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익힐 수 없는 검2
“익힐 수 없는 검술이라면 포기하는 것이 어떤가요. 외부인이 알려줬다면 처음부터 그대 가문의 검술이 아니잖아요. 검술을 알려준 사람이 처음부터 잘못 알려준 것 아닌가요?”
“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어떻게 확신을 하죠? 검술을 익힐 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요?”
“지금 당장 검술을 익힐 수는 없지만, 익힌 사람은 있었습니다.”
비터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듣고 있는 카일이나 세인에게는 앞뒤가 맞지 않은 황당한 이야기였다.
“알고 있습니다. 제 이야기가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된 이야기라는 것을 말입니다. 하지만 사실입니다.”
비터와 마크의 얼굴은 참담하게 일그러졌지만, 비터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휴…. 그 검술을 익힌 사람은 제 아버지입니다. 검술을 전해준 사람으로부터 직접 검술을 배웠고, 중급을 넘어 상급을 목전에 두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를 제외한 누구도 검술을 익힐 수 없었습니다.”
“검술을… 전해 준 사람이 누구인지 아나요?”
“당시 왕국에서 온 용병으로 이름만 알고 있습니다. 하일드라는 용병이었습니다.”
“하일드?”
“그렇습니다. 우리 두 사람이 용병으로 떠돈 이유도 바로 용병 하일드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헌데 이상하군. 어째서 용병이 전해준 검술을 계속 가문의 검술이라 하는 건가?”
카일이 무심히 물었다. 하지만 이 질문이야말로 카일이 가장 알고 싶은 사실이기도 했다.
“그건… 비화가 있다.”
“비화?”
비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그 용병은 오래전 가문의 검술을 훔쳐 왕국으로 도주한 자의 후손이었다.”
“검술을 훔친 자의 후손이라면 그대들의 원수가 아닌가?”
“원수?”
카일의 말에 비터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 원수일 수도 있지만,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들에게 있어 우리 가문이 더한 원수일지도 모른다.”
“무슨 말이지?”
“우리 가문의 원류는 제국 남부의 기사 가문에서 시작된다. 당시 가주가 나에게는 고조부가 된다.”
제국의 남부는 왕국과 마찬가지로 오크랜드와 험준한 산악지가 주를 이루고 있어 가난한 소규모 영지가 난립해 있었다. 비터의 가문 역시 검술은 뛰어나지만 영지가 없는 기사 가문의 한계로 인해 평민과 다를 바 없는 힘들고 어려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남부 제일의 상단인 포슈 상단에서 우리 가문을 찾아왔다.”
“남부… 제일상단?”
“그렇다. 아일론 상단처럼 오크랜드에서 나오는 부산물을 수거해 판매하는 상단이다. 하지만 아일론 상단보다 몇 배는 큰 상단이라 할 수 있었다.”
카일은 비터의 말에 눈썹이 사납게 꿈틀거렸지만, 입을 꾹 다물고는 가만히 비터의 말을 들었다.
“포… 슈 상단이란 곳에서 왜 찾아온 거죠?”
“자신의 아들에게 검술을 전수해 달라고 했다더군요.”
“검술요?”
“그렇습니다. 가문의 검술을 알려주면 상단에서 적극적으로 가문을 지원해 주겠다고 약속을 했죠. 우리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기사 가문에게 검술이란 가문의 모든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어떻게 재물에 검술을….”
세인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사실 여기에는… 음모가 있었습니다.”
“음모라니요?”
“처음부터 가문에서는 검술을 가르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냥… 기초적인 검술만 몇 년 수련시킬 생각이었죠.”
“그건 거짓말이잖아요. 기사로서 어떻게…. 비겁해요.”
“네. 비겁한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가문은 어려웠고 검술은 내어줄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스스로 합리화를 시킨 거죠. 하지만 1년도 되지 않아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문제라니요?”
“검술을 배우러 온 상단주의 아들이 생각보다 재능이 뛰어났습니다. 아니, 단순히 재능이 뛰어난 정도가 아니라 천재라 할 수 있었습니다. 1년 동안 배운 기초 검술만으로 수년을 수련한 가문의 사람들을 이겨버렸으니 말입니다.”
