자작님이 생각보다 대단한 분인가 보군요.”
“보기엔 경박스러워 보이지만 대단히 뛰어난 학식을 지니고 있다네, 인맥도 상당히 넓고, 무엇보다 엄청난 재력가이기도 하지.”
토일의 말에 카일이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암시장은 일반 사람은 살 수 없을 정도의 고가의 물건을 파는 곳이었다. 그런 암시장에서도 상층부를 출입할 수 있는 자작에게 재력이 많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놀라지 않는군?”
“암시장을 다닐 정도면 그만한 재력이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아무튼, 조세츠 자작은 도움을 받으면 반드시 보답하는 사람이니 여기서 하루 이틀 쉰다고 상단에 손해는 없을 거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그러니 자네도 피곤할 테니 쉬도록 하게.”
“감사합니다.”
카일이 고개를 숙이자 토일이 어깨를 두드리더니 조세츠 자작과 함께 마차로 향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카일의 얼굴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지더니, 이내 딱딱하게 굳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군.”
카일의 옆으로 언제 나타났는지 워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놈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고 계십니까?”
“북쪽으로 갔네. 말을 미친듯이 몰며 달려가기에 좀 이상하게 생각했지.”
“북쪽이라면 아킨스 자작령으로 갔겠군요.”
“아마도 그렇겠지. 이 주변에 영지라고는 아킨스 자작령과 다핸 남작령뿐이니 말이야.”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고갤 돌려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세인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추격할 생각인가?”
“일단 아가씨가 깨어난 뒤 그들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알겠네, 그렇게 하게.”
말을 마친 워드의 몸이 공기 중으로 흩어지듯 사라져 버렸다.
* * *
“돌아가자!”
빠르게 말을 달리던 비터가 더는 참지 못하고 말을 멈춰 세웠다.
“지금 돌아간다고 녀석이 우릴 용서할 것 같아? 아마 이번엔 정말 죽이려 들 거다.”
“이건… 정말 아니야! 카일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었어! 가문의 숙원을 이루어 줬단 말이야. 헌데… 이건….”
비터가 비참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넌 정말 녀석의 말대로 3년 뒤 검술을 익힐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그래! 난 카일이 가르쳐준 방법이라면 분명 검술을 익힐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비터가 확신에 찬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 난 믿지 못해! 알지도 못하는 녀석의 말을 믿을 수 없어.”
“카일은 우리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어! 녀석은 어떤 대가도 받지 않고 수련법을 알려줬잖아.”
“이미 대가는 지불했어! 녀석에게 가문의 검술을 전해 줬으니 말이야!”
마크의 말에 비터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언제 카일에게 검식을 알려줬지?”
비터의 말에 마크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비터의 말대로 그들은 검식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저 대련만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건 녀석이 원한 일이다.”
“아니! 카일은 처음부터 검술 따윈 바라지도 않았어.”
“하지만 녀석은 분명 검술을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어.”
“하…. 넌 정말 카일이 검술을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해? 단 한 번 본 검술을? 아무리 천재라도 그건 불가능해.”
비터는 안장에 매달린 검집을 가볍게 쓸어 넘기며 말을 이었다.
“마크, 너 역시 카일의 수련법이 가문의 숙원을 풀어줄 거라 믿고 있잖아!”
“무슨 소리야! 난 그 녀석 말은 믿지 못해.”
마크가 비터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소리쳤다.
“…너도 알겠지? 우리가 배운 수련법이 엉터리라면 카일이 검술을 온전히 기억한다 해도 검술 자체를 익힐 수 없다는 걸!”
“그… 건!”
“넌 이 수련법을 믿고 있어, 그러니 이미 충분한 대가를 지불했다 생각한 거 아니야!”
마크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래! 녀석의 수련법은 나도 믿고 있다. 흑기사와 싸우던 녀석의 모습은 정말 강했으니까! 녀석이 매일같이 수련하는 혼원장은 분명 가치가 있는 수련법일 거다.”
마크가 결국 비터의 말을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 단호함이 어렸다.
“하지만 그래서 어쨌다는 거지? 녀석은 우리 가문의 사람도, 혈족도 아니다. 그저 왕국 오지 마을 자경대장의 아들일 뿐이야. 녀석이 도움을 줬다고는 하지만 그뿐이다.”
“너!”
“명심해! 우린 정의를 외치고 악을 멸하는 낭만적인 기사가 되기 위해 온 게 아니야! 가문을… 피를 나눈 우리의 형제를 지키기 위해 이곳까지 온 거야!”
마크의 단호한 말에 비터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가 알던 정의롭고 선하던 마크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져 버린 듯했다.
“……너, 변했구나.”
“너만 지친 게 아니야! 나도 지쳤어! 정말 이대로 가문이 무너지는 걸 지켜봐야만 하는 줄 알았어, 하지만 이젠 희망이 생겼잖아. 이젠 가문을 지키는 것을 넘어 더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있어.”
“하지만… 이건 옳지 않아.”
“지금은 옳고 그름을 따질 때가 아니야. 우린, 아니! 넌 지켜야 할 사람이 있다는 걸 잊지 마.”
마크의 말은 비터의 심장을 잔인하게 찔러 왔다. 마크의 말대로 지금도 가족들은 자신을 믿고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게는 검술을 익히고, 더 나아가 가문을 번영시킬 의무가 있었다.
“…이번, 이번 한 번뿐이야. 이 위기만 넘긴다면 다신 이런 일은 없을 거야.”
“아… 알겠다.”
비터가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있어서도 정의보단 가족과 가문이 더 소중하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밤새 달리면 내일 새벽녘엔 아킨스 자작령에 도착할 거야! 그럼 곧장 길드에 맡겨 놓은 골드를 찾아 고향으로 돌아가는 거야.”
마크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용병길드에서는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용병들의 골드를 보관해주었다. 그리고 용병길드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용병패를 통해 골드를 찾을 수 있게 만들었다. 마크와 비터 역시 5년간 왕국을 떠돌며 모은 골드를 용병길드에 맡겨 놓았다.
“하지만 걱정이군…. 가문까지는 먼 길인데, 골드가 부족하지 않을까?.”
“최대한 아끼면 힘들지만 갈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지금쯤 카일도 추격을 시작했을 거야. 그냥… 동부로 곧장 가는 건 어때?”
“카일? 녀석이 아무리 대단해도 이제 겨우 말 위에 올라탔을 뿐이야! 추격은 처음부터 불가능해.”
마크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급작스럽게 벌인 일이지만 제법 완벽한 계획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카일은 승마에도 서툴지만 당장 몸을 빼내기도 힘들었다. 지금 당장 상단을 보호해 아킨스 자작령까지 함께해줄 사람은 카일과 그의 일행이 유일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길드에는 들렸다 가야 해. 동부를 거쳐 제국으로 가더라도 골드는 필요하니까. 하지만 그럴 바에야 차라리 곧장 베링 산맥을 넘는 게 좋아.”
동부를 거쳐 제국으로 넘어가려면 상당히 먼길을 돌아서 가야 하지만 베링 산맥을 넘으면 곧장 제국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비록 험한 산맥을 오랫동안 넘어야 하지만 여기서 제국으로 넘어가기에는 가장 빠른 길이기도 했다.
“휴… 알았다. 그렇게 하자.”
비터가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고개를 돌려 점점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돌아갈 수 없는 길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