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사라진 혈족1
“이상하지 않나? 조세츠 자작을 도울 생각도 없으면서 왜 조세츠 자작을 감시하고 있었을까? 혹 저들이 물건을 훔치고 조세츠 자작에게 뒤집어씌운 것은 아닐까?”
카일의 말대로 갑작스럽게 나타난 새로운 세력은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렇네! 나와 루트는 영지에서부터 오직 둘이서만 움직였네. 자네들의 정보력이라면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일 아닌가?”
“그건….”
조세츠 자작의 말대로 사내가 속한 조직은 제법 촘촘한 조직력과 정보력을 가지고 있었다. 자작이 움직인 행적 정도는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워낙 급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현장에서 발견된 단추만 확인하고 급히 자작을 뒤쫓아 온 것이다.
“어차피 자작은 영지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지금 놓아준다 해도 얼마든지 다시 찾을 수 있다는 말이지! 하지만 저 녀석을 놓치면….”
카일의 말에 사내의 눈에 다급함이 어렸다. 카일의 말대로 조세츠 자작이 갈 곳은 뻔했다. 여기서 무사히 빠져나간다 해도 얼마든지 다시 찾아 죄를 물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숲에 숨어있던 자들은 지금 붙잡지 않으면 다시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눈앞에 있는 정체 모를 사내를 뚫고 조세츠 자작을 잡는 것도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사내는 이내 결정을 내렸는지 조세츠 자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 당신의 혐의가 벗겨진 건 아니오. 잊지 마시오.”
사내가 차갑게 조세츠 자작을 노려보다가 카일을 바라보았다.
“다음에 다시 만나길 기대하겠다. 시간이 된다면… 날 찾아와라!”
사내가 품 안에서 작은 동패를 꺼내 카일을 향해 던졌다. 새까맣게 칠해진 동패에는 독특한 보랏빛 꽃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걸 보여주면 날 만날 수 있다. 꼭 찾아와라!”
사내는 카일의 대답도 듣지 않고 곧장 숲으로 뛰어들었다.
“어이! 이봐, 어디로 찾아오라는 거야! 말을 해줘야 찾아갈 거 아니야!”
카일이 숲으로 사라진 사내를 불렀지만 이미 모습을 감춘 뒤였다.
“저자는 블랙마킷에서 왔네.”
카일의 옆으로 조세츠 자작이 다가와 말했다.
“암시장에서 왔다는 말입니까?”
“그렇네! 아무래도 저자가 자네에게 관심이 아주 많은 것 같군. 다크플라워를 주다니 말야.”
“이 동패를 말하는 겁니까?”
“그렇네! 블랙마킷은 아무나 출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네. 정확한 신분이 확인된 사람도 등급에 따라 출입할 수 있는 곳이 정해져 있다네.”
조세츠 자작이 카일의 손에 들려있는 동패를 탐욕스럽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다크 플라워, 다른 말로 암향화를 가진 사람은 상층까지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다네. 바로 수뇌부 중 하나가 동패를 가진 사람을 보증해주고 있기 때문이지! 동패의 뒷면을 보면 표식이 있을 거네.”
카일이 조세츠 자작의 말대로 동패를 뒤집자 10이란 숫자가 새겨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마 이자는 수뇌부 중 서열 10위인가 보군.”
“암시장에 대해 잘 아시는군요.”
“이 정도야 골드카드 멤버라면 누구든 알고 있는 이야기지.”
“골드카드?”
“암시장의 상층에 출입할 수 있는 일종의 출입증이지. 최하층인 레드부터 블루, 골드. 마지막으로 최상층을 출입할 수 있는 블랙카드까지 색에 따라 출입할 수 있는 곳이 다르다네.”
자작의 말에 카일이 실망스런 얼굴로 손에 들린 동패를 바라보았다.
“하하. 자네 욕심이 많군. 골드카드는 왕족이나 고위 귀족이 아니라면 쉽게 구할 수 없는 물건이야. 나도 무려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암시장을 이용하며 신용을 쌓았기에 겨우 얻은 물건이야.”
“그런가요?”
“동패를 가진 자는 다른 사람과는 달리 처음부터 상층부를 출입할 수 있네! 운이 좋다면 곧장 최상층부까지 갈 수도 있지.”
“이제 보니 대단한 물건이군요.”
“아니지…. 그보다는 암시장의 수뇌와 인연을 맺었다는 게 더 중요한 일이지.”
조세츠 자작이 카일을 이리저리 살피며 말했다. 카일은 조세츠 자작의 시선을 피하며 바닥에 쓰러져있는 루트에게 다가갔다.
