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20년만의 만남2
“그만 일어나세요.”
이사벨라 공주의 말에 트라발트 공작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어렸다. 기사의 맹세 이후 레이디는 기사의 검을 받아 돌려주는 것이 기본적인 원칙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20년 만에 그를 거부했다.
“삼인의 약속을 잊었나요. 공작께서 스스로 영지를 떠나는 순간, 20년 전 그때 이사벨라 크라노스는 죽었어요. 그리고 이제 이 자리에는 이사벨라 스파더 남작만이 존재할 뿐이에요.”
이사벨라 공주, 아니, 이사벨라 남작이 오히려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정식으로 인사를 드려요. 스퍼더 가문의 이사벨라 남작이 영명하신 공작께 인사드려요.”
“아… 가씨!”
여기사가 깜짝 놀라 소리쳤고 무릎을 꿇고 있던 트라발트 공작도 당황한 얼굴로 공주를 바라보았다. 한 사람은 무릎을 꿇고 한 사람은 고개를 숙인 이상한 장면이 연출된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은 공작이었다. 아무리 그녀 스스로 부정을 한다고 해도, 그녀가 이사벨라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공작이라도 공주를 계속 고개를 숙인 채 세워둘 수는 없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 약조는 제가 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공작이 자조 섞인 얼굴로 공주, 이사벨라 남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언제… 작위를 물려받으신 겁니까?”
여인이 작위를 계승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간혹 대를 이을 자손이 없는 경우 여인이 작위를 계승 받은 후 자식에게 물려 주는 경우도 있지만, 이례적인 일인 것은 분명했다.
“10년 전 가주께서 돌아가셨어요. 이후에 곧 작위를 물려받았죠.”
“하지만… 왕실에서… 전하께서 허락하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아시잖아요. 전 20년 전 그의 도움으로 주인임을 증명했어요. 아무리 아바마마… 전하께서 거부하신다고 해도 스파더 가문의 가주께서 인정하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이사벨라의 말에 공작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황량한 들판을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곳은… 황량하군요.”
“그래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난 바라지 않았어요.”
“그리도 제가 싫었습니까?”
“이건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녜요.”
“헌데 왜 전 안되고 그놈은…!”
공작이 붉게 출혈 된 눈으로 공주를 바라보며 따지듯 물었다. 그러자 뒤에서 공작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던 여기사가 드디어 참지 못하고 외쳤다.
“흥! 뻔뻔함이 지나친 것 아닌가요? 당신은 이미 혼인을 해 아들까지 있었어요. 그런 당신을 공주님께서 좋아할 거라 생각한 건가요. 더군다나 당신은 공주님보다 열 살이나 많다고요.”
여기사의 말에 공작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지만, 감히 반박할 수 없었다.
여기사의 말대로 그는 당시 20대 후반이었고 공주는 10대 후반의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더구나 당시 공작은 일찍이 정략결혼을 통해 아들까지 있었다.
“물론 정략결혼을 통해 일찍 혼인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원한 혼인이 아니었다. 더구나 난 공작위를 물려받을 소영주였다. 내가 공주의 배필로 부족하다고 생각하나?”
트라발트 공작은 거리낌 없이 당당하게 말했다. 귀족가에서 어린 나이에 정략혼을 치르는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관습 같은 것이었다. 공작 역시 스스로 원해 이루어진 혼인이 아닌 가문 간에 이루어진 것이라 당시 소영주에 불과했던 그로서는 거부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공작은 귀족 중에서도 최고위 귀족 중 하나로, 비록 혼인을 했다지만 왕실의 허락만 받는다면 공주와의 혼인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공주께서 원하셨다면 공작부인의 자리는 얼마든지 내어드릴 수 있었다.”
공작의 냉정한 말에 여기사는 아무 말도 못하고 트라발트 공작을 노려볼 뿐이었다.
“공작께서 원하신 건 저 하나만이 아니지 않습니까?”
가만히 트라발트 공작의 말을 듣고 있던 이사벨라 공주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공작께선 저와의 결합으로 인해 얻게 될 지참금에 더 관심이 많았어요. 아닌가요?”
“그것이 잘못된 것입니까?”
