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변종오크1
상단의 선두에서 평온한 척 말을 몰고 있었지만, 지금 코퍼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비록 검에 욕심이 들어 일을 벌이긴 했으나, 오랫동안 관계를 이어온 아일론 상단과의 신뢰를 저버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지금이라도 달려가 브린을 말리고 싶어진 것이다.
“대장. 카일 일행이 뒤에서 다가오고 있습니다.”
야투는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이번 일에 대해 야투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뒷골목 출신이긴 해도, 그는 의리에 목숨을 거는 사람이었다. 만약 이번 계획을 알게 된다면 가장 격렬하게 반대할 사람이라, 코퍼는 야투에게 어떤 것도 말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코퍼가 짐짓 모른 척하며 물었다.
“글쎄요. 제가 가서 알아보겠습니다.”
야투는 코퍼의 대답도 듣기 전, 벌써 신이 나는지 후다닥 뒤로 달려갔다. 이번 기회에 아름다운 세 여인에게 말이라도 붙여 보려는 것이다.
그러나 얼마 후 야투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헐레벌떡 코퍼에게 되돌아왔다.
“대장! 몬스터가 쫓아온답니다.”
코퍼는 작은 한숨과 함께 질끈 눈을 감았다. 결국 일이 터지고 만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하지만 이어진 야투의 말엔 더 경악할만한 소식이 담겨 있었다. 코퍼는 휘청이는 상체를 간신히 바로 세웠다.
“그런데 카일은 뒤에 남았다고 합니다.”
“지금 뭐라고….”
“카일이 뒤에 남았다고요.”
“그놈을 어떻게 혼자 막는다고!”
코퍼는 대뜸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여기서 카일이 죽으면 정말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만다. 심지어 아일론 상단과 문제가 벌어질 수 있었다.
“뒤에서 나타난 몬스터가 뭔지 아십니까?”
게슴츠레 눈을 뜬 야투가 물었다. 마치 코퍼가 뒤에서 오는 몬스터의 정체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니다. 일단 내가 가서 카일을 데려오겠다.”
“그것이… 앞쪽에도 몬스터가 있으니, 미리 대비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합니다.”
“앞쪽이라니?”
코퍼가 황당한 표정으로 야투를 바라보았다. 뒤에서 쫓아오던 카일 일행들이 어떻게 선두에 나타날 몬스터를 미리 알 수 있단 말인가?
“이곳은 베링 산맥 근처다. 몬스터가 나타….”
말을 하던 코퍼는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 후미에 몬스터가 등장한 상황에서 베링 산맥이라고 하여 몬스터가 나올 일이 없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아니 그러니까….”
코퍼가 무어라 변명을 늘어놓으려는 데, 야투가 신음처럼 웅얼거렸다.
“몬스터… 오크가 나타났다.”
야투의 중얼거림에 코퍼는 고개를 홱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정말 오크가 숲에서 나와 상단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이건 계획에 없었단 말이다.”
코퍼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얼떨결에 소리치고 말았다.
“대장. 계획이라니요?”
야투가 코퍼를 사납게 쏘아봤다. 뒤에서 나타난 몬스터의 정체를 짐작하는 것 하며, 조금 전 내뱉은 계획이란 단어만 들어도, 코퍼와 앞서 떠난 세 단원들이 모종의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야투가 지금 용병으로 떠돌고 있는 이유는 바로 배신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그는 믿음을 중요시했고 배신을 경멸했다.
야투의 다그침에 번쩍 정신을 차린 코퍼가 야투의 눈길을 피하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어서 용병들이나 통솔해!”
코퍼는 자리를 피하려는 것처럼 말의 머리를 후미로 돌렸다.
용병들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나타난 오크들에 당황한 듯 잠시 주춤거렸지만, 모두 경험 많은 용병들이라 이내 전열을 정비하곤 검을 뽑아 들었다.
“방진! 방진을 만들어라!”
갑작스런 상황에 잠시 당황했던 코퍼는 곧 침착하게 용병들을 통솔하며 지시를 내렸다.
“무, 무슨 일입니까?”
뜬금없는 소란에 토일이 마차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안에 들어가십시오. 오크들입니다.”
간단하게 상황을 설명한 코퍼는 다시 용병들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그럴 리가…. 여긴 오크가 나올 곳이 아닌데….”
