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121화 (121/404)

121.늪지괴수

푸우욱

검이 살과 뼈를 부수고 깊숙이 박혔다. 정확하게 심장을 파고든 것이다.

절대 살아남을 수 없는 곳. 치명상이었다. 상대가 살아있는 존재라면 말이다. 하지만 이미 상대는 목이 반쯤 잘려나가 있었다.

“이런 함정….”

칼빈은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탕-

묵직한 폭음과 함께 부관의 심장에 엄지손가락만 한 구멍이 뚫리며 피보라가 일어났다. 붙잡을 틈도 없이 부관은 그대로 뒤로 쓰러져버렸다. 즉사였다.

타앙

또 한 번 낮은 폭음과 함께 몸을 숨기고 있는 블루 우드로 무언가가 날아왔다. 부서진 나무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얼굴에 쏟아졌다. 하지만 통증조차 느낄 수 없을 만큼 당황스러웠다.

“아티팩트!”

설마 놈이 아트팩트를 가지고 있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버벅거리는 것도 잠시, 칼빈은 목에 걸린 작은 피리를 입에 물었다. 놈을 이곳에서 반드시 잡아야 한다.

놈은 벌써 세 번 이상 아트팩트를 사용했다.

아티팩트는 영원히 사용할 수 없다. 강력한 마법이 인첸트된 아티팩트일수록 횟수가 제한되기 마련이었다.

“반드시 잡는다.”

칼빈이 피리를 힘껏 불었다.

삐이익-

기다렸다는 양 숲 여기저기서 낮은 피리 소리가 울리더니, 사방에서 검은 여우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선두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오고 있는 사람은 황금빛 검을 든 노인이었다.

또다시 폭발음이 터졌다. 달려오던 노인이 그 자리에서 ‘퍽’ 사라졌다. 아무것도 맞추지 못한 총알을 애꿎은 나무에 커다란 상처만 남겼다.

“이노옴!”

사라졌던 노인은 좌측에서 나타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노호했다.

그 역시도 고서클의 아티팩트를 지니고 있어 쉽게 보일의 총탄을 피한 것이다.

노인이 가진 아티팩트는 짧은 거리를 순식간에 이동하게 해주는 6서클 블링크가 인첸트된 아티팩트로, 상대가 대비할 틈도 주지 않고 순식간에 다가가 목숨을 취할 수 있었다. 노인의 비밀무기인 셈이었다.

노인은 지금까지 정정당당을 외쳤지만, 대결 도중 위기에 처한다면 아티팩트를 사용할 작정이었다.

이런 비장의 수를 숨기고 있어, 승리하리란 자신감에 차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노인은 생각지도 않은 순간, 생각지 않은 곳에서 자신의 최대 비밀무기를 얼떨결에 노출하고 만 것이다.

‘이 비밀은 누구도 알아서는 안 돼.’

노인이 갈무리하고 있던 살심이 폭발적으로 피어올랐다.

“어디 있느냐. 나와라, 겁쟁이처럼 숨어있지 말고 나오란 말이다!”

노인의 쩌렁쩌렁한 고함이 숲속을 뒤흔들었다.

* * *

나무 위의 표식을 따라 조심스럽게 접근하자, 거대한 협곡 아래로 깊고 넓은 습지가 나타났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다니….”

빛도 거의 비치지 않는 거대한 습지는 질척한 진흙과 이끼, 그리고 물이 반쯤 잠긴 나무들이 뒤엉켜 음침하면서도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멍하니 서 있지 말고 빨리 찾아!”

자신의 말이 사실로 드러나자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브린이 명령하듯 말했다.

더는 브린과 다투기 싫은지 버크와 아덱은 흩어져 조심스럽게 늪지를 살피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서성이던 버크가 짧은 휘파람을 불었다.

휘익- 휙

휘파람 소리가 울리자 다른 곳을 뒤지고 있던 브린과 아덱이 달려왔다.

“저기.”

