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오러의 변화3
-웅웅웅-
검안으로 오러가 밀려들어 가자, 가볍게 울음을 토한 검에서 검푸른 기운이 피어올랐다. 마치 깊고 어두운 호수처럼 진하고 선명했다.
“오러의… 색이 바꿨어요.”
오러의 색은 그 사람의 성격과 체질, 그리고 마나 연공검이나 검술의 영향에 따라 조금씩 차이를 보이지만, 대부분 밝은 빛을 띄는게 일반적이었다. 카일의 오러 역시 밝은 백색에 가까운 푸른 빛을 띄고 있었지만, 마기의 영향으로 검푸른 빛의 오러로 바뀐 것이다.
“마기에 영향을 받았지만. 걱정할 만한 부분은 없었습니다. 몸에도 전혀 무리가 없지요.”
“하지만 오러의 색이 갑자기 바뀌었는데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이미 카일은 흑기사와의 대결에서 자신의 유형화된 오러를 보였기에 바뀐 오러의 색을 본다면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흑기사와의 대결 이후 오러의 색이 바뀌었으니 의심하는 사람이 있겠죠.”
카일이 세인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에서 환도를 뽑았다.
그리고 신중히 오러를 밀어 넣었다.
그러자 깜짝 놀랄만한 일이 벌어졌다. 환도에서 카일이 지녔던 원래의 청백색 오러가 피어올랐기 때문이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죠. 한 몸에 서도 다른 성질의 오러가 공존하다니….”
세인이 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하지만 카일은 담담한 표정으로 도검을 감싼 서로 다른 오러를 감상했다. 백색에 가까운 오러와 검은빛에 가까운 오러가 마치 서로를 견제하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몸 안으로 침투한 마기는 카일의 오러와 융합되었다가 어느 순간 둘로 나뉘었다. 그리고는 마치 오랜 친구처럼 서로를 끌어당기며 둥근 공처럼 뭉쳐 아랫배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부턴 의식하지 않아도 끊임없이 회전하며 공존하고 있었다.
“색과 성질은 달라도 모두 통제가 가능한 오러입니다.”
카일의 검에 피어올랐던 검푸른 오러가 정화되듯 청백색의 오러로 천천히 바뀌기 시작했다. 반대로 환도에 어렸던 청백색의 오러가 마치 맑은 물에 검은 잉크 한 방울을 떨어트린 듯 검푸른 오러로 서서히 변화되었다.
“대… 단해요.”
세인은 두 가지 오러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카일의 모습을 보며 연신 탄성을 터트렸다.
“별로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오러를 꾸준히 수련하다 보면 가능한 일이죠.”
카일이 검과 도에 밀어 넣었던 오러를 갈무리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직 새롭게 얻게 된 오러의 특성을 알지 못합니다. 제일 좋은 방법은 시간을 두고 연구를 해보는 것이겠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대련을 통해 알아보려는 겁니다.”
“이미 말씀드렸잖아요. 도와드린다고, 그렇게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셔도 돼요.”
세인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로서는 둘만의 비밀을 만들어가는 지금 상황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더군다나 지금의 대련은 일방적으로 카일에게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세인 역시도 대련을 통해 자신의 약점을 미리 파악할 수 있었고 또 카일의 조언도 들을 수 있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수련이라 할 수 있었다.
“좋습니다. 그럼 다시 시작할까요.”
“이번엔 정말 최선을 다할 거예요. 카일 님도 조심하셔야 할거예요.”
“얼마든지!”
카일의 검에서 검푸른 오러가 치솟았다.
* * *
-또각또각-
순백색으로 칠한 후 멋스럽게 황금빛으로 테를 두르고, 붉은색으로 화려함을 더한 마차를 잡티 하나 없는 8마리의 백마가 이끌고 북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마차는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았다.
“어찌 된 것이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은 마차 안에서 중후하면서도 맑은 트라발트 공작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것이, 영지 내에 오랫동안 암약하던 세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있었던 것 같다? 그럼 지금은 없다는 말인가?”
“아… 직 알 수 없습니다. 송… 구합니다.”
검은 잿가루로 지저분하게 엉켜있는 총관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계속!”
