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약속의 대가1
해가 서산으로 서서히 저물어 세상이 주홍빛으로 물들어갔다. 허나 나무가 빽빽한 숲속은 이미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들어 있었다.
“합류한 인원은?”
“저희 6조와 조금 전 합류한 8조를 포함, 2개 조 6명입니다.”
처음 이곳에 온 25명 중 남은 인원은 칼빈과 노인을 포함해 8명이 전부였다. 나머지는 여기저기 흩어져버린 탓에 생사를 확인할 수 없었다.
이전처럼 피리를 불어 생존자를 확인할 수도 있으나, 오히려 위치만 드러날 뿐이라 섣불리 신호를 보낼 수 없었다.
“처음부터 실수였어. 단번에 기습으로 놈을 죽였어야 했는데….”
칼빈이 캄캄함에 잠겨 든 나무 사이를 노려보며 말을 짓씹었다. 애당초 어쌔신이 암살이 아닌 정정당당한 정면 대결을 원한다는 것부터가 말이 되질 않았다.
“경계는?”
“사방으로 퍼져 주변을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습니다. 놈이 다가온다면 곧장 알아챌 수 있을 겁니다.”
칼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에 모인 검은 여우는 물론, 쉐도우들까지 정면 대결보다는 암살을 전문적으로 익힌 요원들이었다.
비록 기습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긴 했지만, 어둠이 내려앉았으니 이제 이곳은 암살자에게 있어 최고의 전장이 되었다 할 수 있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이곳을 벗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말이지. 설마 겁을 먹은 것인가?”
칼빈이 날카롭게 8조장을 노려보았다. 비록 얼굴은 가면으로 가려져 있었으나, 예기를 품은 눈동자는 8조장의 영혼까지 꿰뚫어 볼 정도로 스산했다.
“아닙니다. 다만 녀석이 과연 이곳으로 올 것인지 의문이 들었을 뿐입니다.”
“으음….”
8조장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칼빈은 얕은 침음성을 흘렸다. 기습을 강행해 많은 요원을 죽였다 해도 쉐도우 노인과 직접 검을 맞댄 이상, 보일이란 자 역시 자신이 불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결국 직접 검을 맞대기보다는 우군을 불러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 하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이곳에는 그가 지휘하는 수백의 자경대들이 경계하고 있는 곳이었다.
“우린 놈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
칼빈은 복잡한 속내를 내색하지 않고 딱딱하게 굳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도 이곳을 빠져나가 다음을 기약하는 것이 옳다고 느꼈지만, 어둠 속에서 엄청난 살기를 뿜어내는 노인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노인의 지시를 따르라는 상부의 명을 들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놈이 이곳의 지형에 유리하다고는 하나 어둠은 우리의 친구다. 어둠 속이라면 분명 우리가 녀석보다 유리하다. 그리고… 놈은 분명 올 것이다.”
칼빈의 말은 옳았다. 분명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선 그들이 훨씬 유리한 입장임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허나 보일이란 자가 불리함 속에서도 공격을 감행하리라 장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칼빈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알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어둠이 그들의 친구라면, 어둠이 삶의 일부인 존재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크르륵.”
칼빈은 눈치채지 못했으나, 이미 그들은 포위된 지 오래였다. 오래전 진득한 피비린내를 맡은 놈들은 점차 숫자를 불려,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물론 놈들이 그냥 이곳이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 그들을 이곳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곳곳에 미끼를 던져 놓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직 놈들이 덤벼들지 못하고 넓게 포위만 하고 있는 이유는, 먹잇감의 중심에서 퍼져나가는 강력한 살기로 탓이었다. 때문에 섣불리 덤벼들지 못하고 사냥감들이 방심하길 기다리고 있던 거였다.
“흠… 생각보다 방비가 철저한가 보군.”
블루 우드의 가지 위에 올라타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보일이 피 묻은 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보일은 어둠이 내려앉기 전, 몬스터를 사냥해 살점을 잘라 미끼로 뿌려 놓았다. 오크는 몬스터답게 후각이 제법 발달한 놈이라, 피 냄새를 맡으면 곧장 달려올 거란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면 곤란한데….”