버크가 가리킨 방향에는 엄청난 크기의 나뭇더미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얼마나 크고 높다랗던지 마치 거대한 무덤을 보는 것만 같았다.

“정말 있었구나…!”

브린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 자신조차도 알아낸 정보를 신뢰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눈꼬리를 찢은 버크가 브린을 사납게 쳐다보았다. 찔끔한 브린이 모르는 척 눈알을 굴리며 나뭇더미로 다가갔다. 다행히 주위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저길 봐라.”

아덱이 브린의 팔꿈치를 잡았다.

“저 녀석인 것 같다.”

“마, 맞아요.”

브린이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이며 달려갔다. 아덱이 가리킨 곳엔 열 서너 살가량 소년 정도 됨직한 몸집을 지닌 몬스터가 있었다. 녹색 피부를 지닌 몬스터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늪 가장자리에 몸을 반쯤 담그고 장난치고 있었다.

아덱이 긴장한 듯 주변을 살피며 마른 침을 삼켰다. 이곳은 놈의 보금자리였다. 지금 당장 놈이 나타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어떻게 할 거냐.”

“죽여야죠. 우린 저 녀석의 피만 가지고 가면 됩니다.”

음흉한 미소를 지은 브린이 말을 이었다.

“어미가 돌아오기 전에 서둘러 끝내야 합니다.”

‘어미’라는 단어에 버크와 아덱의 미간이 우그러졌다. 아무리 몬스터라고는 하지만, 새끼에 불과한 개체를 죽인다는 게 괜스레 찝찝한 것이다.

“그럼 네가 죽여.”

우물쭈물하던 버크가 브린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버크가 제시한 명쾌한 해답에 아덱은 맹렬히 동조했다. 노골적으로 표를 내진 않았지만 아덱 역시 썩 내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우린 망을 보고 있지.”

졸지에 행운의 당첨자가 되어버린 브린은 인상을 팍 찡그렸다. 그러나 이미 둘은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고 있었다.

“한다. 그래, 내가 해!”

브린은 툴툴거리며 검을 뽑아 들었다. 단번에 목을 잘라버릴 심산이었다.

숨을 죽인 채 습지로 다가간 브린은 검을 높게 치켜들었다가 힘껏 내려쳤다.

강한 힘으로 단숨에 그어 내리자 어린 몬스터는 단말마도 지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목이 꺾인 몬스터의 시체가 뒤로 넘어갔다. 이 모든 것은 이미 브린의 생각과 그대로 일치했다. 다만.

“크와아악!”

집채만 한 괴수가 협곡을 무너트릴 정도로 포효를 하며 몸을 일으켰다.

눈에 잔뜩 핏발이 서 있는 괴수는, 브린과 그의 손에 들려있는 어린 자식의 목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 망했다.”

브린이 손에 들려있던 어린 몬스터의 목이 툭 떨어져 늪 속으로 사라졌다.

“크화악.”

분노에 휩싸인 괴수는 그대로 습지를 박차고 달려 나왔다.

첨벙첨벙

동공을 벌겋게 물들인 채 돌진하는 괴수를 본 브린은 딱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튀어!”

브린은 뒤를 돌아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사람 살려!”

외마디 괴성을 지른 브린이 버크와 아덱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야, 이….”

버크는 욕을 퍼부으려 했으나, 이미 늪지에서 빠져나온 괴수가 바로 앞까지 달려오고 있었다.

“달려.”

더는 지체할 겨를이 없었다. 아덱과 버크는 급히 브린의 뒤를 따랐다.

그때였다.

쏴아아하고 물 튀는 소리가 나더니, 브린의 옆쪽에서 새로운 괴수가 몸을 일으켰다.

또 다른 괴수가 나타난 것이다.

이번에 나타난 괴수는 뒤에서 쫓아오는 괴수보다 더 크고 흉측해서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아아악.”

