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20년만의 만남1
“대답은 그때 와서 듣는 게 좋겠군요.”
카일의 말에 비터는 결국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어차피 비터나 마크는 카일의 말에 따를 수밖에는 없었다.
“곧… 찾아가겠다.”
카일이 비터를 흘깃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지나쳐 일행에게로 향했다.
카일이 도착했을 때도 시안느는 떠날 때의 자세 그대로 스튜를 젓고 있었다. 마치 검술을 수련하듯 잔뜩 긴장한 얼굴에는 비장감마저 느껴졌다.
그 모습에 카일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으며 시안느에게 다가갔다.
“이제 그만 저으셔도 됩니다.”
카일의 말에도 시안느는 여전히 스튜를 보며 신중하게 젓고 있었다. 그만큼 온정신을 스튜 젓기에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다 못한 카일이 시안느의 손을 잡았다.
“아!”
그때서야 카일이 돌아온 걸 안 시안느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스튜가 타지 않았어요. 보세요.”
마치 칭찬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시안느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카일을 보며 말했다.
“네, 잘하셨습니다.”
카일의 말에 시안느가 아이처럼 기뻐했다.
“정말… 잘했나요? 바닥에 눌어붙지 않았나요.”
“네. 정말 잘하셨습니다. 오늘은 시안느 경 덕분에 쉽게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카일은 웃으며 숲에서 가져온 야생 허브를 마지막으로 스튜에 넣었다. 그리고는 가방에서 꺼낸 옹기그릇에 스튜를 가득 담아 상단에서 얻어온 딱딱한 보리빵과 함께 나누어 주었다. 따로 마차에 있는 멀린에게도 가져다주었다.
“역시 카일이에요. 분명 비슷한 재료를 쓴 것 같은데 어떻게 이렇게 맛이 확연히 다르죠.”
이엘이 상단 쪽을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상단 쪽에서도 음식이 완성되었는지 용병들과 일꾼들이 음식을 받기 위해 몰려들고 있었다.
“불의 세기나 볶는 방법, 물의 양에 따라 같은 재료로도 맛이 달라집니다.”
“같은 재료로 만들어도 사람에 따라 맛이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군요.”
“네, 더구나 상단에서는 대량을 만들다 보니 세심하게 불을 조절하고 물의 양을 맞추기 힘들어 맛이 떨어질 수밖에는 없습니다.”
카일의 말에 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술과 같다는 말이군요.”
“검술과 음식을 만드는 법이 같다는 말인가요?”
세인의 말에 시안느가 관심을 보였다. 앞서가는 자의 말은 작은 것 하나까지 경지를 올리는 단서가 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검술에 대한 이야기라 더욱 관심이 갈 수밖에는 없었다.
“같은 검술, 같은 연공법을 똑같은 시기에 익혀도 그 사람의 체질이나 능력에 따라 경지는 달아지잖아요.”
세인의 대답에 시안느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카일을 바라보았다.
“카일도 세인 경과 같은 생각인가요. 검술을 익히는 것도 요리를 만드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나요?”
“…고대어 중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만류귀종, 모든 흐름은 하나로 통일된다는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요리를 만드는 것과 검술을 익히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같겠죠.”
“만류귀… 종.”
카일의 말에 세인과 시안느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비록 처음 듣는 어려운 단어였지만 어쩐지 큰 뜻이 담겨 있는 듯했다.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긴 두 사람을 보며 카일이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휴….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검술을 익히든 요리를 익히든 익히는 과정이나 흐름에 결국 세상의 이치가 담기게 되죠. 어떤 부분에서는 비슷하거나 오히려 뛰어난 가르침이 숨어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카일 님은 그런 경험이 있나요. 사소한 가르침 안에서 무언가 얻은 경험 말이에요.”
세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런 질문은 상대의 수련 과정을 묻는 것과 같아서 쉽게 물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카일은 세인의 물음에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렸을 적 대장장이 기술을 배우며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야장 기술을 배우며 검술을 깨달았단 말인가요?”
