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피스트 워리어2
가면을 쓴 사내가 피로 물든 주먹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갑자기 날아온 암격이었고, 워낙 빨라 피할 여유조차 없었다.
하지만 사내의 주먹에는 날카로운 오러 소드를 막을 정도로 강력한 오러가 밀집되어 있었다. 아무리 갑작스럽게 날아온 암격이라도 이렇게 쉽게 자신의 오러를 뚫고 손에 상처를 입힐 줄 몰랐다.
“조력자가 있었나?”
사내는 숲에서 들려오는 격렬한 검격 소리에 굳은 얼굴로 루트를 돌아봤다. 그사이 루트에게 달려온 조세츠 자작이 사내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어떨 것 같으냐!”
루트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겨우 몸을 일으켜 조세츠 자작의 앞을 막아서며 웃음을 흘렸다.
그 모습에 사내의 얼굴이 잠시 일그러졌지만, 이내 결정을 내렸는지 루트와 조세츠 자작을 바라보는 눈에 잔인한 빛이 어렸다.
숲에서 들려오는 검격 소리가 점점 더 격하게 울리고 있었다. 나타난 자들의 실력이 심상치 않다는 방증이었다. 여기서 시간을 더 끌다가는 더 많은 적들이 나타날 수도 있었다.
“할 수 없지! 일단 도망치지 못하게 다리부터 부러트리고 어떤 놈들인지 내가 직접 확인하겠다.”
사내의 말에 루트가 입술을 깨물며 검을 들어 올렸다.
“영주님! 피하십시오. 여긴 제가 막고 있겠습니다.”
“아… 안돼! 널 두고 어딜 가란 말이냐!”
“로잘린을 생각하십시오. 저와 영주님 모두 여기서 빠져나갈 수는 없습니다.”
루트의 말에 조세츠 남작의 얼굴에 난처함이 어렸다. 조세츠 자작은 현명한 사람이었다. 그도 루트의 판단이 옳다는 걸 알지만, 쉽게 돌아설 수는 없었다.
“…가십시오.”
루트가 조세츠 자작을 밀어내며 검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흥! 둘 다 도망가지 못한다.”
사내가 발을 굴려 곧장 루트에게 달려들었다. 계획대로 단번에 루트를 죽이고 조세츠 자작을 붙잡을 생각인 것이다.
-쉬익-
순간 날카로운 기운이 사내의 측면에서 엄습해 왔다.
“나타났구나!”
앞으로 달려 나가던 사내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몸을 틀어 주먹을 뻗었다.
-쩌엉-
귀를 울리는 굉음과 함께 사내가 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땐 가죽으로 얼굴을 대충 가린 장대한 체구의 사내가 서 있었다.
“네놈이구나!”
사납게 새롭게 등장한 사내, 카일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러나 카일은 사내의 말에는 관심도 없는지 고개를 돌려 바닥에 쓰러진 루트를 바라보았다.
“안전한 곳으로 물러나 계시지요.”
“자… 넨?”
조세츠 자작이 의문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카일을 바라보았지만, 카일은 그의 시선을 모른 척 외면하며 고개를 돌려 가면을 쓴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만 돌아가라.”
“넌 누구냐!”
“알 것 없다.”
“흥! 알아야겠다면?”
가면을 쓴 사내가 사납게 카일을 노려보았다. 그 모습에 카일의 눈에 장난기가 어렸다.
“그런 넌 누구냐?”
“뭐!”
“내가 누군지 물으려면, 본인이 누군지부터 밝히는 게 순서가 아닌가? 난 네가 누군지 알아야겠다.”
카일의 말에 사내의 눈가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지금… 날 놀리는 거냐.”
“이런… 들켰군. 사실 난 네놈이 누군지 전혀 관심이 없다.”
사실 카일은 이런 일에 끼어들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저 자신이나 상단이 이런 다툼에 엮이지만 않는다면 그냥 모른 척 지나칠 생각이었다.
비록 가면을 쓰고 다수가 소수를 핍박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둘 중 누가 선인지 악인지 지금 상황만으로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단지… 그냥 좀 귀찮을 뿐이지.”
카일이 귀찮음을 무릅쓰고 조세츠 자작을 도운 건,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존재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들을 감시하는 또 다른 존재들이었다.
어둠 속에서 조세츠 자작이 공격당하는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던 복면의 사내들, 그렇다고 자작을 공격한 무리와 같은 세력으로도 보이지도 않았다.
아니, 지금 숲속에서 들려오는 격렬한 금속음만 들어도 같은 무리가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지금… 귀찮다고… 한 건가!”
