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124화 (124/404)

124.변종오크2

“닮은 것 같아요.”

뜬금없는 이엘의 말에 시안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세인 경의 검술 말이에요. 제가 검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지난번 보았던 카일의 검술과 닮은 것 같아요.”

이엘은 샤론 마을에 있는 동안 카일과 시안느의 대련을 수도 없이 보아왔다. 시안느의 방패술을 다듬어주기 위한 훈련이었으나, 그때마다 이엘은 두 사람을 가까이서 지켜보았기에 대략적인 느낌만은 알 수 있었다. 귀족가의 영애인 이엘은 거친 기사의 검술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나마 가장 많이 본 검술이 카일과 시안느의 것이라, 세인의 검술에서 비슷한 점을 쉽게 찾을 수 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시안느도 세인의 검술을 보며 어딘가 모를 익숙함을 느끼고 있었다. 다만 지금까지 많은 검술을 경험해온 탓에 쉬이 떠올리지 못한 것이다.

“세인의 검술에서 세밀함과 유연함을 뺀다면 정말 비슷하군요. 오히려 변칙적인 부분은 카일의 검술보다 뛰어나고요.”

시안느는 세인의 검술을 인정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세인의 검술이 카일의 것과 닮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카일의 조언으로 몰티엔가의 검술을 새롭게 변형시킨 것을 넘어, 그를 동경하며 따라 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었다.

“카일의 검술은 섬세하면서도 매끄럽고 무엇보다 빨라요.”

“그런가요? 하지만 대련할 때마다 시안느는 항상 카일의 강한 힘 때문에 고전했잖아요.”

시안느가 새삼스러운 눈초리로 이엘을 바라보았다.

“눈이 정말 좋으시군요. 그런 말은 한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어찌 아셨어요.”

“네? 그냥… 그런 느낌이 들어서요.”

뻘쭘한 미소를 지은 이엘이 말했다.

어쩌면 이엘 역시 검술에 재능이 있을지도 몰랐다. 검을 익히는데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눈이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녀는 검을 쥐기엔 몸집도 작고 연약해, 드센 기사들의 검술과는 맞지 않았다. 하지만….

시안느가 세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엘보단 크지만, 그녀도 여느 여기사보단 작고 마른 체형이었다. 기사들의 강인하고 투박한 검술과는 맞지 않았다.

“아가씨 말이 맞아요. 하지만 제가 고전했던 건 단지 카일의 힘 때문만이 아니에요. 카일의 검술은 타고난 힘을 기반에 두지 않거든요.”

시안느는 당장이라도 싸움에 끼어들고 싶은 것처럼 방패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카일의 검술은 자연스러움을 추구해요. 그래서인지 거칠지 않죠. 억지를 쓰지 않아도 검식에 강한 힘이 녹아들어 있어요.”

“그렇다면 세인의 검 역시 자연스러움을 추구하고 있나 보군요.”

“맞아요. 하지만 그녀에게도 넘지 못할 벽이 있어요.”

“저렇게 강한데도요?”

이엘이 변종 오크들 사이를 종횡무진 뛰어다니고 있는 세인을 보며 물었다.

“그녀는 여인이에요. 선천적으로 남자보다 힘이 약하죠. 어쩌면 저보다도 힘이 약할지 몰라요. 그래서 다른 방법을 찾은 것 같아요. 더 정밀하고, 더 변칙적이며, 여기에 여성 특유의 유연함과 꼼꼼함을 가미한 거죠.”

“그녀가 카일처럼 새로운 검식을 만들었다는 말인가요.”

“그런 건 아니고, 지금까지 익히고 있던 검식의 속성을 바꾼 것 같습니다. 하지만 덕분에 그녀만의 특별한 검술이 탄생한 것이죠.”

시안느는 세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며 말했다.

세인의 검술은 변종 오크에겐 치명적이었다. 일반적인 오크보다 큰 덩치에 커다란 베틀 엑스를 든 변종 오크는, 강했지만 그만큼 움직임이 둔중했다. 그 탓에 빠르게 접근해 정확하게 가장 약한 빈틈을 찾아 검을 꽂아 넣는 세인을 쉽게 당해 내지 못하고 있었다.

“시안느도 어서 가세요.”

시안느의 낯빛 위로 떠 오른 망설임을 발견한 이엘이 그녀를 재촉했다.

“하지만 전 아가씨를 지켜야 합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전 여기에 있을 거예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요.”