시안느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망치를 정확한 힘과 세기로 내려칠 수 있는 세밀함, 망치를 내려칠 때 일어나는 반동을 극복하고 더 나아가 이용할 수 있는 부드러움까지…. 일상에서 발견한 사소함에서 많은 것을 얻었죠.”
카일의 말에 시안느의 얼굴이 다소 가라앉았다. 그동안 사소하게만 생각해 왔던 일들을 등한시한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그런 사소한 것들에서 깨달음을 얻은 카일에 대한 감탄이 이어졌다.
“카일 님이라 가능한 거잖아요.”
“네?”
“조금 전 말했듯, 음식도 만드는 사람에 따라 맛이 다른 것처럼 일상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사람도 카일처럼 특별한 사람이어야겠죠.”
이엘이 심각한 얼굴로 굳은 시안느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시안느도 어느새 굳어있던 얼굴을 풀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네요. 그런 건 카일이라 가능한 거예요. 저처럼 평범한 사람은 아무리 야장 기술을 배운다고 해도 깨닫지 못할 거예요.”
시안느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카일이 아니었다.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검술을 쉬지 않고 수련해 지금의 경지를 이룩한 것이다. 그러니 야장기술을 아무리 배운다고 해도 카일처럼 깨달음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카일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엘의 한마디에 결국 스스로가 대단한 사람이라며 자화자찬을 하게 된 것이다.
* * *
얼어붙은 황량한 동토의 대지, 화려한 마차가 뿌연 황톳빛 먼지를 일으키며 거침없이 앞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음….”
작은 유리창 밖으로 끝없이 펼쳐진 황량하고 얼어붙은 대지를 바라보는 공작의 입에서 낮은 신음성과 함께 침통한 빛이 어렸다.
그저 지금껏 말로만 들어왔었다. 그저 황량하고 척박한 대지라고 들었지만 애써 외면했었다. 아니, 척박하고 황량할수록 그녀 스스로 그곳을 벗어날 거라 생각했다.
그런 생각으로 보낸 시간이 무려 20년.
무려 20년 동안이나 이런 황량한 곳에 삼인의 약속이란 족쇄로 그녀를 가두어 두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화려하고 아름다운 영지에서 풍요한 생활만을 영위하던 그가 먼저 영지를 벗어나 그녀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황폐화된 영지를 두고 볼 수 없어, 지금까지 누린 모든 영화를 그대로 지켜내기 위해서 말이다.
“성이… 보입니다. 영주님!”
총관의 음성에 침통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있던 공작이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화강석으로 쌓아올린 낡은 성벽이 보였다. 순백의 색이었어야 할 오래된 성벽은 검은 이끼로 뒤덮여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공작 각하.”
트라발트 공작이 마차를 벗어나자 미리 나와 있던 시종장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이… 이런! 이게 무슨 짓이요.”
시종장의 마중에 총관이 붉게 물든 얼굴로 나서며 소리쳤다. 왕국의 유일한 소드마스터이자 유일한 공작이 직접 이 척박하고 외로운 남작성까지 왔다. 그런데도 영주는커녕 작위도 없는 시종장이 공작을 맞이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서지 마라!”
“영주님! 하지만 이는 우리 공작가를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당장…!”
“나서지 말라 명했다.”
공작의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 당장이라도 총관의 목을 잘라버릴 듯한 모습이었다.
“이런! 총관께서 몸이 안 좋으신 것 같습니다. 제가 부축해 드릴 테니 천천히 들어가 쉬시지요.”
시종장이 급히 총관의 팔을 잡았다. 순간 창백하게 굳어가던 총관의 얼굴이 원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그댄 누군가?”
무심한 듯 말을 했지만 지금 공작은 크게 놀라고 있었다. 총관을 압박하는 자신의 기운을 가볍게 밀어냈기 때문이다. 무려 소드마스터의 기운을 말이다.
그러니 공작으로서는 시종장에게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는 없었다.