보일이 아직도 공격을 하지 않고 주변을 포위하고 있는 오크 때를 보며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이미 블루 우드 위에는 오크와 어쌔신의 싸움을 구경하기 위해 쉴 수 있는 자리와 간단하게 먹을 육포와 술까지 꺼내 놓았다.
“어쩔 수 없지 싸움을 하지 않으면 싸움을 붙이는 수밖에.”
자리를 털고 일어난 보일은 곧장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툭
조그마한 발소리가 울리고 보일은 바닥에 착지했다. 내려온 그는 바로 자세를 낮춘 후 허리에서 단검을 뽑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바닥을 기어가듯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표물은 어쌔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오크 중 한 마리였다.
오크의 등 뒤로 접근한 보일은 어느 정도 사이가 가까워지자 순식간에 일어나, 오크의 목을 잡고 단검을 박아 넣었다.
푸욱
“크르륵.”
뒷목으로 파고든 단검은 목젖까지 튀어나왔다. 성대가 뚫린 오크는 피거품을 토해내며 몸을 떨었다.
오크의 목에서 단검을 뽑은 보일은 다시 심장에 검을 찔러 넣었다.
일견 잔인해 보이는 광경이었으나 보일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보일은 오크의 시체를 끌고 가며 조심스럽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삐익-
허나 신중을 기하며 움직인다 해도 보일은 어쌔신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어둠까지 내려 앉아있는 조용한 숲속에서 오크를 죽이며 일어난 작은 소음을 놓칠 검은 여우들이 아니었다.
곧장 검은 여우 하나가 피리를 불곤 검을 뽑아 보일에게 덤벼들었다.
쉬익 쉭
암살의 검답게 일격필살이 담긴 위력적인 찌르기 공격이었다. 물론 보일에게는 어렵지 않게 피할 수 있는 공격이기도 했다. 하지만 보일은 피하는 대신, 끌고 온 오크를 그대로 검은 여우를 향해 던졌다.
퍼억
대뜸 날아든 정체불명의 물체에 검은 여우는 피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검을 찔러 넣었다.
푹-
검은 오크를 관통했지만 검은 여우는 오크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시체와 함께 바닥을 뒹굴었다. 그 사이 보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발을 굴러 신속하게 뒤로 물러났다.
샤아악
보일이 있던 자리 위로 섬광 같은 푸른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언제 나타났는지 노인이 맹렬한 살기를 뿌리며 보일이 있던 자리에 나타나 있었다.
“이제야 나타났구나!”
노인이 보일을 보며 소리쳤다. 하지만 보일은 노인을 보지도 않고 그대로 뒤로 몸을 날렸다.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노인의 몸이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보일의 머리 위로 모습을 드러내며 검을 휘둘렀다.
위잉
푸른 기운에 휩싸인 노인의 장검이 자신의 머리를 노리고 쇄도해오자, 보일이 깜짝 놀라 황급히 몸을 굴려 떨어지는 검을 피해 달아났다.
“이놈! 언제까지 도망칠 생각이냐.”
노인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보일의 뒤를 쫓았다.
* * *
“사방에서 포위해야 한다. 서둘러라!”
칼빈은 갑자기 들려온 피리 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와 함께 주변에 포진하고 있던 검은 여우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소란한 틈을 타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오크들도 주변으로 퍼져나간 혈향에 취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크르륵… 취익.”
막 몸을 날린 검은 여우의 앞으로 오크 한 마리가 뛰어올라 클럽을 휘둘렀다.
“이런!”
짧은 경호성을 내뱉은 검은 여우는 날렵하게 클럽을 피하며 오크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었다.
푹-
검이 심장을 뚫자 오크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검은 여우가 오크의 몸에서 검을 뽑아 들고 다시 몸을 날리려 했지만, 또다시 클럽이 머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검은 여우는 몸을 회전시켜 클럽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뒤로 물러난 순간 또 다른 클럽이 몸 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뭐야.”
