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용병의 세계
퍽
“크윽.”
다행히 뼈가 부러지진 않았다. 하지만 바닥에 부딪히며 받은 충격이 워낙 커 제대로 일어날 수 없었다.
“뭐야!”
버크 역시 전력을 다해 브린을 바짝 쫓고 있었다. 때문에 그 역시 카일을 발견하고도 제대로 멈출 수 없었다. 카일은 버크와 충돌하기 직전, 옆으로 비켜서 발목을 살짝 건드렸다. 순간 중심을 잃은 버크가 그대로 땅에 처박혀 브린의 앞까지 데구루루 굴러갔다.
“커허헉.”
볼썽사납게 바닥을 뒹군 충격이 컸는지 버크는 한동안 일어나지 못하고 고통을 호소했다.
맨 뒤에서 오고 있던 아덱은 버크가 카일에게 당하는 모습을 본 순간 몸을 틀었다. 카일이 버크의 발목을 차며 옆으로 피하는 동시에, 아덱을 잡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짧은 순간 날렵하게 몸을 비트는 아덱의 모습에 카일은 탄성을 터트렸지만 딱 그뿐이었다.
“어딜.”
카일은 크게 한 걸음을 내디디며 왼손을 뻗었다. 아덱의 팔이 카일의 손아귀에 빨려 들어가듯 붙잡혔다.
“너도 저기서 쉬고 있어!”
카일이 아덱의 팔을 당기자 아덱은 저항도 못 하고 그대로 딸려왔다. 카일은 오른손으로 아덱의 뒷덜미를 잡아 뒤로 던져 버렸다.
퍼억
땅을 짚고 일어나려던 브린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아덱을 보곤 기겁했다. 이리로 갈까 저리로 갈까 갈팡질팡하던 브린은 결국 피하지 못하고 나뒹굴었다. 바로 버크의 몸 위로 말이다.
“크악.”
세 사람이 한데 어울려 다정한 화해의 시간을 갖는 동안, 카일의 눈앞에 두 마리의 늪지 트롤이 울부짖으며 나타났다.
둘 다 흥분해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늪지 트롤은 영역성이 강한 몬스터로, 늪지를 중심으로 꾸린 자신의 영역을 잘 벗어나지 않았다.
“저 순한 녀석이 왜 저렇게 화가 났지?”
보통 용병들은 늪지 트롤과 일반 트롤을 잘 구분하지 못했다. 생김새가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일은 오크 랜드에서 살면서 몇 번 보았기에 잘 알고 있는 녀석이었다.
몬스터 특성상 흉측하게 생기긴 했다. 하지만 일반 트롤처럼 흉포하지 않았고 몬스터치고는 순한 편이었다. 이 녀석들은 늪지에 사는 식물과 파충류를 주식으로 삼았다. 가끔 늪에 빠진 동물이나 몬스터를 먹기도 했지만 굳이 공격해 잡아먹진 않았다. 그러니 먼저 나서서 건들지만 않으면 그다지 위험하지 않은 놈들이었다.
‘특별한 이유’ 가 있지 않은 이상은 말이다.
“이 녀석은 좀 특이한데?”
늪지 트롤은 암수가 같이 있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보통 짝짓기가 끝나면 수컷은 떠나고 암컷만이 습지에 남아, 새끼를 낳아 홀로 길렀다. 그런데 눈앞에 나타난 몬스터는 특이하게 암놈과 수놈이 같이 나타난 것이다.
“하긴 요즘 짝짓기 철이긴 하지만.”
의구심이 풀리지 않았으나 카일은 그냥 그대로 납득했다. 더 생각해 봤자 귀찮기만 했기 때문이었다.
“자… 와라.”
환도 손잡이를 쥔 카일은 자세를 낮추고 허리를 비틀었다.
“저 녀석 지금 뭐 하는 거야!”
엉망진창으로 엉겨있던 세 명이 겨우 몸을 추스르고 앞을 보았다. 그들의 시야로 트롤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서 있는 카일의 모습이 들어왔다.
상체를 움츠리고 검을 잡은 모양새는, 도약을 위해 몸을 한껏 웅크린 거대한 레오파드처럼 강대해 보였다.