트라발트 공작은 오히려 이사벨라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공작께서 만약 제가 가진 것들이 없었다면 과연 절 원하셨을까요? 아니, 절대 그런 일은 없었을 거예요. 아닌가요?”
트라발트 공작이 비록 중립파로 분류되고는 있지만, 왕실의 가장 위협적인 세력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겉으로는 왕실과 혼인이 이루어지면 공작가가 큰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왕실 입장에서야 공주와의 혼인을 통해 공작가의 후계 구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명분을 얻게 되지만, 공작가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고작 왕실과 혈연으로 묶였다는 단 하나의 명분뿐이었다. 그럴 바에야 영향력 있는 세력과 정략혼을 통해 권력을 공고히 하고 왕실을 압박해 권한을 더욱 확대하는 것이 더 큰 이득이라 할 수 있었다.
“만약이란 가정을 불필요한 것입니다. 이미 공주께서는 주인의 증명을 통해 자격을 얻으셨습니다. 제가 왜 만약을 생각해야 합니까?”
“휴…. 그댄 너무 강해요. 아니, 그대 가문이 너무 강하죠. 왕실이 과연 그대와의 혼인을 허락했을 것 같나요?”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공주의 선택만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제가, 이 트라발트 공작이 고작 하찮은 놈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20년 동안이나 영지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까지 담담하게 말을 이어오던 공작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언성이 높아졌다. 그 모습에 이사벨라 공주의 얼굴에는 오히려 미소가 어렸다.
“그대의 냉철함은 항상 그 사람 때문에 깨어지는군요.”
이사벨라의 말에 공작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결국 고개를 흔들며 앞에 놓인 하얀 찻잔을 신경질적으로 들어 마셨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말없이 고개를 숙여 습관적으로 찻잔의 부드러운 질감을 느끼며 마음을 안정시켰다.
“휴…. 20년이 지났지만 변한 게 없군요. 이런 소모적인 대화… 그만하고 싶습니다.”
“저 역시 지난 일은 더 이상 떠올리고 싶지 않네요.”
“좋습니다. 삼인의 맹세… 제가 졌습니다. 인정하겠습니다. 더 이상 공주도… 그도 억압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절 도와주십시오.”
공작의 말에 공주는 그동안 가슴속에 막혀 있던 무언가가 사라지고 있는걸 느낄 수 있었다.
“후우~.”
공주가 막혀 있던 무언가를 밖으로 내뱉듯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어 밝게 웃으며 말했다. 20년 동안 가슴속 깊이 감추고 있던 해맑은 미소였다.
“좋아요. 어떻게 도와 드리면 되나요.”
“이번 공격으로 공작가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20년 동안 영지에 머물며 쌓아온 모든 것을 잃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복수를 원하시나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먼저 이번 일에 관여한 자들을 먼저 잡아야겠지요.”
“공작께서는… 이번 일을 통해 정식으로 정계 진출을 선언하실 생각이군요.”
어두워진 공주의 표정을 보면서도 공작은 담담히 말했다.
“20년 동안 이루었던 모든 재력을 잃었습니다. 이젠 공주까지 포기했으니 제게 남은 것은 가문뿐입니다. 그러니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권력을 손에 쥐어야겠습니다.”
“하지만 한가지 알아두세요. 왕실에 위협이 된다면….”
“걱정 마십시오. 전 왕실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공주와도 더 이상 싸울 생각이 없습니다.”
공작의 말에 이사벨라 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의 말을 믿겠어요.”
“감사합니다. 그럼 그만 돌아가겠습니다. 급히 달려오느라 영지를 수습하지 못했습니다.”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리 나가지 못함을 용서하세요.”
공주가 먼저 귀족의 예법에 따라 정중히 예를 취했다.
“아닙니다.”
공작 역시 고개를 숙인 뒤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던 공주는, 공작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한숨을 내뱉었다.
“휴~ 끝났네요.”
“축하드려요. 아가씨 드디어 자유를 찾으셨어요.”