가면을 쓴 사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피스트 워리어 중급에 오른 이후 누군가에게 이렇게 무시를 당한 적은 처음이었다.
“아아! 혼자 한 말이니 신경 쓰지 말도록.”
카일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하지만 오히려 가면을 쓰고 있던 사내의 눈이 더욱 사나워졌다.
“네놈이 얼마나 대단한지 직접 확인해 보겠다.”
꽝-
사내가 무겁게 한 발을 내딛는 순간, 마치 포탄이 터지듯 땅이 움푹 꺼지며 카일을 향해 날아들었다. 눈 깜짝하는 순간에 사내의 주먹이 어느새 카일의 얼굴까지 다가와 있었다. 루트를 처음 상대할 때보다 배는 빠른 움직임이었다.
“빠르군.”
카일은 사내의 주먹을 흥미롭게 바라보다 몸을 비틀어 가볍게 피했다. 그와 동시에 카일의 품에서 날카로운 기운이 뻗어 나와 사내의 어깨를 노렸다.
-쉬익-
섬뜩한 기운이 어깨로 다가오자 사내가 몸을 뒤로 빼내며 카일의 손을 바라보았다.
“단검!”
“피스트 워리어. 근접전투에 능한 상대를 장검으로 상대하려면 좀 피곤할 것 같아서 말이야.”
카일이 웃음을 흘리며 손에 들린 단검을 장난처럼 휘둘렀다.
“그럼… 이젠 내 차례인가?”
카일의 단검이 갑자기 사선을 그리며 사내의 옆구리를 베어왔다. 단순하고 단조롭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빠르게 짓쳐들어오는 단검에 사내가 급히 팔을 뻗어 카일의 공격을 막았다. 카일은 오른손이 막히자 단검을 손에서 놓아버렸다. 아래로 뚝 떨어진 단검을 왼손으로 받아든 카일이 그대로 밀어 올려 명치를 향해 찔러 넣었다.
스으윽-
청백색의 오러가 담긴 카일의 단도가 섬뜩한 기운을 품고 다가왔다. 깜짝 놀란 사내가 급히 뒤로 물러나며 동시에 카일의 가슴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이놈! 죽여 버리겠다!”
사내의 주먹에 선명한 보랏빛 기운이 맺히며 강대한 기운이 뿜어졌다.
“놈! 끝이다!”
가슴을 단번에 부숴버릴 듯 보랏빛 잔상을 남기며 카일을 향해 주먹이 짓쳐들었다.
순간 카일이 다가오는 주먹을 향해 단검을 들지 않은 오른손을 부드럽게 쫙 펼쳤다. 마치 주먹을 손으로 붙잡으려는 듯 보였다.
“멍청한 놈! 단번 손까지 부러트려 주마!”
사내가 크게 소리쳤다.
하지만 카일은 사내의 고함 소리에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고 손을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와 함께 카일의 손에 맺혀 있던 청백색의 오러가 서서히 암청색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세츠 자작과 루트는 카일의 등 뒤에 위치해 있었고, 공격해 오는 사내는 정신을 온전히 주먹에 집중하고 있어 오러가 변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지 못했다.
“어엇!”
사내에게서 당황스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카일의 손과 주먹이 마주치는 순간, 마치 부드러운 천을 주먹으로 치듯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끈적한 기운이 주먹을 감싸며 카일의 손을 따라 원을 그리다 밖으로 튕겨 나가 버렸다.
그와 동시에 카일의 어깨가 사내의 오른쪽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퍼억-
“커억-!”
강한 충격과 함께 밀려 나가는 사내의 팔을 덥석 잡아당긴 카일의 단검이 사내의 팔목을 베어왔다.
“젠장!”
사내는 가슴에서 올라오는 핏물을 억지로 삼키며 짧은 욕설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카일의 명치를 향해 무릎을 차올렸다.
카일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명치로 다가오는 무릎을 팔꿈치로 내려쳤다.
-퍼억-
순간 카일의 가슴으로 사내의 왼손이 박혀 들자, 카일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무릎은 허초였나?”
카일이 입안에 고인 핏물을 뱉어내며 물었다. 하지만 사내는 뒤로 물러나서도 카일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푸확-
거칠게 피를 토해낸 사내가 카일을 무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나… 날 또 속였군!”
“뭘 속였단 말이지?”
“단검은 속임수 아닌가? 넌 분명 상당한 수준의 권술을 익힌 피스트 워리어다. 아니라고 할 텐가?”
사내의 눈에서 부상도 잊은듯한 묘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그는 지금껏 수많은 대결을 펼쳐왔지만 단 한 번도 자신과 같은 피스트 워리어를 만난 적이 없었다. 더구나 상대는 생전 처음 접하는 특이한 권술을 익히고 있었다.