이엘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이엘이 있는 곳은 상단의 가장 뒤에 위치한 곳이었다. 상단일꾼들과 토일이 분주히 움직이며 수레를 이용해 방벽을 만들고, 일부는 석궁으로 용병들을 지원하고 있었다.

“여긴 부 단주님과 지부장님도 계시니 안전할 거예요. 그러니 염려 말고 어서 가세요.”

한참을 머뭇거리던 시안느는 결연히 말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가볼게요.”

시안느는 등에 메고 있던 방패를 끌렀다.

방패와 중검의 차가운 기운이 손바닥으로 전해지자, 파도치는 바다처럼 술렁이던 불안감이 서서히 사라지고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아가씨 금방 갔다 오겠습니다.”

“다녀오세요.”

꾸벅 인사한 시안느는 앞으로 달려나갔다.

* * *

코퍼는 세 번째 오크를 상대하고 있었다. 그는 처음과 달리 버거운 기류를 숨기지 못했다. 오러가 모두 소모되면서 깊은 무기력증과 함께 찾아온 위기였다.

꽈광

오크가 휘두르는 베틀 엑스를 한번 막을 때마다 코퍼는 서너 걸음씩 밀려났다. 겨우겨우 공격을 막아내곤 있으나, 언제 또 고비가 올지 모를 일이었다.

꽝-

또 한 번 머리를 노리고 달려드는 베틀 엑스를 쳐낸 코퍼는, 충격을 해소하지 못하고 입과 코에서 붉은 피를 토해냈다. 휘청이던 그는 무릎을 꿇었다.

“취익, 죽어라!”

붉게 충혈된 눈과 비릿한 웃음을 머금은 오크가 베틀 엑스를 높게 치켜들었다.

코퍼는 반항하지 않고 체념한 듯 눈을 감았다.

그에게는 더 이상 베틀 엑스를 막아낼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아…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코퍼는 처량한 웃음을 지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운석검을 가질 생각에 들떠있던 그였지만, 오늘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꽈-앙

그러나 코퍼에게 찾아온 것은 죽음의 고통이 아니라, 고막이 먹먹한 충격음과 오크의 괴성이었다.

“크와아악!”

코퍼가 살며시 눈을 뜨자 낯익은 여인이 작은 방패와 중검을 들고 앞을 막아선 것이 보였다.

자신을 공격하던 오크는 바닥에 쓰러져 몸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여인, 시안느는 코퍼를 힐끔거린 뒤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무릎과 몸의 반동으로 땅을 박차 높이 뛰어오른 시안느는, 쓰러진 용병을 향해 베틀 엑스를 힘차게 내리치려던 오크에게로 날아갔다. 갑자기 나타난 커다란 물체에 오크는 본능적으로 머리 위로 치켜든 베틀 엑스로 시안느의 방패를 힘껏 후려갈겼다.

콰아앙

조금 전 울렸던 폭음이 다시 한번 크게 울렸다. 오크는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바닥에 착지한 시안느는 활짝 열린 오크의 품 안으로 낮고 빠르게 파고들어, 오크의 턱을 노리고 검을 찔러 넣었다.

“크륵, 큭, 크르륵.”

턱에서 시작한 중검은 오크의 정수리 부근에 비죽 솟아올라 있었다.

단번에 오크의 턱을 관통한 검이 두개골까지 뚫고 튀어나온 것이다.

오크의 턱뼈나 머리뼈는 베틀 해머로 내리쳐야 겨우 박살이 날 정도로 단단한 곳이었다. 저렇게 쉽게 검이 관통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엑스퍼트!”

성대를 쥐어짠 코퍼는 단어를 내뱉었다.

두개골을 부숴버린 시안느의 검에는 분명 은은한 오러가 선명하게 어려 있었다. 색의 농도로 보아 초급 엑스퍼트인 것 같지만, 오러를 다루는 능력은 이미 중급에 올랐다 해도 과언이 아닐 수준이었다.

샤악

진득한 진초록 피를 털어낸 시안느는 새로운 오크를 향해 뛰어들었다.

시안느의 검술은 신속하고 간결했으며 강력했다.

아무리 근력을 강화했어도 무거운 베틀 엑스를 든 오크가 시안느의 속도를 당해 낼 수는 없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급소를 찔러 넣는 시안느의 검술은, 세인의 검술과 마찬가지로 굼뜬 오크에게 있어 상극이었다.

“화려한 등장이군요.”