“대… 단하군요.”
세인이 미소를 지으며 카일을 바라보았다.
“정말 대단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곧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1년 만에 가문의 사람을 이길 정도가 되었으니, 포슈 상단에서 약속대로 검술을 전수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온 겁니다. 포슈 상단에서는 약속대로 1년 동안 꾸준히 가문을 지원했으니 이제 약속을 지키라는 요구였죠.”
“당연한 요구예요. 그 정도면 기초수준은 이미 넘어섰다는 말이잖아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가문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절대 검술을 외부로 유출 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해서 다른 마음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다… 른 마음이라니요?”
“이참에 상단주와 아들을 인질로 잡고 상단을 집어삼키기로 한 거죠. 이미 1년 동안 풍요로운 생활을 한 가문의 사람들 입장에서는 포슈 상단을 포기할 수도 없었던 거죠.”
“어떻게 그런…!”
세인이 너무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카일 역시 말아쥔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지만, 마지막까지 이야기를 듣기 위해 아무 말 없이 비터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비터와 마크는 카일의 사나운 눈빛을 알지 못하고 묵묵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네…. 알고 있습니다. 비겁하고 비열한 짓이었다는 걸 말입니다. 그런데 계획을 실행하기 며칠 전…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니요?”
“당시 고조부님께는 따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분께서 당시 가문의 전반부 12식 검술이 기술된 양피지를 가지고 포슈 상단의 아들과 도주를 한 겁니다.”
“예에?!”
비터의 말에 세인이 깜짝 놀라 소리치고 말았다. 카일 역시 이번엔 진정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 비터를 바라보았다.
“너무 갑작스런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가문의 사람들 모두가 포슈 상단을 집어삼킬 생각에만 빠져 있다 보니 두 사람의 움직임을 알지 못했던 겁니다. 고조부님께서는 급히 가문의 사람을 모아 포슈 상단으로 향했지만 이미 늦은 후였습니다.”
“포슈 상단까지 모두 사라졌단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너무 다급했는지 대부분의 재물은 그대로 두고 떠나버렸습니다.”
“상단을 그대로 두고 떠났단 말인가요.”
“아닙니다. 상단은 이미 여기저기로 분산해 흩어 버렸고, 남은 건 본점에 남아있던 재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양이 워낙 많아 가문의 사람 대부분이 남아 수습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일부러 재물을 남겨두었군요. 추적을 피하기 위해.”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저 급하게 떠났다고만 생각해 버렸습니다. 때문에 검술이 뛰어난 자들만 따로 추려 다시 추적을 시작하려 했습니다.”
비터의 말이 끝나자마자 카일이 질문을 던졌다.
“검술을 되찾기 위해서 말이냐?”
“가문의 검술을 유출시킬 수 없었던 것도 있지만, 찾아야 할 사람도 있었으니까!”
“그래서 어떻게 되었지?”
“처음 추적을 시작할 때에는 곧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워낙 급하게 떠났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아니었다. 그건 착각에 불과했다.”
“착각? 무슨 말이지?”
“포슈 상단에 있던 막대한 재물! 그것이 문제였다.”
“…역으로 공격을 받았군.”
카일이 툭 던지듯 한 말에 비터와 마크가 고개를 들어 놀란 듯 카일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떻게 알았지?”
“나라면 그렇게 했을 테니까. 재물을 들고 도주를 해 보았자 짐만 될 뿐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재물로 추적을 늦추거나, 아니면 아예 추적을 막는 것이 최선이겠지!”
“용병을 대거 고용하는 편이 좋지 않나?”
“급하게 상단을 정리하고 도주하는 상황에서 기사를 상대할 정도의 용병을 구하기 쉬울까? 오히려 막대한 재물을 본 용병이 강도로 변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카일이 잠시 생각을 정리하듯 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나라면 재물을 그대로 두고 용병이나 낭인들을 상대로 소문을 낼 거다. 주인 없는 포슈 상단의 막대한 재물을 남부의 조그만 기사 가문이 차지해 곧 남부로 돌아갈 거라고 말이다.”