당황을 숨기지 못한 검은 여우는 검을 휘둘러 클럽을 막아내며 공격해 오는 오크의 목을 쳐냈다.
하지만 또 다른 클럽이 어깨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검으로 막으면 더 많은 클럽에 몸 위로 떨어져 내렸고, 오크를 죽이면 죽일수록 더 많은 오크들이 나타나 그의 앞을 막아섰다.
이미 그의 주변은 수많은 오크들로 완벽하게 포위되어 있었던 것이다.
비단 오크에게 포위된 것은 그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방으로 몸을 날린 검은 여우 대부분이 수많은 오크들에게 둘러싸여 공격을 받고 있었다. 더군다나 검은 여우들은 사방에서 보일을 포위하기 위해 1~2명이 흩어져 움직이다 보니, 오히려 오크들에게 각개격파를 당하는 상황이었다.
“이놈이!”
보일은 노인이 쫓아오자 곧장 오크 무리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손에 잡히는 오크들을 노인을 향해 집어 던졌다.
샥 사악
보일이 던진 오크가 자신을 향해 날아오자 노인은 그대로 오크를 베어 넘겼다. 오크를 피할 수는 있지만, 그랬다가는 보일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탓에 노인의 몸은 오크의 피로 뒤범벅이 되어있었다.
“저리 꺼져라.”
노인이 혈향에 취해 달려드는 오크 베어 넘기며 보일에게 다가가려 할수록, 더 많은 오크들이 나타나 그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 많은 오크의 시체가 노인의 주변에 쌓였고, 그럴수록 더 많은 오크들이 혈향을 따라 노인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헉헉, 큰일 날 뻔했군.”
보일이 뒤를 돌아보며 거친 숨을 토해냈다. 노인이 갑작스럽게 나타나 휘두르는 오러 블레이드는, 정말 가슴이 섬뜩할 정도로 위력적인 공격이었다. 만약 도주가 조금만 늦었어도 목이 잘렸을 것이다. 만약 마지막 순간에 오크 무리로 뛰어들지 않았다면 노인을 피하지 못했을 거였다.
오크로 주변이 포위된 이상 노인도 아티팩트를 섣불리 사용할 수 없었다. 블링크 마법을 펼치는 순간, 나타난 곳에 또 다른 물체나 생명체가 있다면 공간의 중복현상으로 노인의 신체가 갈가리 찢겨나갈 수도 있었다.
때문에 오크가 저렇게 밀집되어 몰려있는 곳에서는 블링크 마법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블링크 마법은 고 서클의 마법인 만큼 사용횟수에 제한이 있었다. 최상급의 마나석을 사용한 만큼 10번 정도 사용할 수 있지만, 오늘 하루 동안 벌써 5번 이상이나 블링크 마법을 사용한 이상 남발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노인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힘으로 오크 무리를 돌파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네놈들을 모두 죽여 버리겠다.”
끊임없이 몰려드는 오크 때에 살심이 폭발한 노인이 고함을 지르며 무차별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노인의 검은 최소한의 힘으로 최단 거리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죽일 수 있는 살검이었다.
노인의 검이 움직일 때마다 오크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그러나 그 자리는 그보다 더 많은 오크들이 몰려들어 노인을 공격했다.
“이… 놈들!”
얼마나 죽였는지 노인의 주변으로 수많은 오크의 시체들이 늘어져 있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오크들이 아직도 몰려들고 있었다.
“크아아!”
노인은 비명 같은 괴성을 지르며 더욱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벌써 두 번이나 허공으로 블링크 마법 사용해 오크를 피하려 했지만, 너무 많은 오크들로 인해 번번이 포위당하고 만 것이다.
노인은 그동안 한 가지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이곳은 오크 랜드와 인접해있는 만큼 오크들이 많을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많은 오크들이 밀집해 있을 것이라 상상도 못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