“아… 예. 이번 공격에 가담한 자들은 상인에서부터 병사와 평민, 대장장이, 창녀 그리고 시녀나 시종에 이르기까지 남녀는 물론 나이까지 다양… 했습니다.”
총관이 조심스럽게 공작의 심기를 살폈다. 눈을 감고 담담하게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의 눈썹은 위로 잔뜩 치켜 올라가 있었다.
오랫동안 공작을 모셔온 만큼 총관은 공작이 겨우 분노를 억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계속!”
공작의 목소리가 한층 올라가자 총관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이번 공격에 가담한 자들이 암약한 기간은 길게는 30년에서 짧게는 고작 몇 달도 되지 않은 자들까지 다양했습니다.”
“……30년?”
공작도 이번엔 놀랐는지, 이마 위로 굵은 주름이 잡힌 채 감았던 눈을 뜨고 총관을 바라보았다.
“근거는?”
“이번 일에 노프 백인장도 가담했습니다.”
“노프가…!”
공작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노프 백인장이 가담했을 거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확실한… 정보인가?”
“가장 먼저 폭발이 일어난 강 남쪽에 자리 잡은 무기고가 바로 노프 백인장이 책임지고 있던 곳입니다. 그가 무기고로 들어간 이후 폭발이 일어났고 이를 신호로 다른 곳에서도 연쇄적으로 폭발이 일어난 이상 그도 관여된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됩니다.”
총관이 조심스럽게 서류 한 장을 꺼내 공작에게 내밀었다. 마지막으로 노프를 본 병사의 증언과 함께 그가 배신자인 이유가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한동안 서류를 살핀 공작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수십 년 동안이나 영지가 적들의 손에 놀아나고 있었다는 말이군.”
“송구할 따름입니다.”
“휴…. 이미 당한 일이니 더는 책임을 물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남아 있는 첩자들은 반드시 색출하게! 더 이상 어제와 같은 피해는 용납할 수 없어!”
“명… 심하겠습니다. 각하!”
총관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공작이 다시 눈을 감으려 하자, 총관이 급히 물었다.
“한 가지 여쭤도 될런지요.”
“어딜 가는지 알고 싶은가?”
“송구… 합니다. 소신이 비록 따라나서긴 했지만, 지금은 영지에 남아 피해를 수습하는 것이 먼저라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아무런 호위도 없이 움직이다 적들에게 기습이라도 받는다면….”
“걱정할 것 없다. 아무리 적들이라도 영지가 공격받은 상황에서 공작인 내가 20년 만에 영지를 벗어날 거라 생각하지는 못할 것이다.”
트라발트 공작이 눈썹을 치켜뜨자 공작의 몸에서 싸늘한 한기가 스산하게 뿜어져 나와 마차 안을 짓눌렀다.
“아니, 설령 공격을 받는다고 해도 그들 역시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았을 테니 오는 족족 모두 내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럼… 이번 외출의 의미가 적들을 끌어내기 위한….”
총관이 차마 ‘미끼’라는 단어를 내뱉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공작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번 외출은… 20년 동안 묶여있던 족쇄를 풀러 가는 것이네! 수 대에 걸쳐 지키고 가꿔온 영지가 파괴되었으니 더 이상 내 욕심으로 영지에 묶여있을 순 없는 노릇이니 말이야.”
최대한 감정을 억제하듯 덤덤하게 말을 이었지만, 강인한 초인의 눈빛에는 슬픔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분의 족쇄도 풀어드려야겠지.”
트라발트 공작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눈을 감아 버렸다.
* * *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브린이 조심스럽게 코퍼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벌써 이틀째 상단은 움직이지 않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동안 부상자를 치료하고 죽은 자를 땅에 묻었다. 하지만 코퍼 용병대의 모든 관심은 카일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자신들의 음모가 모두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카일이 중급 엑스퍼트라는 사실이 밝혀진 이상 카일이 어떻게 행동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아시겠지만 벌써 이틀이나 지났습니다.”
“그래서 어쩌자고, 분명히 말해두겠는데 일이 이렇게 복잡하게 된 건 너 때문이야!”
