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혈족
“좋다. 그렇다면… 호흡법만 알려주겠다.”
비터가 검을 마크에게 돌려준 뒤 직접 호흡법을 알려줬다.
‘크게 바뀐 부분은 없군.’
비터가 알려준 전반부 20식은 호흡법에서 크게 바뀐 부분은 없어 카일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렸다. 다만 두 개의 검식이 제외된 후반 10식은 카일도 처음 접하는 검식과 호흡법이라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카일이 만든 30식 검식의 완성도를 조금 더 끌어올릴 수 있을지 몰랐다.
“이제 나도 혼원장을 알려주겠다.”
“호흡법도 두 번만 듣고 외웠다는 말이냐?”
“두 번이면 충분하다.”
카일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비터는 카일의 말을 믿지 않았다. 어쩌면 카일은 처음부터 가문의 검술에 관심이 없었는지 몰랐다.
“혼원장은 가르치는 건 어렵지 않다. 중요한 건 수련자가 얼마나 집중해 몸 안에서 일어나는 떨림을 파악하고 의식을 집중하는가에 있다.”
카일이 직접 시범을 보인 뒤 비터와 마크의 자세를 바로잡아 주었다.
“호흡은 깊이 들여 마신 후 천천히 내쉬어라. 몸을 이완하며 자신의 숨소리에 정신을 집중해라!”
“비터, 팔이 너무 내려갔다. 나무를 감싸고 있다고 생각해!”
“마크는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마음이 긴장하면 몸도 경직된다. 명심해라! 정신은 몸과 오러를 조절한다.”
카일이 두 사람의 동작을 꼼꼼하게 살피고 잘못된 동작을 세세하게 바로 잡아주며 말을 이었다.
“정신은 물과 같다. 평소 우리의 정신은 수면으로 올라온 수많은 잡념이 마치 거친 파도와 같이 요동치고 있다. 하지만 내면 깊숙한 곳은 고요한 물처럼 평온하다.”
카일의 말이 이어질수록 비터와 마크의 표정이 점차 평온하게 변해 갔다.
“이 상태를 유지하면 내부 깊숙한 곳에서 일어나는 작은 떨림을 느낄 것이다. 바로 그 떨림을 따라 오러는 그동안 도달하지 못한 몸 깊숙이까지 스며들어 내부의 근육과 장기를 더욱 단단하고 질기게 만들어 줄 것이다.”
카일은 평온한 모습으로 혼원장을 수련하는 비터와 마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집중력이 대단해요. 벌써 침잠의 단계에 들어갔어요.”
“그만큼 절박했다는 말이겠죠.”
카일이 두 사람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어때요? 새로 만난 혈족을 보니 말이에요.”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원수라고 볼 수도 있지만, 또 피를 나는 혈족이라 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카일과 비터는 혈족과 가문을 중시하는 지금의 세상에서 가깝다면 가까운 관계지만, 원수라고 할 수도 있을 만큼 악연도 제법 쌓여 있었다.
“그런가요?”
세인이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지으며 카일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그냥, 두 사람을 가르치는 카일 님의 모습이 다른 때보다 더 진중하고 세심했던 것 같아서요.”
“하하. 그럴 리가….”
카일이 세인의 말에 어색하게 웃으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킁, 그냥 보고만 있으려 했지만… 이상한 자들이 접근 중이다.’
바로 그때, 카일의 머릿속으로 시카니스의 무미건조한 음성이 울렸다.
‘이상한 자들?’
카일이 재빨리 시카니스를 향해 물었다. 멀린에게 자신을 맡긴 일로 화가 난 시카니스는 한동안 카일의 부름에도 침묵으로 시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 일로 먼저 말을 걸어왔으니 카일로서는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멍청한 놈, 직접 확인해라!’
시카니스는 불퉁하게 대답을 하고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젠장! 어디서 오는지는 알려줘야 확인을 하지’
카일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북동쪽이다.’
시카니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고맙다. 확인해보지.’
카일이 짧게 감사를 전하며 고개를 돌려 북동쪽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나요?”