“기절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보이네.”
자작이 안타까운 눈으로 루트를 바라보았다.
“그럼 일단 이곳을 벗어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도와주겠나?”
“…시작했으니… 알겠습니다.”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루트를 들어 올렸다.
“정말… 힘이 좋군.”
“체질입니다.”
카일이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자네, 이름이 뭔가? 목소리를 들어보니 나이도 그리 많지 않은데?”
조세츠 자작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카일의 옆으로 바짝 다가와 물었다. 하지만 카일은 아무 말 없이 그저 묵묵히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왜 그러나…. 내게 신분을 밝히기 싫은가? 이미 알겠지만 난 조세츠 자작이라 하네.”
자작이 아무런 말도 없는 카일에게 계속 말을 붙였다. 이제 보니 자작은 생각보다 말이 많은 자였다.
“난 남부와 중부 사이에 영지가 있다네. 이번에 도움을 받았으니 충분히 보상해주겠네. 날 따라 영지로 가지 않겠나?”
카일을 바라보는 조세츠 자작의 눈이 반짝였다. 그러자 카일이 갑자기 멈춰서서 자작을 내려다보았다.
순간 조세츠 자작이 당황한 듯 카일을 보며 손을 저었다.
“아니…. 그냥… 난 자네에게 보답을 하고 싶어….”
“잠시 여기서 기다려 주십시오.”
카일이 담담하게 자작을 바라보았다.
“알… 겠네.”
자작이 카일의 말에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은 조심스럽게 루트를 내려놓고 눈앞에 서 있는 나무 위로 올랐다.
“자네… 검사였나?”
조세츠 자작이 나무 위에 숨겨놓은 환도를 챙겨 내려오는 카일을 보며 경악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검도 조금 쓸 줄 압니다.”
카일이 웃으며 바닥에 내려놓았던 루트를 짊어졌다. 카일이 환도를 나무 위에 숨긴 것은 일반적인 검과는 다른 독특한 형태로 인해 쉽게 정체가 드러날 것을 우려해서였다.
“놀랍군! 그럼 격투술만큼 검술도 한다는 말 아닌가?”
조세츠 자작이 또다시 카일의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그런 뜻은 아닙니다만.”
“걱정 말게. 다른 사람에겐 말하지 않을 테니 말이야. 그나저나 얼굴은 보여주지 않을 생각인가? 이쯤이 되면 신분을 밝힐 만도 한데 말이야.”
자작이 카일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조금 전 있었던 급박했던 상황은 벌써 잊었는지 얼굴에는 활기가 넘쳤다.
“흠…. 성격이… 참… 좋으시군요.”
“하하. 내가 예전엔 그런 소리를 좀 들었지. 하지만 요즘엔 딸아이에게 잔소리를 듣는다네. 말이 많아 경박스럽다나? 자네가 보기에도 내가 경박스러운가? 딸 하나 있는 것이 어찌나 잔소리가 심한지…. 글쎄 지난번엔 말이야!”
카일은 곧 자신의 실수를 절감했다. 카일이 자신의 말을 들어주자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조세츠 자작은 쉬지 않고 떠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조세츠 자작도 갑작스럽게 변해버린 카일의 싸늘한 기운에 입을 다물었다.
“아가씨!”
카일이 급히 달려가 나무에 기대어 쓰러져 있는 세인에게 달려갔다. 조세츠 자작 역시 급히 카일의 뒤를 쫓았다.
“음…. 잠시 기절한 것뿐 몸에는 이상이 없는 것 같네. 헌데 일행인가?”
자작이 급히 다가와 세인을 살피더니 걱정 말라는 듯 손을 흔들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카일은 자작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살폈다. 함께 있어야 할 비터와 마크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혹 습격을 받은 건 아닌지 바닥을 살폈지만, 딱히 드러난 흔적은 없었다. 아무래도 정확한 상황은 세인이 깨어나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언제쯤 깨어날 것 같습니까?”
“충격을 받긴 했지만 그리 심하진 않으니, 아마도 한두 시간 후면 깨어날 것 같네.”
“휴…. 다행이군요. 그럼 일단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가야겠습니다.”
“다른 일행이 또 있나?”
“잠시 일이 있어 일행과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곳에 같이 있던 두 사람이 사라지긴 했지만, 지금으로서는 어찌 된 건지 알 수가 없군요.”