“안돼! 녀석은 트롤이라고.”
멍하니 카일을 바라보고 있던 브린과 달리, 아덱은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 크게 소리쳤다.
“늦었어요.”
브린이 앞으로 뛰쳐나가려는 아덱을 잡았다.
“놔! 이 미련한 놈아. 저 녀석이 바로 카일이야! 쟤가 죽으면 모든 게 끝장이란 말이야.”
아덱의 고함이 브린의 귓가에 이명처럼 울렸다.
“젠장, 안돼.”
브린은 그때서야 카일에게 달려가려 했지만, 버크가 벌떡 일어나 두 사람을 붙잡았다.
“다 죽을 생각입니까? 이미 틀렸어요.”
그리고 그의 말이 옳았다. 버크의 말처럼 이미 카일의 코앞에 다가온 트롤은 묵직한 클럽을 휘두르고 있었다.
* * *
“아주 재밌는 영감이군. 암살자 주제에 정면승부를 원하다니.”
보일이 피식 웃으며 가죽으로 만든 탄환 주머니에서 탄환을 꺼내, 새로 장전을 한 후 주변을 살폈다.
보일은 무모한 싸움을 할 생각이 절대 없었다. 아무리 노인이 정정당당한 대결을 원한다 해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일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비슷한 실력을 갖춘 자들이 맞붙는다면 그날의 날씨, 컨디션, 바람의 방향이나 태양 빛의 세기 따위 같은 사소한 것들이 승부에 영향을 줬다.
경지가 높아질수록 이러한 경향은 심화됐고, 상급 엑스퍼트 간의 전투는 이보다 더 세부적인 것 하나에 승패가 결정됐다. 그런데 이곳에는 무려 25명의 어쌔신들이 주변을 포위하고 있었다.
이 점만으로도 이미 보일은 심리적인 압박을 받는 중이었다.
여기에 노인과 싸움 도중 뒤에서 공격이라도 받는다면 보일은 죽을 수밖에 없었다. 보일은 이런 부당한 대결을 할 생각도, 의지도 없었다.
‘난 용병이지 기사가 아니야! 때문에 자존심을 세울 이유도 없다. 그저 이기기만… 아니, 살아남기만 하면 된단 말이지.’
보일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신중하게 뒤로 물러났다.
칼빈은 알지 못했지만 보일은 흩어진 녀석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칼빈을 위협하며 시간을 끈 것이었다. 제일 먼저 도착한 것은 의외로 노인이었다. 그러나 보일에겐 잘된 일이었다.
“그럼 사냥을 시작해 볼까?”
소총을 등 뒤로 돌린 뒤 보일은 허리에서 검을 뽑았다.
조금 전 노인이 발산한 오러 블레이드로 인해 검신에 커다란 흠이 생겼다. 천만다행으로 검이 부러질 정도는 아니었다.
“쯧, 카일에게 한 소리 듣겠군.”
보일은 검에 생긴 흠집을 보며 중얼거렸다. 나중에 들을 카일의 잔소리가 걱정된 모양이었다.
보일의 기습 공격에 25명 중 3명이 죽자, 검은 여우들은 3명씩 7개 조를 편성해 주변으로 흩어져 보일을 추적했다. 한 명은 노인을 보좌하기 위해 남았다.
하지만 칼빈이 예기치 못한 공격을 당하면서, 외곽으로 퍼져있던 검은 여우들은 빠른 속도로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다.
“커헉.”
공격은 은밀하고 재빠르게 이루어졌다.
검은 복면의 사내가 바위를 밟고 막 뛰어오르는 순간, 나무 뒤에서 튀어나온 검이 사내의 가슴을 꿰뚫었다. 마치 튀어나온 검에 복면 사내가 뛰어든 것처럼 보이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공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갈비뼈를 부수고 심장을 가른 검은 그대로 횡으로 휘둘러졌다.
후웅-
위협적인 소리와 함께 우측에 있던 사내의 가슴팍이 쩍 벌어졌다. 사내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보일은 손에서 검을 놓아 버렸다. 그리고는 허리에서 단검을 뽑아, 막 피리로 입으로 가져가려는 사내에게 던졌다.