카일의 굳어진 표정을 보며 세인이 물었다.
“아무래도 누군가 이곳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번 가보고 오겠습니다.”
“저도 같이 가요!”
“잠시면 됩니다. 세인 경께서는 여기서 저들을 지켜 주세요.”
카일의 말에 세인이 두 사람을 바라보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조심하세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카일이 발을 굴려 빠르게 북동쪽으로 향했다.
* * *
“헉헉. 지독한 놈들!”
조세츠 자작이 바위에 기대 탁한 숨을 토해냈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무려 십여 일 동안 누군가에게 지독한 공격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주님, 가셔야 합니다. 놈들이 가까이 왔습니다!”
루트가 다급하게 달려와 조세츠 자작을 부축하며 말했다. 그는 이번 외유에 조세츠 자작이 유일하게 데려온 호위기사였다.
“난 틀렸다. 날 남겨두고 넌 곧장 영지로 돌아가라! 너 혼자라면 분명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을 거다.”
“말도 안 됩니다. 주군을 버리고 도주를 선택하는 기사가 어디 있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루트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영주님이 계신 곳이 바로 이 루트가 있을 곳입니다.”
“넌 여기서 죽어선 안 돼, 잊었느냐! 넌 나의 후계자다. 너와 내가 여기서 죽으면 로잘린과 영지는 누가 지킨단 말이냐!”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아가씨께 약속드렸습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영주님을 지키겠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돌아가란 말은 하지 마십시오. 듣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이 고지식한 녀석!”
조세츠 자작이 고개를 저었다. 벌써 몇 번째 루트와 벌이는 신경전이었다.
“반드시 살아서 아가씨께 돌아갈 겁니다. 그러니 영주님도 힘을 내십시오.”
“휴…. 이런 고지식한 놈을 내가 왜 데려왔는지….”
“후회해도 이미 늦으셨습니다. 전 절대 영주님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루트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자작을 부축했다. 그 모습에 조세츠 자작이 결국 고개를 흔들며 힘겹게 걸음을 내디뎠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아킨스 자작령입니다. 그럼 자작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을 겁니다.”
“아킨스, 그 늙은 돼지 녀석이 이득도 없는 일에 나설 것 같으냐?”
조세츠 자작이 아킨스 자작의 얼굴을 떠올리며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하지만 여기서 가까운 영지는 아킨스 자작령과 다핸 남작령뿐입니다. 남작령의 켈토 기사단장은 남부에서 알아주는 기사지만, 기사의 숫자는 아킨스 자작이 월등합니다.”
“휴…. 그렇긴 하다만 아킨스 자작은 욕심 많은 노인이다. 이번에 도움을 받는다면 분명 많은 것을 요구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살아남는 것이 중요합니다.”
루트의 말에 조세츠 자작이 허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물이야 또 모을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자신과 루트가 죽는다면 혼자 남을 로잘린의 운명 역시 비참해질 것이다. 영지를 물려받을 나이 어린 여인을 가만히 두고 볼 귀족들은 없을 것이다.
“하아. 아킨스 자작이 불편하시면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조세츠 자작의 침통한 얼굴에 루트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조금 위험은 하겠지만, 아킨스 자작령에서 용병을 구해보는 겁니다.”
“용… 병?”
“아킨스 자작령에는 용병길드가 있지 않습니까? 남부의 사정상 실력 있는 용병은 구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다수의 용병은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조세츠 자작이 루트의 말에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조세츠 자작이 탄식을 하며 루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핸 남작령으로 간다.”
“예? 하지만 다핸 남작령은 열악한 곳입니다. 도움을 받기는….”
“내게 생각이 있다.”
조세츠 자작이 확신에 찬 얼굴로 말을 했다.
“휴…. 영주님의 명이라면 가야겠지요.”
루트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하지만 몇 발자국도 가지 못하고 걸음을 멈춰 세울 수밖에는 없었다.
“대단하군. 우릴 피해 여기까지 오다니!”
“벌써….”