“고마워요. 하지만 기뻐하기는 일러요. 그동안 잠자고 있던 드래곤의 족쇄가 풀렸으니 왕국…아니, 대륙에 큰 혼란이 불어닥칠 거예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더구나 공작의 영지가 공격당한 것은 아가씨의 잘못이 아니잖아요.”
“알고 있어요. 그저 공작이 약속을 지키길 바랄 뿐이에요.”
“그럼 바로 출발하실 건가요?”
여기사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준비되는 데로 출발하도록 해요.”
“시종장님께 바로 말씀드릴게요!”
여기사가 신이 난 얼굴로 달려 나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사벨라가 천천히 테라스로 걸어가 하얀 찻잔을 들어 물끄러미 바라보다 미소를 지었다.
“이제… 곧 만나겠구나.”
* * *
비어버린 찻잔을 아쉬운 듯 바라보던 이엘이 고개를 들어 멍하니 시안느와 세인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카일의 지도에 따라 혼원장을 수련하고 있었다.
“휴…. 심심해.”
이엘이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지만 그렇다고 딱히 수련을 방해할 생각은 없었다. 더구나 요즘 카일과 세인은 늦은 시간까지 숲에서 수련하고 있었다. 때문에 시안느가 카일에게 조언을 구하거나 대련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지금뿐이라 더욱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심심하세요?”
“어? 언제 왔어요. 두 사람의 자세를 봐줘야 하는 거 아녜요?”
“두 분은 이미 자세가 안정되었습니다. 그러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요?”
카일의 말에 이엘이 두 사람을 힐끔 바라보았다. 카일의 말대로 제법 안정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 번 해보시겠습니까?”
“네?”
“혼원장은 오러를 수련하지 않아도 건강에 도움이 됩니다.”
“저도 익힐 수 있다는 말인가요?”
이엘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물론입니다. 누구나 익힐 수 있습니다. 배워보시겠습니까?”
“좋아요. 대신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부탁… 말입니까?”
“네!”
이엘이 눈을 빛내며 카일을 바라보았다.
“흠…. 어려운 부탁이 아니라면….”
“절대 어려운 부탁이 아니에요.”
“그렇다면… 좋습니다.”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혼원장이라는 수련법을 가르쳐주고 거기에 부탁까지 들어줘야 하지만 카일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세요.”
“…네?”
카일이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검술을 가르치는 일은 절대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아주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그건….”
“아! 오해하셨군요. 전 그냥 기초적인 검술을 배우고 싶다는 말이에요. 듣기로는 기초검술은 용병검술이나 기사들의 정통검술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고 들었어요.”
“그야… 검을 잡는 법이나 검을 다루는 법을 알려주는 것이니 어렵지는 않습니다만…. 왜 검술을 배우려 하십니까?”
“그냥… 한번 배워보고 싶었어요.”
이엘이 카일의 표정을 살피며 솔직히 답했다. 어차피 그녀로서도 딱히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저 배우고 싶었다라….”
카일이 잠시 고민을 하더니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마침 생각난 게 있으니 가르쳐드리죠. 대신 혼원장을 20분 이상 수련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기초라지만 전 대충 가르칠 생각은 없으니 말입니다.”
“좋아요. 열심히 할 테니까 지켜봐 주세요.”
이엘이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따라오세요.”
카일의 말에 이엘이 신이 나는 표정으로 황급히 카일의 뒤를 따랐다.
“일단 두 사람을 봐서 알겠지만, 동작은 어렵지 않습니다. 일단 두 다리를 어깨 넓이로 벌리고 무릎을 구부린 채 손을 들어 올립니다.”
카일이 직접 시범을 보이며 동작을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했다.
“기억할 수 있겠습니까?”
“네. 모두 기억했어요.”
“좋습니다. 그럼 해보십시오.”
카일의 말에 이엘이 어색하게 혼원장의 동작을 따라 했다.
“어…. 잘하시네요? 혹시 따로 수련을 따라 하신 적이 있습니까?”
“아니요. 그냥 두 사람이 수련하는 모습을 본 것 뿐이에요.”
“그런가요? 눈이 좋으시네요.”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어색한 자세를 바로잡아주었다.
“그런데 눈이 좋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얼마 전 시안느도 같은 말을 했어요.”
이엘의 물음에 카일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