버크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브린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브린은 아예 버크를 무시하듯 코퍼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버크와 맞섰다가는 괜히 싸움질이나 할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았다.
“이… 익!”
하지만 버크는 코퍼의 태도에 더 화가 나는지 주먹을 말아 쥐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앉아!”
“하지만 대장!”
“지금 우리끼리 싸워봐야 아무것도 해결되는 게 없다. 아니, 오히려 일만 복잡해질 뿐이다.”
코퍼의 단호한 말에 버크가 마지못해 앉았다.
“차라리 먼저 용서를 비는 것이 어떨까요.”
“용서?”
“비록 나쁜 마음을 먹긴 했지만, 우리로 인해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느 정도 보상을 하고 용서를 빌면 넘어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다친 사람이 없어도 배신이다. 카일은 그냥 넘어갈 수 있을지 몰라도 아일론 상단은 가만있지 않을 거다.”
야투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단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사실 그가 가장 화난 부분은 카일에 대한 문제가 아니었다. 아일론 상단과 오랫동안 이어온 신뢰를 깼다는 데 있었다.
야투의 말에 코퍼을 비롯한 단원들은 야투의 시선을 피했다. 그들로서는 야투 몰래 일을 벌인 이상 그의 불만에 토를 달 수 없었다.
“휴…. 저 녀석들만 아니었다면 그때 해결할 수 있었는데….”
브린이 야투의 시선을 피하며 바위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처음 카일이 쓰러졌을 때는 코퍼 용병대에서는 차라리 먼저 카일을 공격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당시 카일은 물론 시안느와 워드까지 정신을 잃었고 세인 역시 부상을 당한 터라 기습을 가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상황에서는 코퍼로서도 모험을 걸어볼 만한 일이었다. 사방에 변종 오크와 용병들의 시신이 늘어져 있는 이상 상단과 카일 일행만 처리한다면 이곳 상황을 적당히 조작해 용병 길드의 시선을 피해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만 해도 충분히 해볼 만한 일이라 생각했다.
어차피 카일이 깨어난다면 자신들은 죽음 목숨이니, 그나마 가능성이 높은 확률에 모험을 걸어 보려 했다.
하지만 이런 코퍼의 생각은 단 한 사람으로 인해 무너지고 말았다. 바로 비터였다. 갑자기 비터가 코퍼 용병대와 카일 일행의 사이에 자리를 잡아 버린 것이다. 카일 일행을 보호하겠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인 것이다.
“녀석!”
비터 역시 카일과 좋지 않은 관계라 할 수 있어, 코퍼는 비터를 가장 큰 우군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비터가 한순간 돌변해 카일을 보호하려 하자 난감한 상황에 빠져 버린 것이다. 더군다나 비터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옆에는 마크라는 그림자가 항상 따라붙었기에 코퍼 용병대로서도 카일에게 쉽게 다가설 수 없었다. 그들이 카일 일행을 제압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기습뿐이었다. 일순간 모든 힘을 집중해 마티슨과 토일, 그리고 카일 일행을 제압해야 승산이 있었다. 그러나 비터와 마크가 앞을 막아선다면 그때부터는 전면전이었다. 실력이야 코퍼 용병대가 앞서고 있어도 상단 일꾼들의 숫자가 월등히 많았다. 무엇보다 그들 대부분이 강력한 석궁으로 무장하고 있으니 잘해봐야 양쪽 다 치명적인 상처만 남을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만 지체하고 있을 때 멀린 마법사가 돌아와 버렸다.
순식간에 시안느와 워드의 상처를 치료하더니 카일을 자신의 마차로 데려가 버리면서 코퍼로서는 손도 써보지 못하고 카일을 빼앗기고 만 것이다.
아무리 코퍼라도 4서클 마법사로 알려진 멀린을 상대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시안느와 워드까지 깨어난 이상 처분을 기다릴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카일이 깨어난 지 만 하루가 지났지만, 카일은 여전히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저 세인과 함께 숲속으로 사라졌다가 저녁 무렵에야 돌아왔다. 그리고는 코퍼를 보고도 여전히 무심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었다. 코퍼 용병대로서는 이렇게 카일의 처분만을 기다리며 흘러가는 시간 자체가 고역일 수밖에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