“공작 각하께서는 절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그 말에 공작이 이마를 좁히며 자세히 시종장을 살피기 시작했다.
나이는 지긋이 들었지만 시종장이라 보기엔 다소 크고 단단한 체구, 새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카락과 수염, 그리고 얼굴 위로 길게 새겨진 검상까지….
“자네가… 어… 떻게…? 그때 분명 죽었는데…!”
공작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죽었어야 했던 사람이 살아있으니 그로서도 놀랄 수밖에는 없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덕분에 많은 것을 얻었지요. 하하”
시종장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 들어가시지요. 아가씨께서 기다리십니다.”
“…아가씨!”
공작의 얼굴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흘러나와 시종장을 압박했지만, 시종장은 그저 평온한 얼굴로 공작을 마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잊지 않으셨다면, 아가씨께서 스퍼더 가문의 주인임을 부정하지는 않으시겠지요.”
시종장의 얼굴에 잠시 붉은 기운이 떠올랐다. 사악하고 거친 기운이지만 또한 강렬해 공작을 놀라게 했다. 결코 자신과 비교해 떨어지지 않는 기운이었다. 분명 오러는 아니지만 오러만큼 강렬한 기운이었다.
“음…. 부정하지… 않는다.”
결국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스런 대답을 들은 시종장 역시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총관은 여기서 기다리게! 곧 출발할 테니.”
겨우 정신을 차린 총관이 힘겹게 대답했다.
“예.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총관을 뒤로하고 성안으로 들어가자, 싸늘한 외부와는 달리 제법 훈훈한 기운이 감돌았다. 하지만 내부를 전혀 장식하지 않아 돌벽의 질감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 차갑고 외로운 분위기가 짙었다.
“이쪽으로….”
시종장이 내부를 둘러보는 공작을 무시하듯 한 발짝 앞서며 말했다. 시종장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자, 천정까지 뚫려있는 중정들로부터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내부는 밝아졌지만, 공작의 찌푸려진 얼굴은 변함이 없었다.
“여기에 아가씨께서 계십니다. 들어가시지요.”
-키이익-
낡은 경첩의 거친 소리와 함께 붉은 칠이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문이 천천히 열렸다.
공작이 떨어지지 않는 발을 내딛어 한걸음 안으로 들어가자, 테라스에 앉아 차를 마시는 금발의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뚜벅뚜벅-
자신도 모르게 테라스로 공작이 다가갔다.
“멈춰라!”
순간 금발의 여인 뒤에서 공작을 경계하던 여기사가 급히 검집을 들어 공작의 앞을 막으며 소리쳤다.
그때서야 걸음을 멈춘 공작의 눈썹이 잠시 꿈틀거렸지만 이내 표정을 지우고 테라스에 앉은 여인을 바라보았다.
“물러나요.”
“하지만 아가씨!”
“물러나요. 그가 마음을 먹는다면 우린 제지할 수 없어요.”
“하지만 시종장님이 계시잖아요. 그분이라면 가능할 거예요.”
“장담할 수 없는 일에 그분을 희생시킬 수는 없는 일이죠. 그리고 공작은 무력을 쓰려고 찾아온 게 아니랍니다. 그렇지 않나요.”
여인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미소를 잠시 넋을 잃은 듯 바라보던 공작이 결국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여기사가 날카롭게 공작을 노려보더니 천천히 물러나 여인의 뒤에 시립했다.
“오랜만이군요. 웨일스 경”
여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공작이 잠시 머뭇거리다 결국 무릎을 꿇었다.
“웨일스 드 트라발트가 이사벨라 크로노스 공주께 인사를 올립니다. 이 검과 생명을 그대에게 마이 레이디.”
트라발트 공작이 검을 두 손으로 받쳐 눈앞에 앉아 있는 이사벨라 공주에게 바쳤다. 이는 평생 보호를 약속한 여인에게 보이는 기사의 맹세였다.
트라발트 공작은 20년 만에 다시 공주의 앞에 무릎을 꿇고 검을 바쳤다.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공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