빛살처럼 날아간 단검이 정확하게 사내의 목에 박혀 들었다.
모든 것이 눈 깜빡할 정도의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보일은 천천히 다가가 시체들의 몸에서 검과 단검을 회수했다.
“하나.”
멀리서 아련한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보일은 그 소리를 따라 북쪽으로 향했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더운 피를 흘리는 세 구의 사체만이 남아있었다.
* * *
“무슨 일이냐?”
지친 얼굴로 죽은 부관을 내려다보고 있던 칼빈에게 조장 한 명이 다가왔다. 근처에 있던 2개 조 6명이 가장 먼저 칼빈과 합류하면서, 조장 한 명이 피리로 칼빈의 지시를 전달하고 있었다.
“서쪽에서 들려오던 피리 소리가 끊어졌습니다. 여러 차례 불러봤지만, 답신이 없습니다.”
“뭣!”
“북쪽에서 오던 신호도 끊겼습니다.”
또 다른 조원이 달려와 급히 보고했다.
검은 여우들은 피리 소리로 명령을 주고받고 있기에, 끊임없이 피리를 불어 자신의 위치와 방향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를 통해 보다 효율적이고 단단한 포위망을 구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보일 역시 그 소리를 따라 놈들을 찾아내는 게 가능했다. 비록 의미를 알 순 없더라도, 피리 소리가 들리는 방향 정도는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숲은 보일이 십여 년간 매일같이 드나들던 곳이었다. 나무 한 그루 바위 하나까지 모르는 게 없었다. 놈들의 위치만 파악한다면 어느 방향에서, 어떤 길을 통해 올 거란 건 얼마든지 예측할 수 있었다.
보일은 그저 적당히 매복해 있다가 적들을 덮치기만 해도 쉽게 죽일 수 있었다.
엑스퍼트 초급과 중급 실력자들이 조를 이루고 있다 하나, 엑스퍼트 상급의 보일이 마음먹고 기습을 한다면 절대 피할 수 없었다.
“젠장, 함정이다. 서둘러 신호를 보내라! 놈이 이곳으로 달려오는 대원들을 노리고 있다.”
사정을 파악한 칼빈이 직접 피리를 물고 신호를 보냈다.
삐이이이
멀리서 피리 소리가 들려오자, 다가오던 검은 가면의 사내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벌써 눈치를 챘군.”
보일은 위를 올려다보았다.
목에 밧줄이 감긴 사내가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허나 살 속 깊이 파고든 밧줄은 몸부림이 격해질수록 숨통을 조일뿐이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보일은 냉혹해진 얼굴로 칼빈이 있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징그러운 얼굴과 붉은 눈동자에는 분노가 어려 있었고, 휘두르는 클럽에는 깊은 원한이 배어 있었다.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미안하다.”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클럽을 보며 카일은 사과를 건넸다. 카일은 두 걸음 앞으로 튀어 나가 클럽을 피하며, 웅크렸던 몸을 튕겨 뛰쳐 올랐다.
스릉
맑은 마찰음과 함께 카일의 환도가 뽑혀 나와, 푸른빛을 뿜으며 늪지 트롤의 목을 스쳐 지나갔다.
착-
“크륵, 큭, 크르륵.”
늪지 트롤이 클럽을 늘어트리며 휘청였다. 증오에 찬 눈빛으로 브린 일행을 노려보던 트롤은 힘없이 클럽을 놓았다.
쿠웅
거대한 클럽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늪지 트롤의 목도 툭 떨어졌다.
쏴아아
곧 목이 떨어져 나간 트롤의 몸통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잘린 단면에서 녹빛의 핏물이 브린과 버크 그리고 아덱의 몸 위로 비처럼 쏟아졌다.
하지만 세 사람은 피할 생각도 못 하고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단 한 수!