카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자작이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사이 카일은 입고 있던 피풍의를 대충 잘라 끈을 만든 뒤, 등에 업고 있는 루트를 떨어지지 않게 단단히 동여매고는 세인을 안아 들었다.
“가시죠.”
생각에 잠겨있던 자작이 카일의 모습에 깜짝 놀라며 물었다.
“지금… 두 사람을 모두 안고 가겠다는 말인가?”
루트는 건장한 사내일 뿐 아니라 레더아머와 각종 금속 보호구를 착용하고 있었고, 세인 역시 만만치 않은 무장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오러를 사용한다고 해도 이만한 무게를 감당하기는 힘들었다. 더구나 오러는 순간적으로 근육을 강화시켜 큰 힘을 낼 수 있게 해줄 뿐, 지구력을 높여주지는 않는다고 알려져 있어 자작은 카일이 무리를 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괜찮습니다. 지금은 급하니 서둘러가시지요.”
“그러고 가다간 자네도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쓰러지고 말 것이네!”
자작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차라리 루트를 내려놓게. 자네가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겠네!”
“아닙니다. 갈 수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이, 이보게!”
자작이 앞장서서 걸어가는 카일을 불렀지만, 카일은 오히려 더욱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여기서 자작과 실랑이를 벌일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이봐! 같이 가야지”
카일의 걸음이 빨라지자 자작이 황급히 카일을 부르며 달려갔지만, 카일은 자작이 부르는 소리를 애써 외면하며 더욱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헉헉헉….”
카일의 걸음이 점점 빨라지자 자작의 말소리는 조금씩 줄어들더니 나중엔 거친 숨소리만 들려왔다.
“이보게…. 더 이상은 못가네!”
조세츠 자작이 결국 바닥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다 왔습니다.”
“헉헉…. 정말 더는 못가겠네, 여기서 좀 쉬었다 가세!”
자작이 고개도 들지 않고 나무에 기대어 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조금 더 가시면 편하게 쉴 수 있습니다.”
“거짓말 말게!”
자작이 불통한 표정을 지으며 카일을 노려보았다.
“다들 그러지.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조금 더 힘을 내라! 하지만 결국 모두 거짓말이었네! 항상 가야 할 길은 달려온 거리보다 멀고 험했네.”
“경험이 있으신가 봅니다.”
“있지! 이래 봬도 왕년엔 가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세상을 돌아봤다네! 하지만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라면 제국을 여행한 일이라네.”
“제국에도 갔다 오셨습니까?”
카일의 호기심 어린 물음에 자작의 얼굴이 오히려 일그러졌다.
“물론 갔었지! 20년 전에 말이야. 그때 아주 지독한 용병 놈을 만났지! 성격도 제멋대로에 독하긴 얼마나 독한 놈인지…. 그때 그놈이 자네처럼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카일!”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자작이 고개를 돌렸다.
“어….”
“제가 다 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카일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가죽 천을 벗으며 말했다.
“카일이라 합니다.”
“굉장히 어리군….”
“굉장히는 아니고… 해가 바뀌면 18살이 됩니다.”
카일이 웃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어이없이 바라보던 자작이 힘겹게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세인 경이 왜…. 그리고 저들은 누구죠?”
시안느와 이엘이 급히 달려와 카일의 품에 안겨 기절해 있는 세인을 살폈다. 그리고는 카일의 뒤를 따라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조세츠 자작을 보며 물었다.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요. 일단 멀린 님을 좀 불러 주시겠습니까?”
“아! 제가 갔다 올게요.”
이엘이 급히 멀린이 머물고 있는 마차로 향했다. 그사이 카일은 세인과 루트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조세츠 자작님이 아니십니까?”
카일이 숲에서 낯선 사람을 데려오자 곧장 토일이 달려왔다. 낯선 자의 합류는 상단이 가장 꺼리는 일 중 하나라 곧장 토일에게 알려진 것이다.
“아니! 토일 지부장이 아닌가!”
조세츠 자작 역시 토일 지부장을 잘 알고 있는지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아니… 이게 어찌 된 일이십니까?”
“어쩌다 보니 일이 그리되었네! 다행히 여기 카일 군의 도움으로 무사할 수 있었다네! 헌데, 자네들도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닌가 보군.”
조세츠 자작이 주변을 한번 돌아보더니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저희도 좋지 않은 일이 있었습니다.”
“상행 중에 좋지 않은 일이라면 습격을 받았다는 말인데, 생각보다 피해가 큰가 보군.”
“역시 자작님은 단번에 알아보시는군요. 휴…. 정확히 보셨습니다.”
토일이 자작의 물음에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이곤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