“글쎄?”
카일이 묘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카일이 태극권의 일부를 검술에 접목하여 사용하기는 하지만 권법을 실전에 사용한 건 이번이 처음 이었다.
모두 암청색의 오러의 특성 덕분이었다.
“휴…. 처음이다. 나 말고 또 다른 피스트 워리어를 만난 건!”
사내가 아쉬운 듯 카일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적으로 만나지 않았다면 너와 오랫동안 대화를 나눌 수 있었을 텐데. 아쉽군.”
“내가 왜 적이라 생각하지?”
카일의 말에 사내의 의아한 눈으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지?”
“말한 그대로다. 난 누구의 편도 들 생각이 없다. 다만 좀 거슬리는 자들이 있어 나선 것뿐이다.”
“거슬리는 자?”
카일의 시선이 숲으로 향했다.
“같은 무리가 아닌가?”
“난 혼자다.”
카일의 담담한 말에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말을 어떻게 믿지?”
“내가 거짓을 말할 이유가 있을까?”
카일의 태연한 말이 사내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선기를 잡은 이상 모든 면에서 가면을 쓴 사내가 불리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조세츠 자작에게 받아야 될 물건이 있다. 우린 반드시 물건을 회수해야 한다.”
사내가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사내가 받은 명은 물건의 회수와 응징이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내겐 물건이 없다.”
카일과 사내의 대화를 듣고 있던 조세츠 자작이 재빨리 다가와 소리쳤다.
“흥! 증거가 명백한데 아직도 허튼소리를 하는 건가?”
“단추를 잃어버린 건 사실이다. 하지만 언제 어떻게 잃어버린지도 모를 단추 하나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쓸 수는 없다. 분명히 말하지만 난 훔치지 않았다!”
카일은 조세츠 자작의 말에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흠…. 사라진 물건이 어떤 건지는 모르지만, 정확히 조세츠 자작이 범인이란 증거가 있나? 현장에서 나온 단추 말고 말이야.”
“그 단추에는 조세츠 자작가의 인장에 새겨진 달맞이꽃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그보다 더 정확한 증거가 어디에 있겠나?”
“그러니 더 이상하지 않을까?”
“무… 슨….”
카일이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물었다.
“일단 중요한 물건이었다면, 경호를 하는 자들이 제법 많았을 것 같은데?”
“그… 렇다. 십여 명의 호위들이 항상 지키고 있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하지 않나? 아무리 기습이라지만 호위까지 죽이고 물건을 탈취하려면 기사 혼자로는 불가능할 것 같은데?”
카일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바닥에 쓰러져있는 루트에게로 향했다.
“흥! 그야 물건을 탈취한 뒤 붙잡히지 않게 흩어져 도주했을 거다.”
“그것도 이상하군. 중요한 물건이라면, 훔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훔친 물건을 안전한 곳까지 가져가는 게 더 중요한데, 호위기사 하나론 부족하지 않을까?”
“오히려 의심을 피하려는 것일 수도 있지.”
사내의 말에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심을 피하려 했다면 여러 사람보다는 소수로 움직였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럴 수도 있군. 하지만 또 한 가지, 왜 단추가 그곳에 떨어져 있었지?’
“왜라니? 당연히 조세츠 자작이 현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사내가 오히려 카일의 물음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대답했다.
“너도 알겠지만 조세프 자작은 검술을 익히지 않았다. 그런데 왜 기습을 하는 현장에 와 있었지? 혹 전투 중 부러진 칼이라도 날아들면 큰일일 텐데?”
“물건을 직접 챙기려 했겠지, 그만큼 가치 있는 물건이니까!”
“이렇게 화려한 복장을 하고 말인가? 더구나 가문의 인장이 새겨진 단추까지 달고? 누군가 기습 장면을 본다면 단번에 조세츠 자작을 알아볼 텐데?”
“신분이 드러나도 빠져나갈 자신이 있었겠지.”
사내가 카일의 말을 반박했지만 이미 눈동자는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신분이 드러나도 상관이 없다면, 신분을 숨기기 위해 소수로 움직일 필요도 없었겠지.”
“….”
카일의 말에 사내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이번 일은 중요한 사건이다. 물건을 옮기다 죽은 호위기사도 문제지만, 물건을 가지고 있던 지부장까지 목숨을 잃었다.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로서는 반드시 범인을 잡아야 한다.”
“그냥 넘어가란 말이 아니다. 난 지금 범인으로 의심되는 또 다른 세력을 알려주고 있다. 아직도 모르겠나?”
카일의 말에 사내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범인…!”
사내가 깜짝 놀라 숲으로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