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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용병라이더-129화 (129/404)

129.약속의 대가2

“헉헉-.”

검을 지팡이 삼아 일어선 노인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닥에 녹색의 피 웅덩이가 생겨났을 정도로 수많은 오크가 죽어있었다. 밤새 노인이 죽인 오크들이었다.

“대단하시구려!”

보일이 진정 감탄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까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오크를 죽인 사람은 보일도 처음 보았다. 물론 상급 엑스퍼트가 혼자 이 많은 오크를 상대할 일도 드물 것이다.

“네 녀석….”

노인은 아직도 힘이 남았는지 보일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보일은 전혀 관심도 없는지 어깨에 걸치고 있던 총을 꺼내어 탄환을 장전했다.

“넌… 처음부터 나와 대결할 생각이 없었구나….”

“당신 역시 처음부터 정정당당하게 대결할 생각이 없었지 않소.”

“크크크. 그래 그렇지, 암살자의 정정당당함이란 처음부터 비겁함이지.”

검을 집고 있던 노인의 몸이 그 자리에서 퍽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보일의 몸의 쓰러지듯 뒤로 넘어가며 들고 있던 총이 허공으로 향했다.

-탕

허공으로 비산하는 총탄 위로 노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마치 빠르게 날아가는 총탄을 향해 갑자기 몸을 던진 것처럼 보였다.

“크악!”

노인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쿨럭.”

거칠게 피를 토해낸 노인은 핏발 선 눈으로 보일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알았지?”

“밤새 노인장이 움직이는 모습을 관찰했지. 덕분에 나도 얻은 게 제법 됩니다.”

보일이 흙을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하… 하하!”

노인이 갑자기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처음 보일과 대결을 펼치려 했던 이유는 경지를 넘을 작은 단서나마 찾기 위해서였다. 그는 오랫동안 수많은 살인을 통해 경지를 넘었고, 그중에는 강자들과의 생사를 건 싸움도 있었다. 물론 마지막에는 아티팩트를 사용해 기습적으로 상대를 죽였지만 그만큼 많은 것을 얻었다. 그런데 이젠 바로 자신이 그들처럼 보일에게 깨달음을 주고 죽어가게 된 것이다.

“…부탁이 있네.”

노인이 체념한 듯 힘겹게 일어나 보일을 보며 말했다.

“말씀하시죠.”

“마지막은 자네의 검에 죽고 싶네. 들어 주겠나?”

노인이 손에 들린 장검을 보일에게 던지며 말했다.

“그래도 마지막은 암살자가 아닌 검사로서, 검사의 손에 죽고 싶네.”

노인의 목소리엔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잠시 노인의 두 눈을 바라보던 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뽑아 들었다.

“고통은 없을 거요.”

검을 높이 들어 올린 보일이 노인의 목을 향해 검을 내려그었다. 아니, 그어 내리려는 순간 머리 위에서 날카로운 기운이 엄습해 들어왔다.

‘암습!’

암습이란 단어가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순간, 보일의 몸이 반사적으로 바닥을 굴렀다. 그와 동시에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노인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리고는 조금 전 보일이 몸을 피한 바로 그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크억~.”

“컥!”

두 개의 짧은 신음성이 울렸다.

“네놈이! 네놈이 왜 여기에… 있느냐!”

노인이 심장에 박혀있는 칼빈의 검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이미 칼빈의 검은 심장을 관통해 등 뒤로 삐죽 솟아있었다.

“…쿨럭…. 노인장… 이야말로 왜 거기서 갑자기 나타나는 거요.”

칼빈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피를 토하며 외쳤다. 어젯밤 겨우 오크 무리를 피한 칼빈은 노인에게 다가서는 보일을 발견하고는 급히 블루우드 나무로 올라 암습을 가한 것이다. 노인 역시 삶의 마지막에서는 검사로서의 죽음 대신 어쌔신으로서 마지막까지 암습으로 살아남는 길을 택했지만 결국 그도 암살자의 손에 죽음을 맞게 된 것이다.

“내가… 네놈 같은 암살자에게 죽다니.”

노인이 칼빈을 살기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며 단검을 쥔 손에 힘을 주려 했지만 결국 힘없이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젠… 장!”

칼빈이 험악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쓰러진 노인을 노려보았다. 이번 작전의 실패는 온전히 노인의 승부욕 때문이었다.