섬뜩한 기운을 느낀 브린은 바닥을 뒹굴었다. 두 번째로 등장한 괴수가 갑자기 클럽을 휘둘렀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거리가 있어 클럽에 맞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정권 안에 있던 낮은 나무들이 박살 나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모습은 위협을 넘어 두렵기까지 했다.

“뭐해! 안 뛰고.”

바닥에 쓰러져 미적거리고 있는 브린을 걷어찬 버크가 빽 소리를 지르며 앞서 달려갔다.

“크아앙-”

자신을 과시하려는 것처럼 크게 포효를 터트린 괴수는, 뒤에서 달려오는 또 다른 괴수를 힐끔 바라봤다.

하지만 피붙이를 잃어 분노에 사로잡힌 괴수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지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잠시 실망감에 사로잡혀있던 괴수는 다시 클럽을 고쳐 잡고 사냥감들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새롭게 나타난 괴수는 수컷으로, 얼마 전 이곳에 도착해 암컷과 짝짓기를 하기 위해 호시탐탐 틈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새끼가 있는 암컷은 수컷을 극도로 경계하며 빈틈을 주지 않았다.

때문에 수컷 괴수는 새끼를 죽이기 위해 지금껏 암컷이 방심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새끼가 죽으면 암컷은 본능적으로 번식을 위해 짝짓기를 하기 때문이었다. 암컷 역시 수컷이 자신의 자식을 노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런데 인간이 나타나 새끼를 죽이고 만 것이다. 평소라면 항상 어린 새끼 옆에 붙어 있었을 암컷이지만, 기회를 노리는 수컷을 경계하느라 방심한 사이 일어난 일이었다.

분노한 암컷 괴수가 녀석들을 쫓는 모습에 수컷 괴수는 자신을 한껏 뽐내며 뒤를 쫓았다. 새끼가 죽은 이상, 저 암컷은 자신의 차지라 확신한 것이다. 수컷은 저 인간들을 죽여 암컷에게 선물할 생각에 한껏 고무되었다.

* * *

“허억, 헉, 헉.”

굽힌 무릎을 잡고 거친 숨을 몰아쉬던 브린은 뒤를 돌아보았다.

“야 이 미친놈아! 한 마리라며.”

화가 잔뜩 났는지 버크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아덱 역시 브린을 살벌하게 쏘아보고 있었다. 자칫 여기서 모두 죽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아, 아니 나도 정말 한 마리인 줄 알았어. 진짜야.”

브린이 펄쩍 뛰어오르며 결백을 주장했으나, 버크와 아덱은 믿지 못하겠다는 것처럼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크아악!”

“젠장, 달려! 지금은 어쩔 수 없어.”

브린이 쏜살같이 앞으로 뜀박질했다. 이미 그로서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무조건 상단과 합류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여기 모인 세 사람은 절대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야, 브린! 어쩔 거야, 이 일을 어쩔 거냐고.”

버크가 달려가는 브린을 향해 분통을 터트렸다.

사실 코퍼의 계획은 후미에서 몬스터를 몰아 카일 일행을 공격하게 하는 것이었다. 베링 산맥 초입이라 몬스터를 찾는 게 어렵긴 하겠지만, 소규모 무리라면 어찌어찌 찾을 수 있을 거라 판단한 것이다. 그럼 카일 일행은 자연스럽게 상단과 합류하게 될 터였다.

몬스터는 자신과 상단용병들이 처리해야겠지만, 그리 강한 놈들이 아닐 테니 큰 피해 없이 마무리될 거라 생각했다.

소드 엑스퍼트인 코퍼는 웬만한 몬스터는 상처 없이 혼자서도 처리할 자신이 있었다. 만일 계획이 성공한다면 카일에게 생명을 구해준 은혜도 만들고, 상단의 용병들은 몬스터를 끌고 온 카일을 욕하며 압박을 가할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결국 카일도 자신에게 더더욱 기댈 수밖에 없을 거라 여긴 것이다.