루트가 주춤 뒤로 물러났다. 조세츠 자작과 루트의 앞을 막아선 사내는 검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이젠 그만 포기하고 순순히 물건을 내어놓아라! 그럼 고통 없이 죽여주지.”
“분명 말하지만 우린 가지고 있지 않다.”
“여기까지 와서 발뺌할 생각인가? 이걸 보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보자!”
사내의 목소리는 더욱 차갑게 내려앉았다. 그리고는 품 안에서 꺼낸 작은 물체를 조세츠 자작을 향해 던졌다.
천천히 날아간 물체가 조세츠 자작에게로 향하자 루트가 재빨리 날아오는 물체를 낚아챘다.
“…이건!”
조세츠 자작이 당황한 얼굴로 손에 들려있는 작은 물체를 내려다보았다.
“설마 그걸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루트의 손에 들려있는 물체는 바로 단추였다. 하지만 일반 단추와는 달리 세심하게 꽃문양을 새기고, 여기에 노란빛으로 채색까지 마친 정교하고 아름다운 단추였다.
“이게… 어떻게…!”
“단추에 새겨진 꽃은 달맞이꽃이다. 바로 조세츠 자작가를 상징하는 꽃이며, 지금 네가 입고 있는 옷에 달린 단추에도 같은 것이 새겨져 있지. 이것은 죽은 자가 있던 곳에서 발견되었다. 설마 이런데도 발뺌을 할 생각인가?”
사내가 격양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건 음모다. 우린 정말 모르는 일이다!”
“흥…. 결국 편하게 죽을 수 있는 기회를 버리겠다는 말이군. 하지만 걱정 마라! 그대들의 입을 열어 줄 기술자들이 수없이 대기하고 있으니 말이다.”
사내가 고개를 돌려 숲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사내와 비슷한 복장을 한 십여 명의 무리가 숲을 빠져나와 조세츠 자작과 루트를 포위했다.
“얼마든지 반항해도 좋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네놈들의 머리와 말할 수 있는 입뿐이다. 불필요한 것들은 깔끔하게 정리해 주지.”
경고하는 사내의 눈에서 섬뜩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흥! 날 죽이기 전엔 절대 주군께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
“네 녀석이구나. 번번이 추격에 혼란을 준 녀석이!”
“혼란…?”
루트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사내를 노려보았다.
“멍청하군! 고작 그 정도에 혼란을 겪었다니 말이야!”
“하하! 날 화나게 한다고 쉽게 죽여줄 것 같으냐! 날 고생시켰으니 그만한 보답은 해주겠다. 녀석의 다리를 뽑아 비참하게 기어 다니게 만들어주마!”
“어림도 없는 소리!”
루트가 곧장 검을 뽑아 무리의 대장으로 보이는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어차피 포위된 상황에서 조세츠 자작을 데리고 빠져나가기에는 늦었다 판단하고 곧장 대장으로 보이는 사내를 잡으려 한 것이다. 더구나 사내는 다른 놈들과 달리 아무것도 없는 빈손이라 쉽게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역시 기사 놈들은 예상을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군!”
사내가 달려드는 루트를 보고는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한 발을 무겁게 내디디며 다가오는 루트의 검을 향해 오른쪽 주먹을 뻗었다.
-따아앙-
오러를 잔뜩 머금은 루트의 검과 사내의 주먹이 마주치는 순간, 맑은 금속음이 울리며 루트의 검이 사내를 비껴갔다. 동시에 사내의 왼쪽 주먹이 루트이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퍽-
작은 충격음과 함께 루트가 가슴을 부여잡고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크윽-!”
“루트, 괜찮으냐!”
조세츠 자작이 급히 루트에게 달려와 그를 부축했다. 하지만 루트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사내를 노려볼 뿐이었다.
짝짝짝-
“크크, 대단하군! 대단해, 그 짧은 순간에 몸을 틀어 충격을 해소하다니 말이야!”
사내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장난처럼 박수를쳤다. 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루트의 얼굴은 더욱더 굳어가고 있었다.
“피스트… 워리어!”
루트가 사내의 주먹에서 피어오르는 옅은 보랏빛 기운을 보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