이마를 짚은 토일이 코퍼가 달려간 곳을 응시했다. 코퍼의 말대로 오크들이 상단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게다가 질서 정연하게 오는 것도 모자라, 손에는 거대한 베틀 엑스까지 쥐어져 있었다.
‘잠깐만. 질서 정연하게 베틀 엑스를 들고?’
오크가 병사처럼 오와 열을 맞춰 달려올 리 없었다. 오크는 지성이 있긴 하지만 야성이 강해, 병사들처럼 병진을 만들거나 체계적으로 병력을 운용하지는 못했다. 만약 오크들이 군대를 만들 수 있었다면, 대륙은 벌써 오크들의 세상으로 변해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오크들은 오와 열을 맞춰 한 몸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당황스럽기는 토일보다는 직접 오크를 상대해야 하는 코퍼와 용병들이 더 심했다.
“저, 저 녀석들 뭐야? 훈련받은 병사처럼 움직이잖아!”
“덩치도 일반 오크보다 훨씬 큰 것 같은데.”
“손에 금속제 배틀 엑스를 들었어. 곳곳에 방어구까지 차고!”
용병들은 다가오는 오크를 보며 너나 할 것 없이 웅성거렸다. 이때 잘못 통솔하면 사기는 떨어지고 용병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 것이다.
이때야말로 용병대장의 노련함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만일 이곳에 카일이 있었다면 이들에게 겁을 잔뜩 먹인 뒤, 사방으로 도망가게 만들어 처음 목적대로 카일을 손에 넣을 수 있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코퍼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이미 카일은 후미에 있었고, 모두 지난 일일 뿐이었다.
“오크는 오크일 뿐이다. 모두 정신 차려!”
코퍼의 외침에 용병들은 흐트러졌던 마음을 추스르고 다가오는 오크들을 경계했다.
“기다려라.”
코퍼는 달려오는 오크들을 긴장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점점 가까워져 오는 오크들은 들고 있는 무장에서 방어구까지, 클럽(몽둥이)이나 낡고 녹슨 무기를 든 일반 오크들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지금이다, 쏴라.”
코퍼의 외침에 마차와 수레로 몸을 감추고 있던 상단 일꾼들이 일제히 일어나 석궁을 쏘기 시작했다. 아일론 상단은 몬스터 부산물을 취급하는 상단이었다. 그래서 항상 위험한 오지 마을로 상행을 떠나는 일이 많았다. 때문에 상단 일꾼들도 몬스터의 습격에 대비해 항상 석궁을 가지고 다녔다. 석궁은 활과 달리 짧은 거리에서도 강력한 관통력을 보이기에, 오십 보 안에서도 오크에게 치명상을 줄 수 있었다.
“취익-”
오크들은 베틀 엑스를 방패처럼 올려, 쏟아지는 화살의 비를 막으며 상단으로 난입했다.
“막아!”
커다랗게 말한 코퍼는 검을 뽑아 들고 선두에서 달려드는 오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까강
“헉.”
오크의 베틀 엑스와 검이 부딪치는 순간, 코퍼는 찢어질 것 같은 통증에 검을 손에서 놓칠 뻔했다.
“보통 오크가 아니다. 혼자 상대하지 마라!”
코퍼는 황급히 뒤로 물러나 모두에게 알렸다. 그리고는 검을 들어 떨어져 내리는 베틀 엑스를 막았다.
쾅-!
“크윽.”
힘에 못 이긴 코퍼는 연신 뒤로 밀려났다. 일반적인 오크라면 처음 코퍼가 내려친 일검에 두 쪽으로 갈라져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반대였다. 오크는 무지막지한 괴력으로 B급 용병인 코퍼를 압도하고 있었다.
“크아악.”
“아악.”
코퍼의 귓가로 단말마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코퍼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개인 용병들이 치명상을 입고 죽어가는 소리였다.
지금은 일단 무리를 해서라도 오크의 숫자를 줄여 놓아야 했다.
“흐압!”
결심을 내린 코퍼는 뜻 모를 기합과 함께 오크를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앞으로 뻗어가는 코퍼의 검 위로 푸른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엑스퍼트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오러 소드까지는 완벽히 만들 수 없지만, 코퍼도 엑스퍼트인 만큼 어느 정도 흉내는 낼 수 있었다.
‘서둘러야 한다.’
오러를 끌어올리긴 했으나, 엑스퍼트 초급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코퍼는 오러를 지속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그 안에 최대한 오크의 숫자를 줄여 놓아야만 했다.