카일의 말에 비터와 마크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다. 추격을 다시 시작하려 할 때 사방에서 공격을 받았다. 수십 수백의 용병들과 낭인들이 나타나 무차별적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그들은 비겁하고 비열한 짓도 서슴지 않았고, 개중에는 용병이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자들도 있었다고 들었다.”
“아마도 인근에 있던 기사나 귀족 가문도 공격에 일부 참여했겠지. 주인 없는 재물이 갑자기 나타났으니 말이야.”
카일의 말대로 당시 남부에 있던 기사들도 신분을 숨기고 대거 포슈 상단의 재물을 노린 공격에 참여했다. 하지만 카일의 생각보다 훨씬 많은 숫자였다.
“그 일로 가문은 큰 피해를 입었다. 실력이 제법 뛰어나다 알려진 가문의 기사들이 대부분 죽었고 고조부님도 당시 큰 상처를 입었다.”
“흠…. 이해할 수 없군.”
“뭐가… 말이냐?”
“감당할 수 없는 적들이 나타났다면 재물을 포기하면 되는 것 아닌가? 어느 정도 실력을 보였다면, 재물의 일부만 포기해도 상당수가 추적을 포기했을 텐데?”
카일의 말대로 당시 협상을 제안한 용병들이나 용병단도 제법 많았다. 일부 재물을 양도해주면 안전하게 남부까지 호송해 주겠다는 약속이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당시 가주는 모든 제안을 일축하고 가문의 모든 힘을 이용해 재물을 지키려 했다. 걸어오는 싸움을 마다하지 않고 용감히 싸워 적들을 차례로 격파하며 남부로 행했다.”
“결국 재물은 지켜냈다는 말이군요.”
세인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습니다. 결국 재물은 지켰습니다. 그 재물을 이용해 우리 가문은 남부를 벗어나 당시 고조할머니의 고향인 풍요로운 동부로 이주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비터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리 작은 기사 가문이라도 한 가문 전체가 남부에서도 멀고 먼 동부까지 이주하려면 엄청난 재물이 필요했다. 더구나 고작 남부의 하급 기사 가문에 불과했건 비터의 가문이 고작 수십 년만에 남작 가문으로 성장했다면, 당시 포슈 상단에서 가져온 재물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요. 왜 용병이 전해준 검술을 익히려 하죠? 이미 가문의 검술이 있잖아요.”
수많은 용병들과 신분을 숨긴 기사를 상대로 온전히 재물을 지켜냈다면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비터의 가문이 가진 검술의 위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굳이 용병이 전해준 검술을 익히려 왕국까지 찾아왔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전반부의 검술 대부분이 실전되었기 때문입니다.”
“실전… 되다니요? 아무리 전반부가 기록된 검술서를 잃어버렸어도 이미 익히고 있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당시 실력이 뛰어난 가문의 기사들은 대부분 죽었습니다. 고조부님도 부상으로 얼마 뒤에 돌아가셔서 전반부 12식의 검식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결국 재물로 인해 가문의 검술을 잃었다는 말이군요.”
세인의 가시 같은 말이 심장을 헤집어 왔지만, 감히 반박할 수 없었다.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사실이니까요.”
“그럼… 어떻게 하일드란 사람을 만났지?”
“20년 전 어느 날, 동부 일대에 수배령이 내려졌다.”
“수배령?”
“6명의 첩자를 찾는 일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들 중 5명이 우리를 찾아왔다. 그리고 제안을 했다. 잃어버린 검술을 돌려주겠으니 동부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그 요청을 받아들였단 말인가?”
“우리로서는 검술의 복원은 숙명 같은 것이었다. 더구나 하일드는… 그는… 우리와 피를 나눈 혈족이라 할 수 있으니 거부할 이유도 없었다.”
“혈… 족이라.”
카일이 비터의 말에 잠시 눈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