“어쌔신이 정정당당한 대결이라니!”

칼빈이 배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억지로 막아내며 쓰러져 있는 노인을 걷어찼다. 분노가 가득 담긴 그의 발길질이 이어질수록 노인의 모습은 참혹하게 변해 갔다.

“그쯤이면 화가 풀렸을 것 같은데? 그만하는 게 어떤가?”

한쪽에서 무심한 듯 칼빈의 행동을 바라보고 있던 보일의 목소리에, 분노가 쌓여있던 칼빈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당황스러움이 역력히 남아 있었다.

노인에 대한 분노로 인해 보일을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나… 나를 어, 어떻게 할 생각이지?”

“글쎄? 아무래도 노인장의 길동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일말의 감정도 담기지 않은 싸늘한 보일의 말에 칼빈의 얼굴이 더욱더 창백하게 식어갔다.

노인에 대한 분노를 해소하느라 너무 많은 피를 흘렸을 뿐 아니라 적을 눈앞에 두고 방심한 체 화풀이나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 날 살려 보내준다면 다시는 이곳으로 오지 않겠소.”

“누군가를 믿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더군.”

보일이 처참한 몰골로 변해 버린 노인을 응시하며 말했다.

“반드시 약속은 지키겠소. 살려주시오.”

칼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는 기사도 아니고 용병도 아닌 그저 어쌔신일 뿐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적이라도 얼마든지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할 수 있었다. 일단 살아만 남는다면 복수는 얼마든지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흠….”

보일이 잠시 망설였다. 그 모습에 칼빈은 급히 품 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날 살려주면 이걸 주겠소!”

“골드로 회유할 생각인가? 하지만 난 이미 가진 것만으로도 충분하네만? 더군다나 지금 자넬 죽여도 그 안에 든 것은 내 것이나 마찬가지 같은데?”

보일의 말대로 아무리 많은 골드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죽으면 모두 보일의 차지였다. 그러니 굳이 칼빈의 청을 들어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칼빈을 죽여 후환을 없애는 게 보일에게는 더 이로운 일이었다.

“우선, 이건 그런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귀한 것이오.”

칼빈이 잠시 아쉬운 듯 가죽 주머니를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비록 아깝기는 하지만 일단 살아남는 것이 중요했다.

보일 역시 칼빈의 말에 관심이 가는지 자연스럽게 주머니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만약을 대비해 경계를 늦추지 않고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그런 보일의 모습에도 칼빈은 아무 말 없이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걸 주겠소”

칼빈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커다란 붉은 루비가 박힌 목걸이였다. 다만 특이한 건 붉은 루비 부분만 기하학적인 문양이 새겨진 커다란 수정으로 감싸여 있다는 사실이었다.

“흠? 특이한 목걸이로 보이긴 하지만 굳이 욕심이 나지는 않는데?”

“크크, 그럴 거요. 이런 물건은 귀족들도 쉽게 볼 수가 없으니 아는 사람이 적을 수밖에 없지요.”

칼빈이 낮게 웃음을 흘리다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상처를 건드렸는지 배에서 아릿한 통증이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이건 와이번이 봉인된 목걸이요. 주로 블랙마킷에서 거래되는 방식으로 이건 그중에서도 가장 구하기 힘든 레드 와이번이요. 5년 만에 처음으로 나온 물건이지.”

“레… 드 와이번!”

칼빈의 말에 보일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와이번이 블랙마킷에서 거래된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눈앞의 붉은 루비에 레드 와이번이 봉인되어 있다는 사실이 더욱 놀라웠다.

“지금껏 와이번이 거래되고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일반인은 모르지요. 아니 설령 귀족들이라도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애초에 와이번은 천문학적인 자금이 없이는 거래가 불가능하니까요.”

“하지만 넌 어쌔신이 아닌가?”

보일은 칼빈을 노려보며 물었다. 노인처럼 혹 또다시 자신을 속이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설령 눈앞의 목걸이가 와이번이라 해도 비밀스럽게 거래되는 와이번, 그중에서도 몇 년 만에 처음 나타났다는 레드 와이번이 봉인된 목걸이란 말을 그대로 믿을 순 없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와이번을 매입하기 위해서는 천문학적인 자금이 들어갈 것이다.

“그렇습니다. 전 귀족이 아니죠. 하지만 우리 검은 여우는 암살만 하는 단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암살보다는 정보수집을 목적으로 하죠.”