어느새 시안느의 곁에 다가온 세인이 쾌활히 말했다.

“제 검술보다는 세인 경의 검술이 더 다채롭지 않나요?”

시안느가 세인을 스쳐 지나가며 대꾸했다. 그리고는 세인을 쫓아 달려오는 오크를 향해 마주 달려갔다.

후웅

시안느는 오크가 내두른 베틀 엑스를 태클을 걸듯이 피하곤 검을 휘둘렀다.

샤아악

시안느의 검이 오크의 허벅지를 반 이상 갈랐다. 중심을 잃은 오크가 비틀거렸다. 시안느는 곧장 몸을 돌려 뛰어올라 오크의 뒷목에 검을 박아 넣었다.

“크르륵.”

오크는 바닥에 고꾸라졌다. 시안느는 부르르 몸을 떠는 오크에게서 검을 뽑았다. 그사이 세인은 시안느의 뒤를 노리던 오크의 심장에서 검을 뽑아내고 있었다.

파들거리던 오크는 절명했다. 세인이 검에 묻은 피를 닦으며 시안느에게 말을 걸었다.

“검술과 방패의 조합은 처음 봐요. 나중에 대련을 부탁해도 될까요.”

“저 역시 세인 경과 대련을 하고 싶었습니다.”

시안느가 도전적인 눈빛으로 세인을 바라보았다.

세인이 중급 엑스퍼트를 목전에 두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시안느는 그녀와 한번 겨뤄보고 싶다는 욕망에 쌓여 있었다.

더군다나 그녀의 검술인 최근 힐튼 남작의 도움으로 완전히 변해 있었다. 카일과 여러 번 대련을 해 보긴 했지만, 그의 실력이 한참 앞에 있기에 스스로의 검술이 어느 정도 인지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보다 한두 수 정도 앞서고 있는 세인과 맞선다면, 자신의 실력을 보다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을 터였다.

“좋아요. 그럼 먼저 내기를 해 보는 것이 어떻겠어요?”

“그래요. 마침 적당한 상대도 널려 있는 것 같은데.”

흔쾌히 동조한 세인은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오크들을 향해 눈짓했다.

“지는 사람이 소원하나 들어주는 겁니다.”

시안느가 말이 끝나자마자 오크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뒤를 세인이 질 수 없다는 양 뒤쫓았다.

* * *

두 명의 용병이 오크 한 마리를 힘겹게 상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크는 괴력을 과시하며 종횡무진 베틀 엑스를 휘둘러 두 사람을 압박했다.

워낙 강력한 힘이 실려 있어 그들은 차마 베틀 엑스를 막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이리저리 몸을 피할 뿐이었다.

후욱-

공기를 가르는 베틀 엑스의 섬뜩한 소리에 마크는 당장 도망을 치고 싶었다. 허나 언제 어디서 또다시 습격을 받을지 몰라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오크가 나타난 거야.”

공격을 피하는 것도 벅차 비터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으나, 그의 눈빛은 오기로 가득 차 있었다. 아직 포기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지금 그런 것 따질 때야? 빨리 피해!”

비터의 머리통을 노리고 쇄도하는 베틀 엑스에 놀란 마크가 꽥 소리 질렀다.

“젠장, 오크 놈이 왜 이렇게 강한 거야.”

비터는 바닥을 굴러 간신히 공격을 피했지만, 오크는 베틀 엑스를 가볍게 회전시키더니 곧장 비터의 목숨을 노렸다.

“으헉!”

피하지 못하리라는 걸 직감한 비터는 눈을 찔끔 감아버렸다.

‘아, 여기서 죽는구나! 아직 할 일이 남았는데….’

스가악

둔탁한 충격음과 함께 죽음을 기다리던 비터의 얼굴 위로 뜨거운 액체가 왈칵 쏟아져 내렸다.

비터는 허겁지겁 손을 들어 눈가를 닦았다. 부연 그의 시야 사이로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검이 보였다.

일격에 죽어버린 오크도, 덕분에 목숨을 구한 비터도, 비터를 구하기 위해 몸을 날리려던 마크도, 누가 오크를 죽였는지 아무도 몰랐다.

“으헉. 유… 령이다.”

비터는 마크의 당황스러운 말에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흙바닥에는 몸을 잃은 오크의 머리통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자신이 죽었는지도 모르는 오크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기분 나쁘게 웃고 있었다. 비터는 얼빠진 음성으로 혼잣말을 했다.

“이게…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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