“취이익- 죽어라.”
오크는 코퍼의 장검 위에 어른거리는 오러를 보고도 겁내지 않고 베틀 엑스를 내리찍었다.
하지만 코퍼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베틀 엑스를 피해 오크를 스쳐 지나갔다.
“커억.”
곧 오크의 목이 길게 갈라지며 녹빛 핏물을 끊임없이 쏟아냈다. 하지만 코퍼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오러를 끌어올린 검으로 정확히 목을 갈랐지만, 가르는 순간 상당한 저항감이 느껴졌다. 그 말인즉슨 일반적인 오크보다 가죽이 질기고 단단하단 뜻이었다.
* * *
워드를 비롯한 세 여인이 아일론 상단과 합류했을 때에는, 이미 상단으로 오크가 난입해 들어온 뒤였다.
스윽
상단의 가장 후미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워드의 모습이 공기에 스며들 듯 사라졌다. 그리고 막 상단 일꾼을 향해 베틀 엑스를 내려치던 오크의 뒤로 푸른 기운의 검이 나타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후두두둑
허공에서 나타난 검이 사라지는 순간, 오크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바닥으로 쓰러져 버렸다.
쿠웅
“시안느. 어서 가요.”
이엘은 쓰러지는 오크를 보며 재촉했다. 이미 용병들이 만들어 놓은 방진은 무너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전 아가씨를 지켜야 합니다.”
시안느는 오크와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는 용병들을 보면서도 굳건하게 이엘의 앞을 막아섰다.
“지금 용병들이 밀리고 있어요. 이대로 용병들이 모두 죽으면, 우리만으로 저들을 당해낼 수 없어요.”
이엘은 초조함을 숨기지 못했다.
사실 시안느도 용병들을 도와줄 생각을 아예 안 한 건 아니었다. 다만 그동안의 반감이 그녀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여차하면 일행만 데리고 카일이 있는 후미로 갈 생각이었다.
“그럼 제가 먼저 가보겠어요. 시안느 경은 여기서 아가씨를 보호해 주세요.”
세인이 말에서 뛰어 내렸다. 그리고는 시안느나 이엘의 대답도 듣지 않고 자리를 벗어났다.
그녀가 달려나가는 모습은 유려했다. 크게 발을 굴려 뛰어오를 때는 한 마리의 작은 새처럼 아름답기까지 했다.
정신없이 흘러가는 상황 속에서도 용병들의 시선이 세인에게로 향했다.
“하압.”
짧은 기합과 함께 세인의 검이 막 마차로 베틀 엑스를 내려치는 오크를 향했다.
오크도 세인이 다가오는 것을 눈치챘는지 내려찍으려던 베틀 엑스를 횡으로 휘둘렀다. 무거운 베틀 엑스를 내려치던 동작에서 갑자기 횡으로 휘두르는 것은 보통 오크, 아니 몬스터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행위였다.
필시 근육과 관절에 엄청난 부하가 걸려 양팔이 버티지 못하고 파괴되고 말 터였다.
“꺄!”
예측범위를 완전히 벗어난 변칙공격이라 도저히 피할 수 없을 것만 같아 보여, 이엘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세인은 유연하게 허리와 머리를 뒤로 꺾으며 마치 묘기를 부리듯 베틀 엑스를 피했다.
아슬아슬하게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베틀 엑스를 뒤로한 세인은, 허리를 튕겨 오크의 목을 향해 섬전처럼 찔러 들어갔다.
푸우욱
세인의 검이 오크의 목을 깊숙이 찌르고 들어갔다.
“크르릉.”
오크가 낮은 소리를 내며 울컥 피거품을 흘렸다. 손에 있던 베틀 엑스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쿵
둔중한 충격음과 함께 오크는 바닥으로 쓰러져 버렸다.
세인은 오크를 힐끔 쳐다보더니 다시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대단하군요.”
세인이 베틀 엑스에 참혹하게 죽을 줄 알고 두 눈을 가려버린 이엘과 달리, 시안느는 세인의 검술을 똑똑히 보았다. 자신이었어도 제대로 피하지 못했을 돌발적인 공격에도 허리를 뒤로 젖혀 피하는 모습은 매끄럽고 부드러웠다.
더구나 목 위에 드러난 작은 약점을 정확히 노린 정교함과 세심한 움직임까지. 시안느는 그녀의 놀라운 재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