하지만 계획은 브린이 도자기 기술을 노리자고 하면서 완전히 바뀌었다.

“처음부터 네놈 말을 듣는 게 아니었어.”

화난 버크가 지껄였지만 브린은 대꾸도 하지 않고 뛸 뿐이었다.

“지금은 누굴 탓할 때가 아니야. 일단 이 위기는 벗어나야 할 거 아니야.”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리는 굵은 땀방울을 훔치며 아덱이 버크를 달랬다. 그러나 실은 그도 처음부터 브린의 계획을 반대하고 싶었다. 비단 브린 뿐 아니라 대장인 코퍼의 계획도 썩 내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코퍼를 믿었기에 선택을 존중해 이번 일을 승낙한 것이다.

“저놈을 보세요. 이대로 상단에 뛰어들어, 혼란한 틈에 빠져나갈 생각인 겁니다.”

답답했는지 버크가 뛰면서도 가슴을 두들겼다.

“그렇게 되면 우린 모두 끝이란 걸 알지 않습니까? 용병들도 모두 알게 될 겁니다. 그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습니까. 아니, 그전에 코퍼 대장이 우릴 전부 죽여버릴 겁니다.”

아덱이 장탄식을 뱉었다. 브린의 작전은 코퍼의 계획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다만 코퍼와 용병들이 적당히 상대할 수 있는 것에서, 아주 강력해 모든 용병들이 포기하고 도망갈 수밖에 없는 몬스터로 바꾼 것이다. 그리고 혼란을 틈타 카일을 납치하는 게 최종 목표였다.

하지만 이때 절대 코퍼 용병단의 사람들이 나타나서는 안 됐다.

상행이 끝난 코퍼 용병대의 세 사람이 몬스터를 끌고 나타난다면, 당연한 수순으로 의심을 살 게 뻔했다. 상단에는 경험이 풍부한 검증된 개인 용병들이 많았다. 검증되었다는 말은 실력만 뛰어나단 말이 아니었다. 위험한 상황에서도 오래 살아남았다는 의미였다.

그들은 그만큼 눈치도 빠르고 위기를 본능적으로 알고 대처하는 능력도 탁월했다.

아무리 강력한 몬스터라도 상단사람이나 용병들을 모두 죽일 순 없으니, 이 일은 널리 퍼져 나갈 것이다. 그리고 결국 이번 일이 발각되면 용병 길드가 나설 것이다.

“이번 일은 상행 중 우연히 벌어진 일이어야 됩니다. 하지만 지금은!”

“크화악-”

울상을 짓곤 주절거리던 버크는 사색이 되어 앞으로 뛰쳐나갔다. 놈이 벌써 바짝 따라붙은 것이다.

“닥치고 달려.”

버크에게 일갈한 브린은 꽁지가 빠지도록 앞으로 뜀박질했다.

“저 죽일 놈.”

버크가 다채롭고도 험한 욕을 뱉으며 브린의 뒤를 쫓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카일이 숨어있던 언덕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겠네.”

둘이 하도 큰 목소리로 다투는 통에 꽤나 멀리 떨어져 있던 카일도 대충 무슨 이야기인지 들을 수 있었다.

상단이 사라진 길을 응시하던 카일은 이윽고 길 중앙에 버티고 섰다.

“이런 미친!”

이런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구부러진 길을 돌아가려는 브린의 눈앞에 장대한 체구의 사내가 떡 하니 나타났다. 길 한가운데를 막고 있던 데다가 가속도까지 붙은 터라, 브린은 제대로 멈춰서지 못하고 카일과 그대로 부딪혔다. 브린이 눈을 감고 충격에 대비하려는 순간, 카일의 손이 번개같이 다가와 그의 멱살을 틀어쥔 뒤, 달려오던 속도를 그대로 살려 뒤로 던져 버렸다.

“아아악-”

짧은 비명과 함께 허우적거리면서 공중으로 떠오른 브린의 몸이 그대로 바닥에 추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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