트롤을 잡은 사람은 그들도 많이 알았다. 그러나 단 한 명이 나서서 죽인 건 처음 보았다. 트롤 사냥은 수십의 소드 유저로 이루어진 용병대나, 파티를 이룬 개인 용병들, 혹은 초급 엑스퍼트 서너 명이 뭉쳐 이뤄지는 게 일반적이었다. 여럿이 달려들어야 겨우 잡을 수 있는 몬스터가 바로 트롤이란 놈이었다. 그런데 카일은 혼자서 단 한 수에 트롤을 죽였다.
압도적인 강함!
세 사람은 이미 카일에게 압도되고 말았다.
“오러… 소드.”
브린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엑스퍼트의 전유물.
초급의 마지막 단계에서나 겨우 쓸 수 있는 강자의 상징.
그것이 바로 오러 소드였다.
“크하아악!”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조금 전 보았던 트롤보다 더 크고 무지막지하게 생긴 트롤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왔다.
암컷이 죽었다.
새끼가 죽었으니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될 암컷이었다.
자신의 새끼를 낳아 길러줄 암컷을 눈앞에 있는 작은 인간이 죽여 버렸다. 주제도 모르고 감히.
“크와악.”
이놈의 인간을 죽여 뼈까지 씹어먹을 것이다!
수컷 트롤이 클럽을 횡으로 휘둘렀다. 처음 상대했던 트롤과는 힘과 빠르기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위력적이었다.
카일은 고개를 숙여 클럽을 피한 뒤 안으로 파고들었다.
수컷 트롤은 죽은 암컷보다 신장이 커, 뛰어올라 환도를 휘둘러도 목을 베어내기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진 않아.”
카일의 환도가 빠르게 뽑혀 나왔다.
스각
카일이 트롤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푸화악-
트롤의 허벅지가 길게 갈라지더니 피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이내 상처 주변으로 피거품이 일어났다. 부글거리는 피거품이 꺼지자 서서히 아물고 있는 상흔이 보였다.
“역시 트롤인가?”
성질도 온순하고 일반 트롤과 습성이 달랐음에도 늪지 트롤이라 불리는 이유는, 바로 이 놀랄만한 재생력이 일반 트롤 못지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지.”
카일이 허벅지에 난 상처로 주춤거리는 트롤에게 다시 달려들어 환도를 휘둘렀다.
환도가 움직일 때마다 트롤의 허벅지에는 반드시 하나의 긴 자상이 생겼다. 트롤의 다리가 피거품으로 범벅이 되었다. 격노한 트롤이 클럽과 손을 마구잡이로 휘둘렀지만, 카일은 트롤의 공격을 피하며 집요하게 하체를 공격했다.
그리고 마침내 트롤이 무릎을 꿇었다.
쿵
카일은 틈을 놓치지 않았고, 수컷 트롤의 목을 베었다.
만약 다른 때였다면 브린과 버크는 심장에 담긴 피를 채취하려 달려들었을 것이다. 트롤의 심장에 고인 순도 높은 피는, 포션의 주재료로 비싼 값에 팔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환도를 늘어트린 채 다가오는 카일의 모습에 둘은 고양이 앞의 생쥐처럼 꼼짝 못 했다. 긴장한 것은 아덱도 마찬가지였다. 셋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쓴 트롤의 피를 닦지 못하고 카일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야 그들도 깨달았다.
보일 자경 대장이 어째서 엄청난 가치를 지닌 운석검 두 자루를 이제 갓 성인이 되는 소년에게 들려 보냈는지.
단순히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내어준 것이 아닌, 진정 검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기 때문이었다.
17살에 초급 엑스퍼트의 마지막, 어쩌면 중급 엑스퍼트에 올랐을지 모를 천재 소년.
코퍼가 아니라 코퍼 용병대 전원이 덤벼도 카일 한 명에게 전멸할 것이다.
아니. 조금 전 트롤의 목을 잘랐던 바로 그 일 검만 해도 받아낼 자가 없었다.
또한 그들은 그의 옆에 왜 아름다운 여인들이 붙어있었는가도 깨달았다.
강자에겐 언제나 아리따운 여인이 있기 마련이었다.
강자는 그만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나이가 어려도 강자라면 모든 것이 인정되는 곳 바로 용병의 세계였다.
그리고 강자에게 덤벼든 그들은 이제 그 책임을 져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