“그럼… 그 와이번은….”

“탈취한 겁니다. 바로 며칠 전에 말입니다.”

칼빈이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번 임무만 끝이 나면 손에 들려있는 레드 와이번은 자신의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럼 더 이상 어쌔신이 아니라 레드 와이번의 오너로서 작위와 함께 부와 명예를 거머쥘 거라 그는 부푼 기대감에 쌓여 있었다.

그런데 노인의 치기 어린 생각으로 말미암아 이젠 부와 명예는커녕 생명과도 같은 레드 와이번이 봉인된 목걸이까지 내어놓게 된 것이다.

“흠….”

보일이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만약 어쌔신의 말이 맞다면 보일도 욕심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칼빈을 살려두면 분명 뒤탈이 남을 것이다.

“아까 말했듯이, 지금 당장 널 죽이고 목걸이를 취할 수도 있다.”

“이 봉인은 아무나 해체할 수 없습니다. 오직 저만이 풀어낼 수 있습니다.”

칼빈이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봉인 목걸이를 탈취하며 비밀을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이 죽었다. 그중에는 이번 일에 가담했던 검은 여우들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다.

“좋다. 널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하겠다.”

“아니, 저에게 어떠한 위해도 가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칼빈은 보일을 바라보며 당당하게 외쳤다. 이미 마음이 기운 이상 확실한 다짐을 받아 놔야 했다.

“날… 못 믿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죽이지 않는다고 약속한 후에도 얼마든지 위해를 가할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 상황에서는 작은 상처라도 치명적이죠.”

칼빈의 말에 인상을 팍 찡그린 보일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약속하겠다. 자네의 신체에 절대 위해를 가하지 않겠다.”

보일이 고개를 끄덕이자 칼빈이 안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내가 약속을 어길 수도 있는데?”

“약속을 어길 생각이라면 고민 같은 것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아니, 처음부터 절 살려준다고 약속하셨겠지요.”

“흠…. 보기보다 머리가 좋군.”

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한 이상 보일은 반드시 약속을 지킬 생각이었다.

“자, 이제 자네도 약속을 지켜야 하지 않겠나?”

“물론입니다.”

칼빈이 아쉬운 듯 목걸이를 바라보다. 보일에게 내밀었다.

“봉인을 해제하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손에 봉인 목걸이를 올리고 일정하게 오러를 주입하면 됩니다.”

칼빈의 말에 보일이 날카롭게 그를 노려보았다.

“그저 오러만 주입하면 된단 말이냐? 더구나 일정한 오러라면 어느 정도의 오러를 말하는 것이지?”

사람마다 오러의 특성도 조금씩 다를 뿐 아니라 ‘일정한’이란 기준도 모호할 뿐이었다.

보일의 말에 칼빈이 급히 목걸이가 들어있던 주머니에서 작은 양피지 종이를 꺼냈다.

“이 봉인구에 오러를 주입하면 봉인구의 색이 변합니다. 모두 7가지 색으로 변하는데, 마법사마다 각양각색으로 패턴을 만들어 놓아 정확한 패턴을 알지 못하면 봉인구를 풀 수 없습니다.”

칼빈이 조심스럽게 양피지를 내밀며 말했다.

양피지에는 모두 네 가지 색상이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의 색이 변할 때마다 정해진 시간대에 오러를 주입해야 하는 복잡한 과정이 쓰여 있었다. 오러의 색뿐만 아니라 언제 어느 때 오러를 주입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아야만 봉인을 해제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참고로 말씀을 드린다면 봉인된 와이번들은 아직 정식으로 주인을 찾지 않은 와이번으로, 이미 시간이 상당히 지난 상황이라 봉인이 해제되는 순간 주인을 찾지 못하면 자연으로 회귀해 버립니다. 그러니 반드시 아무도 없는 곳에서 와이번과 마주해야만 계약을 맺을 수 있습니다.”

칼빈이 친절하게 설명까지 곁들이며 최대한 보일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보일은 칼빈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을 찾지 못하면 자연으로 회귀하는 와이번의 특성을 이용해 최후의 순간 목걸이의 구매자가 와이번과 계약을 맺을 수 있게 만들어 거래하는 모양이었다.

보일은 칼빈의 설명을 들으며 주머니 속에 봉인된 목걸이를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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